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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유공자를 찾아서 51] 김구 주석과 함께 반탁운동, 건국 후 대통령 출마후 급서한 '신익희'
  • 이승준 기자
  • 등록 2023-01-26 09:2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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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준 기자] 신익희 申翼熙, 1894.06.09 ~1956.05.05. 경기도 광주, 대한민국장 1962


나라는 반드시 완전 독립되어야 하고(國家須完全獨立) 민족은 반드시 철저 해방되어야 하며(民族須澈底解放) 사회는 반드시 자유 평등하여야 한다(社會必須平等) - 조국광복을 앞둔 1945년 신익희 선생이 중국에서 쓰신 글 중에서 -


# 벗들과 손가락 잘라 피를 나눠 마시며 독립운동에 목숨 바칠 것 맹세

신익희(申翼熙, 1894. 6. 9 ~ 1956. 5. 5) 선생은 1894년 6월 9일 경기도 광주군 초월면(草月面) 서하리(西霞里)에서 평산 신씨(平山申氏) 장례원경(掌禮院卿) 단(檀)의 다섯째 아들로 태어났다. 선생의 호는 해공(海公), 중국 망명 중에 사용한 이명(異名)은 왕해공(王海公) 혹은 왕방오(王邦午)이다. 어려서부터 총명해 5세 때 백형(伯兄) 규희(揆熙)에게 한학을 수학했다. 특히 글씨를 잘 써 9세 때에는 학부대신을 지낸 이도재(李道宰)로부터 지필묵(紙筆墨)을 상품으로 받기도 하는 등 명필가의 자질을 보였다.


1908년 상경해 관립 한성외국어학교 영어과에 입학했다. 당시 우리나라는 1905년 11월 을사늑약(乙巳勒約)에 의해 국권이 침탈되더니, 이어 1907년 7월 정미7조약(丁未七條約)으로 군대까지 해산 당하는 등 일제의 식민지나 다름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선생은 일제로부터 국권을 되찾고 민족적 수모를 설욕하는 방법은 서구의 진보한 문명을 수용해 나라를 부강하게 하는 것임을 깨닫고 영어과를 선택했다.


그리하여 호조참판을 지낸 이위(李暐)의 집에서 가정교사로 학비를 조달해 가면서 1910년 한성외국어학교를 졸업했다. 하지만 조국의 운명은 나날이 쇠락해 가더니 결국 선생이 한성외국어학교를 졸업한 해에 일제의 완전 식민지가 되고 말았다.


총취정 신익희 선생 친필 현판이같은 망국의 상황에 당면해 선생은 역설적으로 일본 유학을 꿈꾸게 된다. ‘우리는 현실을 직시.정시하여야 한다. 우리가 구적(仇敵)을 몰아내고 나라를 도로 찾는 데는 부질없이 감상에만 흐르지 말고, 현대로 개화 진보한 일본에 가서 배워 그 놈을 이기고 일어서야 한다’고 하는 극일(克日)의 심정으로 선생은 일본 유학을 단행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1912년 일본 와세다[早稻田]대학 정치 경제학부에 입학한 선생은 독립운동에 전위가 될 유학생들을 결속시키는데 주력하게 된다. 정세윤(鄭世胤).송진우(宋鎭禹).문일평(文一平).안재홍(安在鴻) 등과 협의해 유학생의 통일조직으로 ‘학우회(學友會)’를 조직하고 총무.평의회 의장.회장 등을 역임했다. 그리고 그 기관지로 발행된 <학지광(學之光)>의 주필.총무 등을 맡아 유학생들은 물론 국내 청년 학생들의 민족정신과 독립사상을 고취했다. 특히 1913년에는 동지들과 단지(斷指)해 피를 나눠 마시면서 독립운동에 목숨을 바칠 것을 맹세했다고 하니 이 당시 선생의 민족독립에 대한 열망이 얼마나 강렬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 서울에서 만세시위를 벌이다 일경에 쫓겨 중국으로 망명


이 같은 결심을 가졌던 선생은 1917년 와세다대학을 졸업한 후 다시 미국으로 유학을 가려고 했으나 경비문제로 포기하고 귀국해 최규동(崔奎東) 교장의 권유로 중동(中東)학교에서 잠시 교편을 잡았다가 이후 보성법률상업전문학교로 옮겨 비교헌법.국제공법·재정학 등을 강의했다.


