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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금의 여행이야기 5] 홍성, 용과 봉황이 품은 용봉산의 용봉사
  • 윤여금 기자
  • 등록 2023-02-07 23:55:23
  • 수정 2023-03-02 11:3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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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금 기자] 용봉사는 충남 홍성군 홍북면 용봉산에 있는 삼국시대 백제후기에 창건된 사찰이고, 용의 몸집에 봉황의 머리를 얹은 형상의 용봉산(381m)이 용봉사를 품고 있으며, 대한불교조계종의 본사인 수덕사의 말사이다. 


현존하는 유물로 신경리 마애여래입상(보물), 영산회 괘불탱(보물), 용봉사 마애불 (충남 유형문화재), 상하리 마애보살 입상 (충남 유형문화재), 용봉사지석조 (충남 문화재자료), 부도(충남 문화재자료) 등이 있는 사찰이다.


용봉산은 산 전체를 기암괴석이 뒤덥고 있는 모습으로 금강산과 비슷하다고 하여 소금강이라고도 한다.


예로부터 땅에 사는 짐승과 새의 무리는 봉황이 지배하였고, 산 아래로는 물고기를 비롯, 물속의 모든 것들은 용의 지배를 받아 평화롭게 보냈다고 한다. 그 후로 하늘의 부름을 받아 승천하면서 산의 형상이 용의 몸집에 봉황의 머리를 닮았다하여 용봉산(龍鳳山)이라는 전설이 흐르고 있다.


                                            ▲ 신경리 마애여래입상(洪城 新耕里 磨崖如來立像) 보물 제355호. 고려초기. 높이 4m


신경리 마애여래입상은 돌출된 자연암석의 바위 앞면을 파서 불상이 들어앉을 감실형(龕室形)의 공간을 만들고 그 안에 돋을새김한 불상을 조각했다. 민머리 위에는 상투 모양의 머리 묶음을 했다. 얼굴은 몸에 비해 크고 잔잔한 미소가 있어 온화한 인상을 풍기고 있다. 눈섶은 반월형이며, 눈은 가늘게 했고, 눈꼬리는 약간 쳐져있어 인자한 느낌이다. 코는 얼굴에 비해 작고, 오똑하고 인중은 깊에 파여있다. 입은 살짝 미소를 하고 있다. 턱은 통통하고 이중으로 묘사됐다. 귀는 어깨까지 내려오고, 짧은 목에는 삼도가 있다. 신체는 균형이 잡혔다. 옷주름은 U자형으로 양어깨를 감싸고 있고, 통견의(通肩衣)는 목 밑에서는 4조의 굵은 선각으로 되어있고 아래로 내려가면서 가느다란 음각선으로 도식화돼 있다.


수인(手印)은 시무외여원인(施無畏與願印)을 하고 있고, 일반적인 수인과 달리 오른 손은 내려 다리에 붙이고 왼손은 들어 가슴 위에 올리고 있다. 몸체 뒤의 광배(光背)는 거신광(擧身光)으로 파낸 바위면을 이용해 3조의 음각선으로 두광(頭光)과 신광(身光)을 나타냈다. 머리 위는 후대의 것으로 보이는 사각형의 개석을 올려놓고 있고, 팔작지붕 형태로 앞면의 밑 부분에는 연화문이 음각돼 있다. 전체적으로 얼굴의 인상이 풍만하고 입체감이 있고, 신체의 비례도 좋다. 아래로 내려갈수록 양감이 약해져 있는데, 이것은 불상의 아래에서 바라보는 예배자들의 시선을 배려한 것이다. 조각양식으로 볼 때 고려초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불상 아래에서 기와조각들이 출토되어 이곳에 건물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 괘불탱 (靈山會 掛佛幀) 보물 제1262호. 가로 5.5m, 세로 5.93m 1997년 보물로 지정.  축소복사인쇄


괘불이란 사찰에서 큰 법회나 의식을 행하기 위해 범당 앞 뜰에 걸어놓고 예배를 드리는 대형 불교 그림이다. 용봉사 영산회 괘불탱은 석가모니가 영축산에서 설법하는 장면을 그린 것이다. 석가모니를 화면 중앙에 배치하고 8대보살, 10대제자 등이 주위에 있다. 석가모니는 오른 손을 무릎에, 왼손은 배의 중심에 댄 모습의 항마촉지인의 자세로 수미단의 연꽃위에 결가부좌(結跏趺坐) 자세로 앉아있다. 양 옆으로 서 있는 8명의 보살 중 문수.보현보살은 연꽃위에 각기 연꽃가지를 들고 서 있고, 관음보살은 화불(化佛)이 든 보관(寶冠)을 쓰고 있고 나머지 보살들은 각기 정병(淨甁).경책(警策)·연꽃가지나 여의(如意)를 들고 있다. 


