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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유공자를 찾아서 54] 친일 부호배 처단...군자금 모집 등 의열투쟁 전개 ‘박상진’
  • 이승준 기자
  • 등록 2023-01-29 10:0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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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준 기자] 박상진 朴尙鎭, 1884.12.07 ~1921.08.11. 경상남도 울산, 독립장 1963


오인(吾人)은 대한독립광복(大韓獨立光復)을 위하여 오인의 생명을 희생에 공(供)함은 물론, 오인이 일생의 목적을 달성치 못할 시는 자자(子子) 손손(孫孫)이 계승하여 수적(讐敵) 일본을 완전 구축하고 국권을 회복할 때까지 절대 불변하고 결심 육력(戮力)할 것을 천지신명에게 서고(誓告)함. - 1915년 선생이 주도한 대한광복회의 결의문에서 -


# 의병장 허위의 문하에서 민족의식과 한학을 배워


박상진(朴尙鎭, 1884.12. 7 ~ 1921. 8. 11) 선생은 1884년 12월 7일 경남 울산(蔚山) 송정동(松亭洞)에서 시규(時奎)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선생의 자(字)는 기백(璣伯), 호는 고헌(固軒)이다. 선생의 부친은 한말 승지(承旨)를 지냈고, 선생이 출계(出系)해 모신 백부(伯父) 시룡(時龍)은 홍문관 교리(校理)를 지냈다.


학식과 덕망이 높았던 전통적인 유가(儒家) 가문에서 출생한 선생은 일찍부터 한학을 배웠다. 특히 선생은 1895년 일제의 명성황후(明成皇后) 시해와 단발령 강제 시행 등에 대항해 의병을 일으켰던 허위(許蔿)의 문하에 들어가 1902년부터 수학하면서 척사(斥邪)적 반(反)외세 민족의식을 키웠다.


# 식민지 관리는 되지 않겠다며 판사직 사임


하지만 선생은 봉건지배질서를 고수하려는 위정척사(衛正斥邪) 사상에 빠져있지는 않았다. 그것은 평리원(平理院) 판사 및 원장으로 재직하면서 서서히 봉건의식을 탈각해 가던 허위의 영향이기도 했다. 생활 태도는 유림적 자세를 견지했지만, 사고 방식은 전향적이었고 근대적 신학문을 거부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선생은 1907년 양정의숙(養正義塾) 전문부 법과에 입학했고, 여기에서 1910년 졸업할 때까지 법률학과 경제학을 공부하면서 신학문을 익혔다.


당시 선생의 스승인 허위는 1907년 고종의 강제 퇴위와 정미7조약(丁未七條約) 그리고 그에 따른 군대 해산 등으로 우리나라가 일제의 준(準)식민지 상황이 되어 가자 다시 의병의 기치를 높이 올리고 1907년 11월 전국 의병부대의 연합체로 결성된 13도 창의군을 지휘하면서 서울 진공전을 수행하는 등 혁혁한 전과를 올렸지만, 1908년 6월 일제에 피체돼 같은 해 10월 순국했다. 이에 스승을 잃은 큰 슬픔을 당한 선생은 허위의 시신을 수습해 고향인 경북 선산군으로 모셔 장사 지낸 후, 묘막을 짓고 1년 간 문도로서 복상(服喪)했다.


울산의 박상진 선생 생가

이후 선생은 판사 시험에 합격헤 1910년 평양법원에 발령받았으나, 경술국치로 우리나라가 일제의 완전 식민지가 되자 이를 헌신짝처럼 던져 버렸다. 이 같은 행동은 대한제국의 국민으로서 일제의 식민지 관리는 되지 않겠다고 하는 선생의 강렬한 민족의식이 표현된 것이었다.


1911년 망국의 설움을 안고 고국을 떠난 선생은 중국 만주를 여행하면서 허위의 형인 허겸과 손일민(孫一民).김대락(金大洛).이상용(李相龍).김동삼(金東三) 등 독립운동자들을 만나 투쟁 방략을 논의하고 모색했다. 이 때 중국은 민주혁명으로서 신해혁명(辛亥革命)이 진행되고 있었으므로 선생은 이를 직접 목격하면서 우리나라에서도 혁명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때문에 선생은 이후 중국혁명을 배워야 한다고 하면서 우리나라에서도 혁명을 할 수 있다고 역설했다. 따라서 신해혁명기 선생의 중국 여행은 양정의숙에서 근대적 신학문을 배운 경험과 서로 상승 작용하면서 잔존하고 있던 군주제를 옹호하는 복벽주의(復辟主義)적 사고를 완전히 떨쳐버린 기회가 됐다. 그리고 그 같은 개인적 경험이야말로 선생이 혁명 단체로서 대한광복회(大韓光復會)를 조직할 수 있었던 주체적 조건이 됐다.


