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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서원 171] 이문화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고 있는 대구 '서계서원(西溪書院)'
  • 이승준 기자
  • 등록 2023-01-25 07:1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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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준 기자] 대구광역시(大邱廣域市) 북구(北區) 서변동(西邊洞)에 소재(所在)하고 있는 서계서원(西溪書院)은 1781년 신축(辛丑) 정조(正祖) 5년에 유림(儒林)의 공의(公議)로서 창건(創建)된 서원(書院)이다.


조선조(朝鮮朝) 태종조(太宗朝) 때의 명신(名臣)이요. 이․예조판서(吏禮曹判書), 예문관 대제학(藝文館大提學), 의정부(議政府) 참찬(參贊)을 역임(歷任)하고, 증영의정(贈領議政). 시(諡) 공도(恭度). 오천(烏川) 이문화(李文和)(1358~1414)의 학문(學問)과 덕행(德行)을 추모(追慕)하고 상현존덕(象賢尊德)하기 위(爲)하여 봉안(奉安) 천향(薦享)하는 곳이다.


그 뒤 본도(本道) 사림(士林)에서 다시 공론(公論)을 모아 추가(追加) 배향(配享)할 석학(碩學)을 천거(薦擧)했는데, 선조초(宣祖初)에 이미 대곡정사(大谷精舍)를 지어 강학(講學)의 장소(場所)로 삼고, 1582年에 금호강(琴湖江) 위 창포리(菖蒲里)에 환성정(喚惺亭)을 지어 유학진흥(儒學振興)에 이바지하고,또한 임란(壬亂) 때는 의거(義擧)로써 백의단충(白衣丹忠)을 나타낸 영남(嶺南)의 큰 유학자인 공(公)의 후손(後孫) 태암(苔巖) 이주(李輈)(1556~1604)를 추가(追加) 배향(配享)하게 됐다. 즉(卽) 1801年이다.



창건 이후(創建以後) 매년(每年) 춘추(春秋) 전향(奠享)과 강례수학(講禮修學)을 계속(繼續) 이어 오다가, 고종(高宗) 8年 신미(辛未)(1871)에 국령(國令)에 의(依)해 훼철(毁撤)됐다.


창건 당시(創建當時)의 규모(規模)를 살펴보면, 원호(院號)를 문간공(文簡公) 고동(古東) 이익회(李翊會)판서(判書)가 짓고, 산목헌(山木軒) 김의순(金義淳) 판서(判書)가 원호(院號)를 쓰고, 호동(壺洞) 유언수(兪彦修) 참판(參判)이 사실(史實)을 서술(敍述)하고, 인촌(仁村) 우재악(禹載岳) 참봉(參奉)이 봉안문(奉安文)과 상향축문(常享祝文)을 찬(撰)하고, 연안(延安) 김횡(金鑅) 성산(星山) 목사(牧使)가 기문(記文)했다.

    


# 이문화(李文和, 1358~1414)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 본관은 인천(仁川). 자는 백중(伯仲), 호는 오천(烏川). 평장사(平章事) 지저(之氐)의 6대손이며, 아버지는 전공판서(典工判書) 심(深)이다. 1380년(우왕 6) 문과에 장원 급제해 우정언.우헌납.예문응교를 거쳐 경상도안렴사를 지내고, 공양왕 때 우사의를 역임했다. 1392년 조선이 건국되자 좌간의대부에 등용되고 1395년(태조 4) 검교시중직(檢校侍中職)의 혁파를 주장했다. 1397년 좌승지를 거쳐 이듬 해 도승지 겸 상서윤을 지냈다.


1399년(정종 1) 생원시를 관장하고 이듬 해 첨서의흥삼군부사(簽書義興三軍府事)가 돼 하정사(賀正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그 해 사평부우사로 등용됐으나 분경(奔競)으로 사헌부의 탄핵을 받아 취임하지 못하고 예문관대제학이 됐다. 1402년(태종 2) 경상도도관찰출척사로 외방에 나가고 이어 참찬의정부사.사평부우사를 거쳐 예문관대제학·대사헌을 지냈다. 1405년 예조판서를 거쳐 이듬 해 전라도도체찰사 임무를 대행하고 이어 명나라 황엄(黃儼)의 접반사가 됐다. 1408년 호조판서 등을 역임하고 그 해 처녀진헌사(處女進獻使)로 명나라에 갔다.



1409년 형조판서를 거쳐 대사헌에 이르렀으나 민무질(閔無疾) 사건에 연루, 면직됐다. 1411년 개성유수로 있을 때 저화(楮貨)에 ‘삼사신판(三司申判)’이라는 글 대신 ‘호조신판(戶曹申判)’으로 바꿀 것을 주장, 시행하게 했다. 1413년 명나라에 갔다가 이듬 해 귀국해 참찬의정부사가 됐다. 뒤에 영의정으로 추증, 장흥의 금계사(金溪祠), 함안의 도천사(道川祠) 등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공도(恭度)이다.

 

# 이주(李輈 1556~1604)


조선 중기의 학자이자 의병장. 자는 경임(景任), 호는 육휴당(六休堂) 또는 태암(苔巖)이라 하고 본관은 인천(仁川)이다. 문화(文和)의 8대손이자 한강 정구(寒岡 鄭逑) 문인이다. 당대 명유(名儒) 정경세(鄭經世)등과 교유하고 성리학을 연구했고,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서사원(徐思遠)과 함께 창의병을 모집, 군량을 조달하고, 초유사(招諭使) 김성일의 소모관(召募官)으로 있었다. 뒤에 체찰사(體察使) 이덕형(李德馨)의 추천으로 능참봉(陵參奉)에 임명됐으나 사양하고 향리에 묻혀 학문에 전심했다. 또 그는 이숙량(李叔樑)과 함께 연경서원의 건립에 주동적인 역할을 했다.

    


경내의 건물로는 사당, 신문(神門), 동․서 협문(夾門), 3칸의 강학당, 1칸의 서고(書庫), 고직사, 대문 등이 있다 사당은 숭덕사(崇德祠)로 이문화(李文和)와 이주(李輈)의 위패가 봉안돼 있고, 강학당은 화수정(花樹亭)이라 칭하는데 1924년에 중건된 건물이다. 동재는 금수랑(琴水廊)이라 칭하고, 문헌과 가보를 보관하고 있다. 서재는 희리당(希理堂)이라 칭하고, 창포리에 있는 환성정(喚惺亭)을 옮겨온 것이다. 서고는 부용장(芙蓉帳)이라 하고, 고직사는 향사 때 제수를 마련해 두는 곳이다. 넓은 뜰에는 정원수(庭園樹)로 조경(造景)했고 대문인 향의문(向義門) 곁에는 서계서원 사적비(西溪書院 事蹟碑)를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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