불법을 지키는 수호신격인 사천왕과 제석천, 범천이 보살들과 주위에 있다. 사천왕은 석가모니의 오른편에 서·남천왕이 왼편에 북·동천왕이 배치됐다. 제석천은 화관(化冠)을 쓰고 두 손을 모아 합장한 전형적인 보살의 형태이고, 범천은 원유관(遠遊冠)을 쓰고 조복(朝服)을 입은 제왕(帝王)의 모습이다. 주로 붉은색과 녹색을 많이 사용하였고 연녹색과 자주색 등의 중간색을 넣어 화면을 차분하고 온화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이 그림은 1690년 (숙종16)에 승려화가 화숙·한일·처린·수탁 등 7명이 그렸다. 1725년 (영조1)에 그림을 고쳐 그리면서 적어 놓은 글이 그림의 아랫부분에 있다. 1987년 다시 보수했다. 이 괘불도는 본존인 석가불의 크기가 작아진 점과 전체적으로 상·하 이단구도이나 군중들이 3열의 형식이 보여 엄격한 상·하 이단구도에서 탈피하였다. 17~18세기 불화의 특징의 작품으로 회화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홍성 용봉사 관계자는 “영산회 괘불탱 (靈山會 掛佛幀) 보물은 지장전의 보관함에 보관되어 있고, 개방하지 않으며 지장전 안에 지금 있는 영산회 괘불탱은 이런 형태로 돼있다 라는 축소복사인쇄본이다. 영산회 괘불탱 (靈山會 掛佛幀)보물 제1262호는 어딘가에는 보관을 해야하기 때문에 지장전이란 명칭을 사용하며 보호하고 있다.”고 전했다.




     ▲ 용봉사 마애불(龍鳳寺磨崖佛)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118호. 1985년 충청남도 유형문화재로 지정


용봉사 마애불(龍鳳寺磨崖佛)은 용봉산의 병풍처럼 펼쳐진 자락의 바위에 돋을새김으로 새겨진 서 있는 모습으로 오른쪽 어깨에 정원(貞元) 15년이란 글이 있어, 799년 (신라 소성왕 원년)에 제작됨을 알 수 있다. 마애불 중 제작 시기와 관련된 인물 정보가 남아 있는 드문사례로 통일신라 말기 불상 연구에  단서가 된다. 머리와 얼굴 부분이 뚜렷하게 돌출됐으며, 몸과 옷주름은 얕게 조각되었다. 머리는 부처 지혜를 상징하는 육계가 있고, 귀는 어깨에 닿을만큼 길다. 큰 얼굴과 가는 눈, 움푹들어간 볼에 잔잔한 미소를 하고 있다.



     ▲ 홍성 상하리 마애보살 입상(洪城 上下里 磨崖菩薩立像).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250호


상하리 마애보살 입상은 상하리사지 또는 빈절골사지로 알려진 옛 절터 입구에 세워진 높이 4m, 넓이 1.3m의 마애보살상이다. 머리에 보관을 쓰고 있고, 옷이 어깨를 덮고 있으며, 오른손은 무릎옆에 두고 왼손은 엄지와 검지를 맞대고 있다. 낮은 돋을새김으로 가늘게 뜬 눈과 넓적한 얼굴, 하체로 갈수록 간략한 선으로 표현한 방식 등이 학술적 및 문화재적 가치가 높다. 얼굴의 이목구비와 보관 양식의 특징, 장식성이 배제된 원형, 광배(머리나 등의 뒤에 광명을 표현한 원광)등 을 볼 때 9~10세기 제작된 불상으로 추정된다. 