# 대구에 상덕태상회 설립, 독립운동 거점 마련


1912년 귀국한 선생은 독립운동의 재정 지원과 정보 연락을 위해 대구에 상덕태상회(尙德泰商會)라고 하는 곡물상회를 개설했다. 당시 상덕태상회는 국내의 연락뿐 아니라 이관구(李觀求)가 설립한 만주 안동(安東)의 삼달양행(三達洋行)이나 장춘(長春)의 상원양행(尙元洋行) 등 곡물상과 연락망을 구축하면서 독립운동의 거점이 됐다. 그러던 중 1915년 1월 15일 대구 안일암(安逸庵)에서 계몽운동 및 독립운동 단체로 결성된 조선국권회복단(朝鮮國權恢復團)에 참여해 활동했다. 이 단체는 국권회복을 목적으로 윤상태(尹相泰).서상일(徐相日).정운일(鄭雲馹) 등 영남 지방 계몽운동 계열 인사들과 의열 계열 인사들이 함께 조직한 비밀결사였다. 이 단체는 계몽 활동을 통한 민족의식 고취, 국외 독립운동단체와의 정보 연락, 그리고 군자금 조달 등의 독립군 지원 활동을 벌여갔다.


한편으로 선생과 정운일.김재열(金在烈) 등 이 단체의 의병 계열 인사들은 일제를 이 땅에서 몰아내자면 지역단위의 독립운동만으로는 어렵다고 생각하고 보다 강력한 혁명적 독립운동 단체의 조직을 구상해 갔다. 당시 일제에 의한 토지조사사업은 그간 토지에 관계된 농민적 제(諸)권리를 부정하면서, 지주 위주로 시행됨에 따라 지주의 토지 지배권을 강화해 줬다. 때문에 지주층은 식민통치 체제가 자신들의 경제력을 유지하고 확대하는데 나쁘지만은 않다고 하는 인식을 갖게 됐다. 이에 따라 구래(舊來)의 봉건 지주층은 일제 식민통치 체제에 안주(安住)하면서, 그 사회 경제적 지주(支柱)로서 기능하는 식민지 지주로 재편되고 있었다. 이 같은 현상은 독립운동 단체의 군자금 수합 활동에도 영향을 끼쳐 순리로서 군자금을 모금할 수 없는 현상을 초래했다.


박상진 등에 대한 판결문# 혁명적 독립운동 단체 대한광복회 조직


이에 선생은 반민족적 지주들을 응징해 민족적 각성을 촉구하는 한편 무력적 방법으로 군자금을 수합하고, 그것으로 독립군 기지를 개척한 후 여기에서 독립군을 양성해 민족혁명(민족독립)을 달성한다는 계획 아래 혁명적 독립운동 단체의 결성을 추진했다. 그리하여 선생을 비롯한 조선국권회복단의 의병 계열 인사들은 1915년 7월 15일 풍기광복단(豊基光復團)과 제휴해 대구에서 대한광복회(大韓光復會)를 조직했다. 이 때 제휴한 풍기광복단은 채기중(蔡基中).유창순(庾昌淳).한훈(韓焄) 등이 주도해 1913년 조직한 독립운동 단체로, 그 구성원은 의병 출신 인사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이 단체 또한 만주 독립군과 연락하면서 독립군 양성을 위한 군자금 모집 활동을 하고 있었다. 이 같은 조직원들의 성향과 투쟁 방략은 선생을 비롯한 조선국권회복단의 의병 계열 인사들과 일맥상통하였기 때문에 대한광복회의 탄생이 가능했던 것이다.


대한광복회 결성 당시 조직원들은 다음 같은 결의문을 채택했다.


오인은 대한독립광복을 위하여 오인의 생명을 희생에 공(供)함은 물론, 오인이 일생의 목적을 달성치 못할 시는 자자손손이 계승해 수적(讐敵) 일본을 완전 구축하고 국권을 회복할 때까지 절대 불변하고 결심 육력(戮力)할 것을 천지신명에게 서고(誓告)함.


실천강령은 다음과 같았다.


1. 부호의 의연금 및 일인이 불법 징수하는 세금을 압수하여 무장을 준비한다

2. 남북 만주에 군관학교를 세워 독립전사를 양성한다

3. 종래의 의병 및 해산 군인과 만주 이주민을 소집하여 훈련한다

4. 중국·아라사(俄羅斯) 등 여러 나라에 의뢰하여 무기를 구입한다

5. 본회의 군사행동·집회·왕래 등 모든 연락 기관의 본부를 상덕태상회에 두고, 한만(韓滿) 각 요지와 북경·상해 등에 그 지점 또는 여관·광무소(鑛務所) 등을 두어 연락 기관으로 한다.

6. 일인 고관 및 한인 반역자를 수시(隨時)·수처(隨處)에서 처단하는 행형부(行刑部)를 둔다.

7. 무력이 완비되는 대로 일인 섬멸전을 단행하여 최후 목적의 달성을 기한다.


울산에 위치한 박상진 선생 동상과 추모비이를 보면, 대한광복회는 우선 군자금을 조달해 남북 만주에 군관학교를 설립하고, 여기에서 독립군을 양성하는 한편 국내외 요지에 독립운동 거점을 확보해 정보.연락망을 구성한 뒤, 적시에 무력으로 최후의 복적(민족독립)을 쟁취하려고 했던 혁명적 독립운동 단체임을 알 수 있다. 또한 대한광복회는 일제타도의 계획을 추진하는 행동강령으로 비밀.폭동.암살.명령의 4개 항목을 시달했다.


