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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 구석 구석 1] 무예와 학문을 두루 갖춘 고려 시대의 영웅, 강감찬 장군
  • 이승준 기자
  • 등록 2021-04-08 19:57:55
  • 수정 2024-02-12 15:0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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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감찬 동상/사진=이승준 기자

[이승준 기자] 우리 역사에는 위기의 순간에 나라를 구한 명장들이 많다. 그중에서도 무예와 학문을 두루 갖춘 고려 시대의 영웅, 강감찬 장군이 있다.


강감찬 장군은 거란 침략군을 귀주에서 크게 물리친 귀주 대첩의 영웅으로, 오랜 세월 백성들에게 존경과 사랑을 받아오고 있다. 


강감찬 장군은 고려 시대(948년)에 태어났다. 장군이 태어날 때 반짝반짝 빛나는 문곡성이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설화가 전해진다. 이 문곡성은 사람의 운명을 점치는 9개의 별들 중에 네 번째 별로 학문과 재물을 관장하는 별이다. 그래서 강감찬 장군이 태어난 곳의 이름도 별이 떨어진 곳이라고 해 ‘낙성대’로 이름 붙여졌다. 


낙성대박정희 대통령은 고려의 명장 강감찬 장군의 나라를 위한 슬기와 용맹을 이 나라 안보로 삼게하기 위해 장군이 출생하신 서울 봉천동 관악산기슭에 새로운 유적지로 조성토록 했다. 그리고 '낙성대'라는 휘호를 하사했다. 


서울특별시에서는 그 뜻을 받들어 1974년 6월 10일 이 곳에 안국사 안국문 사적비 등을 건립하고 박대통령이 하사한 휘호를 이 자연석에 각자하여 오늘의 낙성대를 조성했다. 


강감찬 장군은 거란과의 싸움인 귀주 대첩을 승리로 이끈 고려시대의 영웅이다. 그 당시는 거란족이 세 차례나 고려를 침입하던 시기로, 이처럼 위험해 처한 나라를 구한 영웅이 바로 강감찬 장군이다. 


발해를 멸망시킨 거란은 요나라를 세우고 맹위를 떨쳤다. 고려는 이런 거란에 대해 적대적인 관계를 유지하면서 북쪽으로 나라의 세력을 뻗쳐 나가려는 북진 정책을 펼쳤다. 결국 북진 정책이 원인이 돼 993년 거란의 소손녕이 고려를 침입했다. 



하지만 서희의 외교 담판으로 압록강 동쪽의 땅을 회복할 수 있었다. 그 후 1010년 거란이 두 번째로 침입했다. 그리고 압록강 남쪽의 강동 6주가 군사적 근거지가 되자, 거란은 이를 차지할 목적으로 1018년 다시 침입해 왔다. 


거란의 소배압이 10만 대군을 이끌고 세 번째로 고려를 침입하자 강감찬 장군은 20만 군사를 이끌고 압록강 근처 흥화진으로 진격했다. 이곳에서 강감찬 장군은 큰 밧줄에 소가죽을 꿰어 강둑을 막아 거란 군사들이 강을 건널 때 둑을 터뜨리는 전략으로 거란군을 귀주로 몰아 그곳에서 거란군을 크게 물리쳤다. 이 승리를 귀주 대첩이라고 한ㄷ. 이후 거란은 크게 패배하면서 더 이상 고려를 침범하지 못했다. 


귀주 대첩으로 승리를 거둔 강감찬 장군은 북방 민족의 침입을 막기 위해 성곽을 쌓고 국방 강화에 힘썼다. 1030년에는 고려 시대 최고의 관직인 문하시중에까지 올랐고, 1031년에 생을 마쳤다. 강감찬 장군이 죽자 덕종은 3일간 조회를 멈추고 장례식을 국장으로 치르게 했다고 한다. 


# 안국사 


안국문/사진=이승준 기자고려시대 명장 강감찬(姜邯贊, 948∼1031)의 사당으로, 강감찬 장군이 거란군을 물리치고 받은 추충협모안국공신(推忠協謀安國功臣)이라는 호를 따 안국사라고 이름을 지었다. 1974년 강감찬 장군의 출생 지역인 낙성대(落星垈)에 건립했고, 사당 주변을 공원화하여 낙성대공원을 조성했다. ‘큰 별이 떨어진 곳’이라는 의미의 낙성대는 장군이 출생하던 날 출생지에 별이 떨어졌다는 전설에 따라 지은 이름으로, 1972년 5월 25일 서울특별시유형문화재 제4호로 지정됐다. 


안국사 전경

강감찬 장군 영정

안국사는 낙성대공원의 연못 뒤쪽에 있고 길이 409m의 사괴석(四塊石) 담장으로 둘러싸여 있다. 입구에 기념 휘호석과 관리사무실이 있고 안국문(安國門)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는 외삼문을 통과하면 잔디와 수목으로 깔끔하게 조경한 넓은 정원이 펼쳐진다. 정원 좌.우측에는 고려강감찬장군사적비와 ‘강감찬낙성대(姜邯贊落星垈)’라는 명문이 새겨진 삼층석탑이 있고, 정원 안쪽의 낮은 계단을 올라 내삼문을 지나면 사당(안국사)이 나온다. 강감찬 장군의 영정을 모시고 있는 사당은 면적 237.6㎡의 정면 5칸.측면 2칸 팔작지붕 건물로, 고려시대 목조건축물인 경상북도 영주 부석사의 무량수전을 본떠 만들었다고 한다.


# 삼층석탑 


삼층석탑


이 탑은 고려시대의 명장 인헌공 강감찬(姜邯贊, 948-1031) 장군을 기리기 위해 그의 생가 터가 세워졌던 것으로, 원래 이곳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위치한 강감찬 생가 터(서울특별시 기념물 제3호 : 서울특별시 관악구 봉천동 218-9번지)에 있었다. 1974년 강감찬 장군을 위한 사당을 지어 '안국사'라 이름하고 주변을 정리하면서 이곳으로 이전됐다. 


낙성대(落星垈)라는 이름은 강감찬이 태어났을 때 큰 별이 떨어져 그 집으로 들어갔다는 일화에서 유래한 것이다. 강감찬은 거란의 40만 대군을 물리쳐 나라를 위기에서 구했는데, 훗날 사람들이 강감찬의 공을 기려 그의 생가 터에 삼층 석탑을 세웠다고 전한다. 화강암으로 만든 삼층석탑의 앞면에 '강감찬 낙성대'(姜邯贊 落星垈)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어서 강감찬 장군의 출생지를 기념키 위한 탑임을 알 수 있다. 


현재 상륜부(탑의 꼭대기에 세워놓은 장식부분)는 훼손되어 남아있지 않다. 강감찬장군의 생가터는 낙성대가 아니라 바로 이 석탑이 있었던 자리로, 1974년 그 터는 낙성대유지(落星垈遺址)라는 명칭으로 서울특별시기념물 제3호로 지정됐고, 그곳에 높이 2m의 유허비(遺墟碑)를 세웠다. 삼층석탑은 단층 기단 위에 세워졌다./사진=이승준 기자


고려 강감찬장군 사적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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