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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서원 170] 서섭을 추모하기 위해 건립한 대구 '덕산서원(德山書院)'
  • 이승준 기자
  • 등록 2023-01-25 06:5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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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준 기자] 덕산서원(德山書院)은 대구광역시 수성구 황금동 258 소재의 재실로 조선초기의 문신으로 절개를 지켰던 남은 서섭을 추모키 위해 건립했다. 


그는 세종대 대과에 급제했고, 단종때에는 이조판서까지 올랐으나, 수양대군이 조카인 단종을 몰아내자 관직을 버리고 낙향해 세상을 떠날 때까지 자연을 벗삼아 은둔생활을 했다.


그의 충절이 알려지자 전국 각지의 유림들이 서원을 세우고 향사를 지내니 대표적인 곳이 무주의 분양서원, 영일의 중앙서원이다. 수성구의 덕산 서원은 후손들과 사림들이 뜻을 모아 1926년 에 선생의 묘소가 있는 황금동 무학산 동쪽 형제봉 아래에 첨모재를 건립한 것을 1954년 8월 중수했다.


1993년 유림에서 다시 공의해 지금의 덕산서원으로 확장함으로 현재는 첨모재가 덕산서원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1994년에 경모사를 준공하고  95년부터 덕산서원에 위패를 봉안하고 제향을 올리고 있다.

    


# 서섭(徐涉)


선생의 휘(諱)는 섭자(涉字) 이고 호는 남애(南厓)로, 패관자정(掛冠自靖)한 뒤에 남은(南隱)으로 고쳤고 달성서씨이다. 


상조(上祖)의 휘(諱)는 진자(晉字)이고 고려 봉익대부 판도판서 달성군(奉翊大夫 版圖判書 達城君)이고, 이세조(二世祖)의 휘(諱)는 기자준자(奇字俊字)이고 승봉랑 도관좌랑(承奉郞 都官佐郞)을 지내고 문하시중찬성사 달성군(門下侍中贊成事 達川君)에 추봉(追封)됐는데 이 어른이 선생의 오대조(五代祖)이다. 고조(高祖)의 휘(諱)는 영자(穎字)이고 호는 노남(櫓南)이고 달성군으로, 중대광 금자광록대부 문하시중찬성사(重大匡 金紫光祿大夫 門下侍中贊成事)를 지고 시호(諡號)는 충정공(忠靖公)이다. 증조(曾祖)의 휘(諱)는 균자형자(鈞字衡字)이고 호는 학암(鶴巖)이다. 김난계선생(金蘭溪先生)의 문인으로 공민왕 구년 경자(恭愍王 九年 更子(서기 1360))에 정포은 이석탄 제현(鄭圃隱 李石灘 諸賢)과 동방급제(同榜及第)하고, 직제학 이부상서 정당문학 양광도관찰사(直提學 吏部尙書 政堂文學 楊廣道觀察使)를 거쳐 벼슬이 순충논도좌명공신 상의문하찬성사 세자사부(純忠論道佐命功臣 商議門下贊成事 世子師傅)에 이르렀고, 시호는 정평공(貞平公)이고 부자분이 함께 옥계서원(玉溪書院)에 배향(配享)됐다. 


조(祖)의 휘(諱)는 침자(沉字) 이고 호는 구계(龜溪)이니, 정포은선생(鄭圃隱先生)의 문인으로 성리학을 전공하고 조봉대부 전의소감(朝奉大夫 典醫少監)을 지냈고, 통정(通政)으로 조선 세종때 재조(才操)와 덕망으로 삼남균전제처사(三南均田制處使)에 발탁제수(拔擢除授)됐다. 이때 구계선생(龜溪先生)의 거지(居地)인 달성(達城)이 천작(天作)으로 성지(城池)가 될 수 있다해, 왕명으로 대구 남산 고역기(古驛基)와 교환(交換)하고 인근 몽리답(蒙利畓)에서 거두어 들이는 세곡을 주고, 장차 대대로 녹봉을 더 하겠다 했을 때, 구계선생은 조정의 보상 제안을 모두 사양고 그 대신 조정이 대구부민에게서 거두어들이는 환곡의 이자를 감해줄 것을 요청했다. 



