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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서원 182] 천만리의 영정 봉안한 '황강서원(皇岡書院)'
  • 이승준 기자
  • 등록 2023-03-24 08:4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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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준 기자] 황강서원은 1835년(헌종 1)에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 장수이며 조선에 귀화한 천만리의 영정을 봉안키 위해 설립된 서원이다. 


1833년(순조 33)에 천만리의 10세손 천석규(千錫奎)의 집에서 비장의 문서와 천만리의 영정이 발견됐는데, 이 영정을 봉안키 위해 사당을 건립하고 1835년(헌종 1) 청도군 동일면 삼성동 대황산(大皇山)줄기에 서원을 건립했다. 마침 산의 명칭에도 ‘황’자가 들어가고 천만리도 명나라 출신 장수이기 때문에 서원의 명칭을 황강이라고 했다. 1846년에는 사암실기가 이 서원에서 간행되기도 했다.


1868년(고종 5년)에 대원군의 서원 훼철령에 의해 훼철되고 1924년 현 위치로 옮겨 선생의 영정만을 봉안하고 영당만을 복원했다. 이후 마침 1952년이 임진년이었기에 후손과 유림이 의논해 경모계를 결성하고 서원을 복원했다. 경모당(景慕堂)은 10여 년 전에 중수했고 서원 뜰에는 선생의 12세손인 천병하(千炳夏)가 찬한 묘재비(墓齋碑)가 세워져 있어 더욱 옛 모습을 말해 주고 있다.



천만리(千萬里, 1543~?)는 조선 중기의 무신. 본관은 중국 영양(穎陽). 자는 원지(遠之). 호는 사암(思庵). 명나라에서 귀화했다. 서촉(西蜀) 종북산(終北山) 천고봉(千古峰) 만붕암(萬棚巖) 밑에 살았다 하여 성을 천씨로 했다 한다.


아버지는 종악(鐘嶽)이고, 어머니는 병부시랑 전탁(錢鐸)의 딸이다. 9세에 외삼촌 전륜(全倫)에게 의탁되어 공부했다.


1571년 무과에 급제해 1575년에 총절사(總節使)가 되어 몽고군을 격퇴했다. 그 공으로 내직인 내위진무사(內衛鎭撫使)가 됐으나 남의 참소를 입어 양릉(陽陵)에 귀양살이했다.


귀양에서 풀려나 태청전수위사(太淸殿守衛使)로 있을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조선이 명나라에 원병을 요청했는데, 이 때 조병영량사(調兵領糧使)로서 아들 상(祥)과 함께 이여송(李如松)을 따라 조선에 왔다. 평양전투를 비롯해 곽산.동래 등지에서 전공을 세웠고, 정유재란 때 마귀(麻貴)와 함께 울산에서 전공을 세웠다. 왜란이 끝나자 1600년(선조 33) 8월 만세덕(萬世德).이승훈(李承勛)은 귀국했으나 그는 따라가지 않고 조선에 머물러 살았다. 선조는 그의 전공을 생각해 그를 화산군(花山君)에 봉하고 전(田) 30결(結)을 급복(給復)했고 그의 아들 상도 뒤에 한성윤에 승진시켰다.



저서로 시 44수와 문 2편이 ≪사암천문집≫에 전한다. 고성의 호암사(虎巖祠), 청도의 황강사(皇岡祠)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충장(忠莊)이다.

 

현존하는 경내의 건물로는 삼문과 강당․사당인 충장사․부속채 등이 있다. 사당인 충장사(忠莊祠)는 강당의 뒤편에 위치하고 있으며 정면 3칸, 측면 1칸 규모의 팔작지붕의 겹처마 구조이다. 익공집으로 정면의 문에는 흔치 않은 상인방이 휘어져 있는데, 중국 명나라 출신의 장수가 모셔져 있기 때문으로 짐작된다. 강당은 정면 4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홑처마 건물로 중앙의 마루와 양쪽 협실로 돼 있다. 황강서원(皇岡書院)의 편액이 걸려있다.


‘화산군 천만리선생 영정(花山君 千萬里先生 影幀)’이 소장돼 있었다. 지금은 한국국학진흥원에 기탁 보관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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