     ▲ 용봉사지석조(龍鳳寺地石造)[석조(石),석구,마애],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62호 석조 장축 2.9m 단축, 1.36m, 높이 1.36m,         석구-직경 0.68m, 높이 0.75m,  마애-높이 0.75m                                                                           


이 사찰의 서쪽 능선에 고려시대 용봉사 터가 위치하고 있었는데, 그곳에 있던 석조를 현재의 위치로 옮겨놓았다. 석조는 스님들이 물을 담아 쓰던 용기로 직사각형 모양인데, 한쪽 모서리에는 배수구가 있어 넘치는 물이 흘러내리게 했다. 석구는 돌의 속을 파내어 그 구멍에 곡식을 넣고 찧던 돌절구로 네모난 모양으로 가동된 몸체에 팽이 모양의 둥근 홈이 파여있다. 마애는 일명 마대 또는 마학이라고도 하는데, 곡식을 가는데 쓰는 맷돌로 네모난 모양으로 돼있다. 제작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사찰의 창건과 함께 제작된 것으로 추측된다. 


               ▲ 부도(浮屠)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68호. 높이 1m 


이 부도(浮屠)는 서쪽 능선의 옛 용봉사 터에 있던 것인데, 1906년경 평양조씨(平壤 趙氏) 가문에서 문중의 선조묘(先祖墓)를 조성하면서 옮겼다. 3매의 화강암으로 대석 탑신 옥개석으로 조성 됐다. 기단부인 대석은 6각형의 받침돌 형태이고, 각 면에는 2엽의 복연을 조각했다. 탑신은 구형으로 대석의 윗면 중앙에 놓였다. 옥개석은 6모 지붕으로 내림마루를 두고, 추녀 끝은 반전시켰으나 마멸이 심하여 원래의 모습을 잃고 있고, 제작 시기도 알 수 없다.


용봉사 관계자는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석조, 맷돌, 돌 등을 역대 주지스님이 조금씩 찾아서 한 자리에 모아 놓았고, 탑, 부도도 지금의 자리에 옮겨 놓은 것"이라면서, "또한 소실 된 것도 많이 있을 것”이라고 전했다. 


     ▲용봉사 옛 터/평양조씨 문중의 선조묘 


용봉산 자락의 서쪽 능선의 옛 용봉사 터에, 1906년경 평양조씨(平壤 趙氏) 개인 가문에서 문중의 선조묘(先祖墓)를 조성했다고 전한다.



     ▲대웅전


용봉사 관계자는 “현 사찰 서편에 있던 옛 절이 명당임을 안 평양조씨(平壤趙氏) 가문이 절의 그 자리에 묘를 썼으며, 18세기 후반 무렵 폐사됐으나 1980년 무렵 중창됐고, 현 대웅전은 작은 움막으로 시작해, 1982년 대웅전을 새로 지었다”면서, “1988년에 축대를 완성하고, 산신각은 몇 년 전에 화재로 소실 되었던 것을 다시 지은지  2년정도 돼 오늘에 이른다.”고 말했다.


     ▲용봉사


     ▲산신각

 

향토문화연구회 관계자는 “ 현 묘자리는 원래 절인데, 묘를 쓰기 위해서 조선조 억불정책 그 때에 절을 없애고 평양조씨 개인 가문으로 쓰인 것”면서, “불교인들과 지방사람들이 지금의 용봉사 터에 옮겨 지은 것이고, 부도도 찾아 옮겨 놓고, 현 사찰 입구의 용봉사 마애불(龍鳳寺磨崖佛)은 이끼와 나무숲 속에 뭍혀있던 것을 찾아놓아 충청남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는 등 여러 점의 문화재들이 남아 있다.”고 전했다.   


또다른 향토문화재연구회 관계자(85세)의 사견에 의하면 “내용을 알아보니까 구전으로 전달되는게 평양조씨 묘가 지금 하나 있는데 오래 된 것이므로, 그때 절을 관리하던 여자 한 분이 있었는데, 그분이 이것을 복원 시킨다고 말했으나 지금에 와서 개장해서 복원될 것 같지않은 것으로 보인다”면서, “문화재 가치로서는 제자리 절터에 있어야 보호차원이지 이전 됐다고 하면 지금 현재는 방치라고 하면 될 것”이라면서 말했다.


이어 “대웅전에 석가모니불은 현재 유지되고 있는 것으로 판단하는 것이 나을 것"이라면서, "이것은 나의 생각”이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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