이에 세종께서 크게 칭찬고 윤허해, 환곡이자가 매석당 일두 오승인 것을 오승씩 감해줌으로써, 대구부민들은 영세토록 구계선생의 은택을 입었고, 대구부민의 공의로 구계선생은 구암서원에 배향됐다. 고(考)의 휘는 문한(文翰)이고 호는 쌍죽당(雙竹堂)으로, 문과에 올라 승사랑 광흥창부승(承仕郞 廣興倉副丞)과 통정대부(通政大夫)로서 현감을 지냈다.


선생은 세종조에 문과에 올라 대호군(大護軍)을 거쳤고, 벼슬이 자헌대부 이조판서(資憲大夫 吏曹判書)에 이르렀는데, 집현전학사들과 함께 문종의 고명(顧命)을 받았고, 문종조를 거쳐 단종께서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오르자, 정치적 정세를 미리 간파 하고 단종에게 '척간소(斥姦疏)'를 올려 말을 다했는데, 그 내용은 주로 왕족의 발호(跋扈)와 간당(간당)의 선란(煽亂)을 통열(痛烈)히 배척하고, 충신과 간신을 구분할 것이며 집현전 제신들을 등용하고, 군대를 양성해 불우지변(不虞之變)을 막아야 한다는 등이었다. 


그 대략을 말하면 '선왕의 고명(顧命)이 지금까지 귀에 남았아옵니다. 엎드려 원하옵건대, 집현전 신하를 복심(腹心)과 고굉(股肱)으로 삼으시면 나라에 걱정이 없을 것이오이다'라고 하면서, 또 말하시기를 '왕족이 비록 왕실을 보호하는 번신(藩臣)이라고 하오나, 주나라에 관숙(管叔) 채숙(蔡叔)의 반란이 있었을 때 주공이 바로 잡았고, 한나라에 오초(吳楚)의 변란이 있었을 때 주아부(周亞夫)가 평정 했으니, 재상을 뽑고 장수를 선택하는 것을 급선무로 삼으시기 바라옵니다'라고 했다. 이 상소로 인해 유배 됐다가 곧 몽유(蒙宥)를 받았으나, 때는 이미 삼상(三相)이 죽고 대세는 기울어졌던 것이다. 그리하여 시사(時事)가 크게 그르게 되자 드디어 사직하고 고향인 대구로 돌아 와, 백씨(伯氏)인 현감공 휘 제자(縣監公 諱 濟字)께서 함께 자정(自靖)했다. 



그 후 육신(六臣)의 순절(殉節)을 듣고 읊은 시에 '남아로서 세상에 살아도 면목이 없구나!'라고 한 구절이 있고, 영월의 참변을 듣고 통곡하면서 읊은 시에는 '부끄럽구나 못난 신하 세상에 살아 남다니' '후일 지하에서 무슨 낯으로 선왕을 뵈오리?'라는 구절이 있고, 망경루음(望京樓吟)에 '죽지 않고 뭘 하려나? 백발 늙은이'라고 한 탄식이 있고, 두견새 소리를 듣고 읊은 시에 '밤마다 외로운 신하 눈물 금치 못하네'라는 심회(心懷)가 있었다. 그리하여 나라 일에 통분 개탄하느라 가슴에 답답한 기운이 맺힌 것이 병이 됐고, 백형께서 먼저 돌아가니 선생께서 제문을 지어 통곡하면서 말하시기를 '아침 저녁 머리 맞대고, 맹세코 살기 도모하지 말자 하시더니, 서산(西山) 백이숙제(伯夷叔齊)가 은거한 수양산)이 어디 있는고? 나도 또한 이를 따르리로다' 하면서 국사의 통분함을 이기기 못하고 세상을 마쳤다. 