임정요인 환국기념 서명 포고문(1945)그러던 중 1918년 윌슨 미국 대통령이 제1차 세계대전의 강화원칙으로 민족자결주의를 천명하자, 이를 기회로 우리 민족도 독립운동을 일으켜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선생은 임규(林圭).송진우(宋鎭禹).최남선(崔南善).정노식(鄭魯湜) 등과 국내 독립운동을 밀의하고, 11월 말 국외 독립운동단체 및 지도자들과 연락할 사명을 띠고 해외로 나가게 됐다. 선생은 우리의 독립운동은 처음에는 평화로운 방식으로 시작될지라도 결국에는 군사행동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우선 만주지방으로 가서 독립군 지도자 김좌진(金佐鎭) 장군 등을 만나 보았다.


그리고 1919년 1월 상해에 도착해 이주 동포들의 실정과 독립운동단체의 현황을 돌아보면서 국내의 독립운동 소식을 기다렸다. 그러나 아무런 소식이 없으므로 궁금한 나머지 2월 중순 상해를 떠나 천진(天津).북경(北京).심양(瀋陽)을 거쳐 3.1운동 발발 직후인 3월 2일 귀국하게 됐다. 국내에 들어와 평양을 지나면서 3.1운동을 목격한 선생은 곧 서울에서의 대규모 만세시위를 계획했다. 그리하여 제자인 보성법률상업전문학교의 학생 강기덕(康基德)과 연희전문학교의 학생 한창환(韓昌桓) 등과 연락해 3월 5일 남대문 역.서울 역 앞 만세시위를 추진 지휘케 했다.


이에 따라 청년 학생들이 중심이 된 제2차 독립 만세시위가 남대문 역 앞에서 대규모로 전개됐는데, 이 시위는 3월 3일 고종의 인산(因山)에 참배하고 귀향하는 사람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심어줘 3.1운동의 지방 확산에 크게 기여했다. 이로써 일경의 주목을 받게 된 선생은 3월 14일 농사꾼 차림으로 용산 역을 빠져 나와 중국으로 망명할 수밖에 없었다.


# 대한민국 임시헌장 제정 기초위원으로 활약


만주.봉천을 거쳐 3월 19일 상해에 도착한 선생은 독립운동의 중심기관으로 대한민국임시정부를 만들어야 한다는 데 공감하고 이에 적극 동참했다. 그리하여 각지에서 모인 독립운동자들은 우선 4월 10일 대한민국 임시의정원을 구성하고, 임시헌장을 제정한 뒤 4월 13일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수립을 대내외에 공포했다. 이때 선생은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선임돼 이시영(李始榮).조소앙(趙素昻) 등과 함께 임시헌장 제정 기초위원으로 활약했다. 선생과 이들 두 분에 의해 성안된 대한민국 임시헌장 선포문과 대한민국 임시헌장은 임시의정원의 결의를 거쳐 선포되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신익희 유묵(1954)

대한민국 임시헌장 선포문


신인일치(神人一致)로 중외협응(中外協應)하야 한성(漢城)에 기의(起義)한지


삼십유일(三十有日)에 평화적 독립을 삼백여주(三百餘州)에 광복하고 국민의 신임(信任)으로


완전히 다시 조직한 임시정부는 항구완전(恒久完全)한 자주독립의 복리(福利)로 아(我)

자손여민(子孫黎民)에 세전(世傳)키 위하여 임시의정원의 결의로 임시헌장을 선포하노라.


대한민국 임시헌장


제1조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함

제2조 대한민국은 임시정부가 임시의정원의 결의에 의하여 차(此)를 통치함

제3조 대한민국의 인민은 남녀 귀천과 빈부의 계급이 무(無)하고 일체 평등함

제4조 대한민국의 인민은 신교(信敎).언론.저작.출판.결사집회.신서(信書).주소 이전.신체와 소유의 자유를 향유(享有)함

제5조 대한민국의 인민으로 공민 자격이 유(有)한 자는 선거권과 피선거권이 유(有)함

제6조 대한민국의 인민은 교육 납세와 병역의 의무가 유(有)함

제7조 대한민국은 신(神)의 의사에 의하야 건국한 정신을 세계에 발휘하며 진(進)하야 인류의 문화와 평화에 공헌하기 위하야 국제연맹에 가입함

제8조 대한민국은 구황실(舊皇室)을 우대함

제9조 생명형(生命刑)·신체형(身體刑)과 공창제(公娼制)를 전폐함

제10조 임시정부는 국토회복 후 만 1개년 내에 국회를 소집함


이와 같은 임시헌장 10개조의 내용은 지금 보아도 근대 민주국가로서 조금도 손색이 없는 정치 사회적 기본원칙과 정신을 갖추고 있다. 뿐만 아니라 여기에는 인류의 평화와 문화 발전에 기여하고자 하는 우리 민족의 평화주의적 사고, 인간의 생명과 존엄성을 무엇보다도 중요시 여긴 당시 독립운동자들의 인간 중심적 사고가 고루 반영돼 있음을 볼 수 있다.


