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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심히 살아왔지만‘잘’살아 왔는지 자신할 수 없는 당신에게...
  • 민병훈 기자
  • 등록 2020-11-22 17:3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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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립극단 희곡우체통 극작가전 ‘당신이 밤을 건너올 때’


[민병훈 기자] 국립극단(예술감독 김광보)은 오는 12월 3일부터 20일까지 백성희장민호극장에서 희곡우체통 극작가전 ‘당신이 밤을 건너올 때’(작 유혜율, 연출 이은준)를 선보인다.

 

‘당신이 밤을 건너올 때’는 빠르게 변화하는 세상 속에서 자신이 지켜온 가치에 대해 고민하는 한 인간의 이야기로, 국립극단 신작 개발 사업의 일환인 ‘희곡우체통’에 2019년 초청작으로 선정돼 ‘사랑의 변주곡’이라는 원제로 낭독회를 개최한 바 있다. 

  

유혜율 작가의 희곡 데뷔작이기도 한 이번 작품은 김수영 시인의 언어를 빌어 현시대를 살아가는 다양한 세대에 대해 깊은 통찰을 담았다. 심리학을 전공한 작가는 누구보다 치열하게 살아왔지만 어느 순간 자신이 여전히 이 사회에 유용한 존재인지 고민에 빠지는 주인공의 이야기를 내밀하게 그려 낸다. 


‘율구’ ‘괴벨스 극장’ 등 사회 전반에 대해 날카로운 시선으로 질문을 던져 온 이은준이 연출을 맡아 묵직한 울림을 주는 공연으로 무대 위에 구현했다.
 
‘우리는 지금 잘 살고 있는가?‘. 우리 주변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는 이의, 혹은 나의 이야기를 통해 작품은 간단하지만 결코 가볍지 않은 질문을 던진다.
 
이름 없이 사그라진 친구의 죽음, 생활의 뒤편에 묻어버린 아내의 꿈, 그리고 한 때는 거창했던 ‘나’의 신념. 선택한 것이 아니라 버릴 수 없는 것들을 위해 치열하게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작가는 김수영의 시들을 곳곳에 배치해서 담담하고 고요한 위로를 건넨다. 작품 전반을 흐르는 김수영의 시는 명상적인 음악과 배우들의 유려한 움직임을 만나 마치 춤을 추듯 입체적으로 되살아난다.


‘신이 밤을 건너올 때’는 50대가 된 2020년의 586세대를 주인공으로 하지만, 결국 이상과 현실 사이의 괴리에 괴로워하면서 하루하루 쫓기듯 살아내는 인간 보편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등장인물들이 ‘해야 하는 것’과 ‘하지 못한 것’을 떠올리면서 괴로워할 때마다 요절한 ‘윤기’와 함께 등장하는 김수영의 시들은 관객 저마다의 마음속에 잠들어 있는 ‘지키고 싶었던 가치’를 생각나게 한다. 



586세대는 민주화의 세대이기도 하지만, 신자유주의적 가치관을 받아들인 첫 세대이기도 했다. 학생 운동권 출신 중 재테크서나 자기계발서로 성공한 작가나, 그런 책을 기획해 성공한 출판업자들이 많은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강남의 사교육 시장을 석권하며 학생들에게 무한경쟁의 논리를 전파한 것도 586이었다.


정치 권력을 민주적으로 바꾸기만 하면 세상이 한결 나아질 줄 알았던 586세대는 신자유주의 발달로 자본 권력이 정치 권력보다 우위를 점한 세상을 맞닥뜨렸다. 그 시절 ‘현실’과 ‘신념’ 사이에서 어떤 선택을 했는가에 따라 이들의 삶은 180도 달라져 있다.


현실과 타협하지 않고 오랜 세월 자신의 신념을 실천하는 삶을 살아 온 시민단체 부대표 형진은, ‘먹고 사는 문제도 스스로 해결하지 못하면서 이상을 실현할 수 있겠나’ 반문하는 대학 친구 현이 낯설다. 늘 꿈꾸던 ‘더 좋은 세상’은 요원하고 하루하루 현실에 쫓기듯 살아가는 자신과 아내, 아들 세 식구가 고단하지만 옳다고 믿는 방향을 포기하지 않으며 현실의 무게를 견딘다.


어떤 가치를 우선으로 하는 삶이 정답이라고 쉽게 이야기 할 수 없는 2020년, 그렇기에 “아저씨 그 올바르고 올바른 말이 누구도 행복하게 해주지 못했다구요.” 비아냥거리는 20대 청년의 말은 그냥 지나치기엔 아프다.
   
청년에게도 나름의 이유는 있다. “꿈은 혼자 곱게 잘 간직하시고, 먹고 살기도 벅찬 사람들한테 강요하지 마세요.” 일갈하는 보수청년에게 대의는 사치다. 끝없는 경쟁 사회에서 자신의 몫을 지키는 일만도 벅찬 현실이라서, 팽이처럼 쫓기듯 달려야 했다. 외국인, 성소수자 등 자신과 관련 없는 사람의 인권을 주장하는 운동이 ‘당장 먹고 살기도 힘든데 타인의 권리까지 신경 써야 하나.’ 하는 생각에 야속하기만 하다. 자본 권력이 최상위를 차지한 사회의 한 단면이다.


변화에 빠르게 발맞추는 것과 고수하던 가치를 지키는 것, 대의를 실천하는 것과 현실적인 문제들을 해결하는 것. 상반된 두 가치 사이의 우선순위는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숨 가쁘게 돌아가는 세상 속에서 열심히 살아왔지만 ‘잘’ 살아왔는지 자신할 수 없는 우리들에게 '당신이 밤을 건너올 때'는 어두운 창가에 날아든 새처럼 때로는 열정적으로, 때로는 담담하게 위로의 시를 건넨다. 


유혜율 작가는 “사람들의 마음에는 하나의 얼굴이 있는 것 같다. 그 얼굴은 역사적 영웅이나 위대한 업적을 남긴 사람의 얼굴이 아니다. 오히려 살아 있는 동안 많은 것을 성취하지 못하고 자신의 신념을 지키며 죽어간 이름 없는 얼굴들에 가깝다. 이들의 사라지지 않는 마음이 계속 남아서 중요한 순간에 우리에게 구원을 주는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 20대에 스러져 간 ‘윤기’의 캐릭터는 이들의 얼굴에서 나왔다. 김수영 시를 차용한 것도 그러한 이유에서다.”라고 작의를 밝혔다.


한편 국립극단은 해마다 ‘희곡우체통’ 낭독회로 선보인 작품 중 1편을 선정해 차기년도 제작 공연으로 선보이고 있다. 2019년, 인혁당 사건을 소재로 한 ‘고독한 목욕’(작 안정민, 연출 서지혜)을 무대에 올렸고, 내년에는 탈진한 X세대의 이야기를 그린 ‘X의 비극’(작 이유진, 연출 미정)을 정식 공연화 할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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