남은 글 여러 편은 모두 피맺힌 충성으로 쓴 것으로, 대개 그 의리는 사육신의 충성이요, 그 행적은 생육신의 절의였다. 다만 후손들이 영체되고 유적이 늦게 나타나 포상의 은전이 아직 빠졌으나, 굽혀지고 펴지는 것은 도요, 드러나고 숨겨지는 것은 때(時)인 것이다. 그러므로 도에 통달한 군자나 때를 알고 여론을 숭상하는 사람들은, 지금에 이르도록 애석해 하는 것이다. 묘소는 대구 수성구 황금동 경좌원에 계시고, 배 정부인 인천채씨는 예조참의 휘 윤자(崙字)의 따님이요, 다의당 휘 귀자하자(多義堂 諱 貴字河字)의 증손으로 묘소는 동국 간좌(同局 艮坐)에 계신다. 남은선생 문집이 세상에 전하고, 무주(茂朱)의 분양서원(汾陽書院)과 영일(迎日)의 중양서원(中陽書院) 그리고 대구의 덕산서원(德山書院)에 배향됐다. 선생의 사적(事蹟)이 단종사보(端宗史補)와 장릉사보(莊陵史補)에 등재돼 있다. 



# 서감원(徐坎元)


공의 휘(諱)는 감자원자(坎字元字)이고 달성서씨(達城徐氏)로 남은선생의 둘째 아들이다. 일찍이 잠영세가(簪纓世家)에서 출생해 생원과(生員科)에 오르고, 성균관에 거재하면서 큰 뜻을 품었다. 선군의 연고로 초야에 물러나 고수동강(固守東岡)의 지조를 지켰다. 비록 직위가 조정에 있지 않았으나 가풍에 젖어시고 정학을 연구했고, 좋은 말씀과 착한 행실 숨은 덕과 그윽한 빛이 반드시 문자간에 많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족보의 기록에는 다만 성균생원이라고만 기록 됐을뿐, 생졸과 자호가 적히지 않았고 문집초고를 간수한 것이 없으니, 실로 루백년(屢百年)의 의심거리가 됐던 것이다. 근래에 성종실록을 보면  성종조에 나라에 큰 재변이 있자, 조정에서 구언했는데 공께서 직언으로 '구언소(求言疏)' 를 올렸다. 성종실록 갑진(성종15년/서기1484) 팔월 병진조에 공이 올린 봉사(封事)의 대략(大略)이 기록돼 있다. 


그 주된 내용은 조정의 실정과 임금의 허물을 바로잡기 위해 말을 다했다. 그 개략을 말하면, 조정의 부당한 인사에 대해 말하기를 '강직한 신하는 물러나 초야에 처하고, 소외되어 멀리 있는 신하는 나아갈 길이 없어, 임금이 폐백을 갖추어서 신하를 부르는 예가 세상에 행해지지 않으니, 무릇 이렇게 된 까닭은 무엇이옵니까?'하셨고, 또 신하의 간언에 대한 임금의 자세에 대해 말하시기를 '주공이 재상이 되어 정치의 기강을 세우는 글을 은근하고 간곡하게 진술하매 성왕은 가납(嘉納)했사옵니다. 그런데 지금의 재상들이 과연 주공의 마음과 같사옵니까? 신은 감히 알지 못하겠사옵니다. 주상께서 신하를 대우하심이 과연 능히 성왕이 주공에게 하신 바와 같으시옵니까?'하셨고, 또 임금의 사치에 대해선 '지금 토목의 일이 자주 일어나 나무와 돌을 운반하느라고 내는 목도 소리가, 도로에 끊이지 않고 백성의 집을 헐어버리는데 이르기까지 하는 실정이옵니다. 그리하여「떠나서 어디로 가랴?'하는 백성의 탄식이 있으니, 슬퍼할 만하기가 심한 것이옵니다. 경복궁은 곧 선조왕께오서 처음 세운 것으로, 성자신손(聖子神孫)이 여기에서 팔짱을 끼고 나라를 다스리고, 여기에서 정사를 부지런히 하게 하고자 하던 곳이었사옵니다. 궁궐이 부족함도 아니요 정원이 넓지 않은 것도 아닌데, 더욱 궁궐을 넓혀 짓고 널리 정원을 점유하니 이것이 진실로 무슨 마음이옵니까?' 했고, 또 임금이 정학을 소홀히 함에 대해서는 '이단이 그치지 않으면 유도가 밝지 못한 법이 옵니다. 전하께서 즉위한 초년에 이단의 의식을 혁파하시고, 또 홍문관에 명하여 역대 왕조에서 이단을 배척하는 상소문을 모아 아뢰게 함에, 신민이 모두 우리 유도가 날로 성행하고 이단이 날로 쇠망할 것을 알게 되어, 태평의 치세를 바랐던 것이 옵니다. 그런데 근년 이래로 점점 처음과 같지 못하옵니다'라고 했다. 