# “일본과 전쟁하려면 중국군과 함께 해야 한다.” 중국 국민당군 중장이 돼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조각(組閣)이 이뤄지자 선생은 초대 내무차장 겸 내무총장 대리로 선임됐다. 그리하여 내무총장 겸 국무총리 대리로 부임한 안창호를 도와 1919년 7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내 행정조직으로 연통제를 창안 실시하는데 일조했다. 연통제는 국민 간에 기맥(氣脈)을 상통하고 복국사업(復國事業)의 완성을 기하기 위해 내외의 활동을 일치시키기 위해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국내의 도.군.면 단위로 조직한 비밀 행정조직이었다. 이 조직은 임시정부의 각종 활동과 법령을 전달하는 모세혈관으로 국내 동포들에게는 독립에 대한 희망을 잃지 않게 했고, 임시정부에게는 국내에서 독립운동자금을 모집하는 대정맥으로 기능했다. 따라서 이는 임시정부의 국내 통치행위의 근간이요 활동의 원천이기도 했는데, 이의 실시에 안창호와 함께 선생의 노력이 깃들어 있는 것이다.


또한, 선생은 1920년 임시정부의 내무총장 대리.외무총장 대리.국무원.비서장 등에 선임돼 활약했고, 이후 법무총장.외교부장 및 임시의정원 부의장 등을 두루 역임하면서 임시정부의 분열을 방지하는데 심혈을 쏟아 부었다. 특히 선생은 독립운동의 성공을 위해서는 중국 정부와의 협조가 필수적임을 인식하고, 1921년 4월 한중호조사(韓中互助社)를 창립해 한.중 합작으로 항일운동을 전개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했다. 1923년 임시정부의 개편을 둘러싸고 개조파와 창조파의 갈등이 첨예했던 때에 선생은, 평소의 주장이던 대일 군사항쟁을 한.중 합작으로 실현키 위해 중국 국민당군에 들어가기로 결심했다. 그리하여 섬서성(陝西省) 독군(督軍) 호경익(胡景翼) 막하의 고문으로 들어가 제2군의 중장(中將)이 됐다.


신익희 연설 장면# 한국.중국이 합작, 국경의 일본군을 공격할 준비를 차근차근 진행


이 시기에 선생은 중국 학생과 한국 청년 5백 명을 모집해 유격대의 일종인 분용대(奮勇隊)를 편성하고, 이들을 훈련시켜 점차 성장하면 만주로 가서 한.중 국경에서 군사행동을 일으켜 국내로 진격한다는 군사작전계획을 수립했다. 이를 실행키 위해 선생은 우선 신흥무관학교 제1회 속성과를 졸업하고 의열단(義烈團) 단원으로 활동하고 있던 성주식(成周寔)을 북만에서 초빙해 국민당 제2군 육군 중위에 임명했다. 그런 뒤 분용대 연성대장의 책임을 맡겨 교육 훈련에 전념케 함으로써 국내 진공작전 준비를 차근차근 진행시켜 갔다.


하지만 1924년 가을 선생의 후원자인 호경익이 갑자기 사망함에 따라 분용대에 의한 국내 진공작전 계획은 좌절될 위기에 처하게 됐다. 이에 선생은 1926년 북벌중인 장개석(蔣介石).백숭희(白崇禧)와 남창(南昌)에서 만나 분용대의 병력과 훈련상황을 이야기하고 한.중합작으로 한.만 국경의 일본군 토벌을 건의했다. 그러나 당시 이들은 자국의 혁명에 주력하고 있었기 때문에 선생의 한.중합작에 의한 국내 진공작전계획은 성사되지 못했다. 그럼에도 선생은 1927년부터 남경정부의 심계원장(審計院長) 우우임(于右任)의 배려로 심계원에 근무하면서 그 보수로 원로 독립운동자들을 원조하는 한편 기회가 있을 때마다 중국 지도자들을 만나 한·중합작에 의한 대일항전을 역설하고 다녔다.


