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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박정희 대통령 서거 42주년을 맞아...
  • 박광준
  • 등록 2021-10-22 23:2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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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광준 기자] 박정희 대통령(1917. 11. 14~1979. 10. 26)은 한국의 군인이자 정치가로 대한민국 제5~9대 대통령이다. 쿠데타를 통해 정권을 잡은 뒤 1963년 5대 대통령이 됐고, 장기집권을 위한 3선 개헌을 통해 1979년까지 재임했다. 그러다 1979년 10월 중앙정보부장이었던 김재규의 저격으로 사망했다.


1917년 경상북도 구미 선산(善山)에서 5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고, 1937년 대구사범학교를 졸업했다. 3년간 초등학교 교사로 근무하다가, 일본인 시학관과의 마찰로 사직, 이후 만주의 신경(新京: 지금의 장춘(長春))군관학교를 수석으로 수료하고 1944년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해 만주군 소위로 임관했다. 1945년 8.15 광복 이전까지 주로 관동군에 배속돼 중위로 복무했다. 이러한 이력으로 인한 친일 행적은 아직까지도 논란이 되고 있다.


박정희 대통령이 새마을훈장 수여하고 있는 모습/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광복 이후 귀국해 국군 창설에 참여했고, 조선경비사관학교(육군사관학교 전신) 제2기로 졸업하고 대위로 임관했다. 광복 직후 남로당에 가입해 활동했고, 1949년 좌익계열의 군인들이 일으킨 여수.순천사건을 계기로 군법회의에 회부된 뒤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만주군 선배들의 구명운동과 군부 내 남로당원 명단을 알려준 대가로 실형을 면하고 강제 예편됐다. 이후 육군본부에서 무급 문관으로 근무하다가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소령으로 복귀해 1953년 준장이 됐다. 


영동.동해고속도로 개통식에 참석한 박정희/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이후 제2군단 포병 사령관, 제5사단 사단장, 제6군단 부군단장과 제7사단 사단장을 거쳐 1958년 3월 소장으로 진급한 뒤 제1군 참모장으로 임명됐고, 6관구 사령관이 됐다. 1960년에는 군수기지 사령관, 제1관구 사령관, 육군본부 작전참모부장을 차례로 역임한 후 제2군 부사령관으로 전보됐다.


1961년 5월 16일 제2군 부사령관으로 재임 중에 5.16 군사쿠데타를 주도했고, 7월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돼 2년 7개월간의 군정을 실시했고, 1962년 윤보선 대통령이 사임하자 대통령권한대행을 맡았다. 그는 '재건국민운동본부'를 설치해 가족계획, 문맹퇴치화 운동을 벌이는 등 국토 및 경제 개발 계획에 착수했다. 이는 다수의 국민들로부터 호응을 얻었으나 군정기간 중앙정보부에 의해 '4대 의혹 사건' 등이 일어나는 등 어두운 면도 많았다. 


10.26사태, 대통령 박정희 시해 장면을 재현하고 있는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1963년 육군대장으로 예편해 민주공화당에 입당해 총재에 추대됐고, 같은 해 12월 제5대 대통령이 됐다. 그는 취임사에서 경제성장에 대한 확고한 의지를 표명했다. 이후 여론의 거센 반대에도 한일협정에 정식 조인하고 베트남 전쟁 파병을 단행하면서 외자를 모은다. 


이로 인해 매국과 총알받이라는 비난을 받았지만, 경제개발 5개년 계획과 인프라 건설을 통해여 차후 경제성장의 토대를 마련했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박정희대통령 육영수 영부인 묘/사진-박광준 기자 

박정희는 1967년 재선된 후 장기집권을 위해 1969년 3선개헌을 통과시키게 된다. 그리고 1972년 국회 및 정당 해산을 발표하고 전국에 계엄령을 선포한 후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대통령으로 선출됐다. 이로써 유신정권인 제4공화국이 출범한다. 


유신 초기 '근면, 자조, 협동'의 기치를 내세운 전 국민적 새마을운동을 전개했다. 이는 관 주도로 펼쳐진 운동인 탓에 부작용도 있었으나 절대 빈곤을 해소하는 데는 기여를 했다는 평가가 있다. 


박정희대통령 헌시비/사진-박광준 기자 

그러나 점점 커져가는 장기집권에 대한 불만, 빈부 격차, 국민들의 민주화운동으로 지지도가 하락하자 '긴급조치'를 발동해 정권을 유지하려 했지만 거센 저항에 부딪히자 이에 대한 관심을 북한으로 돌리기 위해 '자주.평화.민족대단결'을 민족통일의 3대원칙으로 규정한 1972년 7.4남북공동성명과 1973년 6.23선언이라 불리는 '평화통일외교정책(할슈타인원칙의 폐기)'을 제시했다. 그러나 실제 정책면에서는 북한의 비협조와 당시의 국제정세로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박정희 대통령 영구차 보존관/ 이 곳에  보존된 영구차는 1979년 10월 26일 서거하고, 11월 3일 거행된 박정희 대통령 국장시에 사용된 영구차로, 국장 당시 외부에 장식했던 국화꽃을 제거하고 그 자리에 장기 보존할 수 있는 유화를 그려 넣었다. 관을 외부에서도 볼 수 있도록 영구차 외부에 유리창을 설치했다./사진-박광준 기자 1974년 8월에는 영부인 육영수가 조총련계 문세광에게 저격당하는 등 본격적인 국민적 저항이 일어났다. 그리고 1979년 '부마민주항쟁(釜馬民主抗爭)'이 일어나고 그해 10월 26일 만찬석상에서 중앙정보부장 김재규(金載圭)에게 피격 당하면서 급서(急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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