선생은 창립 당시 대한광복회의 총사령에 추대됐고, 부사령에는 황해도 평산 의병장으로 용맹을 떨친 이석대(본명 이진룡)가 선임됐다. 그러다가 그가 순국한 이후에는 김좌진(金佐鎭)이 맡아 만주에 상주하면서 독립군 양성을 담당했다. 대한광복회는 창립 이후 조직을 전국적으로 확대해 1916년에는 예산(禮山)을 중심으로 하는 충남 일대, 해주(海州)를 중심으로 하는 황해도 일대, 보성(寶城)을 비롯한 전남 일대, 그리고 서울·삼척.인천 등지에 조직망을 구축했다. 국외에도 조직망을 설치해 주진수(朱鎭洙).손일민.우재룡 등은 북만주 길림지방에서 광복회를 조직했고, 남만주 서간도 지방의 부민단(扶民團) 또는 신흥학교 등과도 연계를 맺고 활동했다.


특히 대한광복회는 선생이 설립한 대구의 상덕태상회를 본거지로 해 영주.인천.삼척.광주.연기.용천 등 국내, 만주 안동의 삼달양행과 장춘의 상원양행 등 국외에 곡물상점을 설립 경영하면서 군자금을 마련하고, 그 상업 조직망을 정보.연락망으로 활용키로 했다. 이러한 상점을 거점으로 했던 것은 일제의 눈을 피해 군자금 운반 등 연락이 편리했고, 그 영업을 통해 군자금을 확보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 친일 부호배를 처단하고, 군자금 모집 등 의열투쟁 전개


대한광복회는 이 같은 활동자금과 군자금을 부호들의 의연금과 일제의 세금을 탈취해 마련할 작정이었다. 그리하여 일제의 우편마차를 습격해 세금을 탈취케 한 적도 있었고, 또 일본인이 경영하는 금광을 습격하려고 계획한 일도 있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때문에 대한광복회는 군자금을 주로 자산가들의 의연금으로 충당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것조차 부호들의 비협조로 성과는 매우 미흡했다. 심지어 일본 친일 부호배들은 군자금 헌납 권유를 거절할 뿐만 아니라 그 내막을 일경에 밀고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박상진 사형집행> 기사(동아일보 1921년 8월 13일자)이 같은 상황이 전개되자 선생은 군자금 강제 모집 방법을 강구하는 한편 이를 위해 만주에서 무기를 구입해 반입키로 했다. 그리하여 선생은 1916년 만주로 가서 권총을 구입했고, 이를 갖고 들어오다가 서울에서 일경에 발각돼 총포화약령(銃砲火藥令) 위반으로 피체됐다. 이로 인해 선생은 1917년 4월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6월 형을 선고 받아 옥고를 치렀다.


선생은 출옥 후 군자금 강제 모집을 계속하면서 이를 거부하는 반민족적 친일 부호배들을 처단하는 의열투쟁을 전개해 갔다. 먼저 선생은 부호들에게 대한광복회 명의의 포고문과 배당금 통보서를 발송하고, 이를 일경에 밀고하거나 납부를 거부하는 친일 부호배들은 처단하도록 명령했다. 그리하여 선생은 악덕지주로서 지탄을 받고 있던 경북 칠곡의 부호를 1917년 11월 10일 채기중.유창순.강순필(姜順必).임봉주(林鳳柱) 등으로 하여금 처단케 했다. 그리고 악질면장으로 지목받고 있던 충남 아산군 도고 면장을 1918년 1월 24일 김한종(金漢鍾).장두환(張斗煥) 등이 주관해 처단케 하였다.


# 일경에 체포되어 대구형무소에서 사형 순국


이러한 일로 인해 대한광복회의 조직이 탄로됨으로써 선생은 1918년 봄 일경에 체포됐다. 이후 선생은 대구지방법원에서 사형을 선고 받고, 4년 동안 옥고를 치르다가 1921년 8월 11일 대구형무소에서 순국했다. 이와 같은 선생은 척사적 민족의식을 바탕으로 신학문을 수용해 근대적이며 혁명적인 민족의식을 확립면서 민족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선생이 이끈 대한광복회는 1910년대 헌병경찰제에 의한 일제의 폭압적인 무단정치가 자행되는 암울했던 시기에 의열투쟁을 전개해 우리 민족에게 독립에의 희망을 잃지 않게 했다.


또한 일제의 조선 토지조사 사업으로 인해 대다수 민중들은 헐벗고 굶주려 감에도 자신들의 안일만을 위해 민족성을 포기해 가는 친일 부호배들에게 철퇴를 가함으로써 민족정기가 살아 있음을 표출했다. 또한 대한광복회의 의열투쟁은 암살단.주비단.의열단으로 이어져 독립운동을 크게 발전시켰다는 역사적 의미를 찾아볼 수 있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사진출처-국가보훈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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