# 한국혁명당 세우고, 철혈단을 조직...무장 독립투쟁 준비


한편 1926년부터 우리 독립운동계에는 중국 국민당과 같은 민족대당(民族大黨)을 결성해 이당치국(以黨治國)형태를 취해야 한다는 주장이 대두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임시정부는 1927년 3월 제3차 개헌을 통해 이당치국의 형태를 도입한 개정 헌법을 발표하기에 이른다. 이에 독립운동자들은 각각의 운동방략과 이념, 친소(親疏) 관계 등에 따라 독립운동을 제일차적 목적으로 하고, 독립 후의 신국가건설이나 민족사회의 재구성 방안을 정강(政綱)으로 제시하면서 민족정권에의 적극적 참여의지를 표출한 독립운동정당을 창당해 갔다. 정치 경제학을 전공한 선생 또한 이 같은 조류를 선도하면서 1929년 안재환.윤기섭.성주식.김홍일 등과 남경에서 한국혁명당(韓國革命黨)을 창당했다. 그리고 그 산하 단체로 철혈단(鐵血團)을 조직해 무장 독립투쟁을 준비하는 한편 <우리의 길>이라는 기관지를 발행해 한인 동포들의 민족정신과 독립의지를 배양하여 갔다.


이 시기 일제는 대륙지배의 야욕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면서 1931년 9월 이른바 만주사변(滿洲事變)과 1932년 1월 상해사변(上海事變)을 도발해 중국 침략을 본격화하고 있었다.


# “단일 정당으로 민족의 힘을 모으자.” 민족혁명당, 조선민족전선연맹 결성에 차례차례 참여


신익희 선생의 사진이 붙은 선거 게시물이에 따라 민족의 모든 역량을 대일항전에 결집할 필요성이 더욱 증폭돼 갔다. 때문에 각각의 독립운동단체와 정당들은 대일항전에 총력을 다하기 위해 민족협동전선의 형성에 온갖 노력을 쏟아 붓고 있었다. 선생은 이때 한국혁명당의 대표로 1932년 11월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조선혁명당(朝鮮革命黨).의열단.한국광복동지회(韓國光復同志會) 등의 대표들과 협의해 민족협동전선으로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韓國對日戰線統一同盟)을 탄생시켰다. 이 동맹은 혁명역량의 집중과 지도의 통일로써 대일전선의 확대 강화를 도모하고, 민중의 기초 위에서 직접 군사행동을 투쟁노선으로 설정해 대일항전의 구심체적 역할을 수행했다. 선생은 이 동맹에서 최동오(崔東旿).김규식(金奎植).박건웅(朴建雄)과 함께 상무위원으로서 활동했다. 하지만 이 동맹은 가맹단체 간의 연락 협의기관으로 일종의 단체연합적 성격을 띠고 있었기 때문에 그 결속력과 통제력은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따라서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면서 대일항전에 민족의 모든 역량을 집중할 수 있는 명실상부한 민족통일전선으로 단일대당(單一大黨)의 결성이 요청됐다.


이에 따라 1934년 초 선생은 단일대당 형성의 일환으로 우선 자신이 속한 한국혁명당을 만주사변 이후 만주에서 관내 지역으로 이동한 한국독립당과 합쳐 신한독립당(新韓獨立黨)을 창당했다. 그리하여 이를 매개로 기존의 독립운동 정당과 단체를 해소해 단일대당을 창당하는 방식의 민족통일 전선 형성에 진력했다. 그 결과 1935년 7월 남경 금릉(金陵)대학에서 민족통일전선의 원칙 아래 신한독립당(윤기섭).의열단(김원봉).조선혁명당(최동오).한국독립당(조소앙).대한독립당(김규식) 등 5당 통합으로 민족혁명당의 창당이 이뤄졌는데, 이의 성공이 있기까지 선생의 역할이 컸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같은 해 9월 한국독립당 재건파가 탈당하고, 나아가 1937년 1월 제2차 전당대회를 계기로 비(非) 의열단 계열의 일부 인사가 이탈함으로써 그 세력이 위축되고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같은 해 7월 7일 일제는 노구교(蘆溝橋)사건을 기화로 중일전쟁을 도발하고 중국 전역을 유린하기 시작했다.