또 군사의 제도에 대해선 '경전에 말하기를 삼년상은 천하의 공통된 상례로서 부모상에는 귀천이 없이 동일하다. 하였사옵니다. 그런데 이제 군졸들은 어버이의 상을 당해도 겨우 백일을 넘기면 상복을 벗고 길례를 따르며 화살를 지고 창대를 메고 군사의 대열에서 분주해야 하옵니다. 부모의 상을 당한 자식으로서 애통해 하는 마음이 이로 인해 줄어드니 어찌 인정의 큰 누가 아니겠습니까?라고 했고 또 관리에 대하여 말하시기를 '임금과 더불어 함께 백성을 편하게 하기로는, 수령보다 앞서는 이가 없다고 하옵니다. 수령에 온당한 사람을 얻으면 백성이 그 혜택을 받고, 진실로 그럴 만한 수령이 아니면 백성들이 그 해로움을 받는 것이니, 실로 수령의 직책이 막중하옵니다. 옛 사람의 말에 근원이 맑으면 말류도 맑다고 하옵니다. 신은 원하옵건대 전하께오서 먼저 조정을 바르게 하시고 백관을 바르게 하소서. 백관이 바르면 감사가 자연히 바르게 되고 수령이 저절로 바르게 되리이다.'라고 하셨다. 



이 한편의 상소에서 공이 임금께 충성하고, 백성을 사랑하는 정성, 사교를 배척하고 정의를 부식하는 학문, 효도를 권장하고 윤리를 두텁게 하는 덕성, 곧은 말로 엄숙하게 바로잡는 도가 모두 지성으로 간곡한 충심에서 나왔기에, 족히 백대의 임금에게 귀감이 될 만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임금은 승정원에 전교(傳敎)하기를 '상소에 나를 꾸짖는 말이 많다'하고, 또 초야의 선비가 조정을 멸시한다는 등의 말로 크게 진노해 장차 추국하려 했다. 이때 조정대신들로서 정창손(鄭昌孫), 한명회(韓明澮), 심회(沈澮), 윤필상(尹弼商), 노사신(盧思愼), 이극배(李克培), 김겸광(金謙光), 윤호(尹濠), 서거정(徐居正), 허종(許琮), 한치례(韓致禮) 등이 모두 '구언(求言)을 하고 죄를 준다면 언로가 막힐 것이니, 직언한 사람을 죄주는 것은 불가하다.'고 간언 했음에도, 임금은 경상도관찰사 이육(李陸)에게 명하여 혹심한 추국을 계속하자, 공께서는 형옥중에서 억울하게 운명하셨다.그 후에도 나라에 재변이 날로 심해, 한겨울에 우레가 울고 瘴霧(장무/毒氣 어린 안개)가 하늘을 뒤덮었을 때, 다시 구언(求言)했으나 직언하는 사람이 없어 언로가 끊어졌던 것이다. 임금이 언로가 끊어진 이유를 물었을 때 대사간 신말주(大司諫 申末舟), 사간 김심(司諫 金諶) 등이 '공이 추국 당한 이후로 언로가 끊어졌다.'고 대답했다. 공의 묘소는 대구 수성구 고산곡 신좌원에 계시고, 배 웅천주씨(配 熊川朱氏)는 부사 휘 계자숙자(府使 諱 繼字淑字)의 따님으로 묘소는 쌍분입니다. 성균생원 서공(徐公) 실기(實紀)가 세상에 전하고 대구의 덕산서원에 배향됐다.


공의 사적이 성종실록에 상세하게 거의 일편분량(一篇分量) 등재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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