경향신문 발행 국회의원 사진 특보(1948.7.1).독립운동단체들은 이 같은 상황 변화에 따라 두 갈래로 체제를 정비해 본격적인 대일항전을 준비해 갔다. 하나는 1937년 8월 한국국민당(김구).한국독립당(조소앙).조선혁명당(이청천) 등의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光復陣線) 결성이었다. 다른 하나는 같은 해 12월 민족혁명당(김규식.김원봉).조선민족해방동맹(김성숙).조선혁명자연맹(유자명) 등의 조선민족전선연맹(民族戰線) 결성이었다. 민족혁명당의 선전부와 국민부 요원으로 활동했던 선생은 이때 조선민족전선연맹의 결성에 참여했고, 그 뒤 중국 각지를 순방하면서 대일항전을 지도했다. 그러던 중 선생은 1938년 9월 민족전선 내의 급진적 무장투쟁 단체로 한구(漢口)에서 새롭게 조직된 조선청년전위동맹(朝鮮靑年前衛同盟)에 가담했는데, 이는 애시당초 무장투쟁을 주장해 왔던 선생의 입장에서는 어쩌면 당연한 처신이었을 것이다.


# 임시정부에 합류하여 외교와 선전 분야에서 일하다 중경에서 광복 맞아


한국 독립운동계의 대립은 대일항전 수행에 차질을 가져올 것이 분명하였기 때문에 이를 극복하고자 하는 내외의 움직임이 일어났다. 양대 계열의 핵심적 인물인 김구와 김원봉은 1939년 5월 동지.동포에게 보내는 공개통신에서 통합선언을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같은 해 8월 27일부터 사천성 기강에서 광복진선과 민족전선 양측의 통합회의가 열렸다. 이 회의의 광복진선 측 3개 당 대표로는 한국국민당의 조완구.엄항섭, 한국독립당의 홍진.조소앙, 조선혁명당의 이청천.최동오 등이 참석했다. 민족전선측 4개 당 대표로는 민족혁명당의 성주식.윤세주, 조선혁명자연맹의 유자명, 조선민족해방동맹의 김성숙, 그리고 조선청년전위동맹에서는 신익희 선생이 참석했다. 그러나 이 같은 7당 회의가 진행되는 상황에서 조선청년전위동맹의 최창익(崔昌益) 등 18명이 통합회의와는 아랑곳하지 않고 연안으로 가버렸다. 따라서 7당 통합이 무산돼 독립운동상에서 항상 통합과 연대를 앞장서 실천해 온 선생은 매우 통탄해 했다.


신익희 선생의 유해를 실은 차량을 따라가는 추모인파

이후 선생은 조선의용대 병력이 모여 있는 낙양(洛陽)으로 가서 김성숙의 조선민족해방동맹과 연합해 조선민족해방투쟁동맹의 결성을 주도했다. 그리고 이들을 지도하면서 1941년에는 한.중합작으로 한중문화협회를 조직해 상무위원으로 활동했고 다시 임시정부에 합류했다. 그리하여 1941년 6월 선생은 임정에서 외교연구위원회 위원으로 선임됐고, 1943년 4월 대한민국 잠행관제에 의해 설치된 선전부의 선전위원회에서 조소앙.엄항섭.유림(柳林) 등과 활동하면서 대한민국의 선전계획의 수립과 실행에 이바지하였다. 나아가 1944년 5월 임정의 연립내각 성립 때 내무부장에 선임되어 활약하다가 중경(重慶)에서 광복을 맞았다.


# 가슴 벅찬 환국...김구 주석과 함께 반탁운동…건국 후 대통령 출마한 후에 작고


광복 이후 선생은 1945년 12월 2일 임정요인의 제2차 환국 때에 벅찬 감격과 자주적 민족국가 건설의 희망을 안고 귀국했다. 하지만 귀국 직후 모스크바 3상 회의에서 신탁통치안이 결의되자 김구 주석을 도와 반탁운동을 선도했다. 이 와중에서도 선생은 1946년 국민대학(國民大學)을 설립해 민족국가 건설의 동량(棟梁)을 육성하는 한편 자유신문(自由新聞)을 발행해 민족 자주성을 함양해 갔다.


1948년 5월 제헌의원 선거에 경기도 광주에서 출마해 당선됐고, 이후 초대 국회 부의장과 이승만(李承晩)의 후임으로 국회의장에 선출돼 활동하면서 대한민국 건국에 크게 공헌했다. 특히 1956년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출마해 국민대중의 염원을 실현키 위해 불철주야 노력하다가 5월 5일 호남선 열차 안에서 뇌일혈로 급서했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했다./사진출처-국가보훈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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