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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서원 168] 양희지를 추모키 위해 건립된 '오천서원(梧川書院)'
  • 이승준 기자
  • 등록 2023-01-21 09:51:18
  • 수정 2023-01-21 09:5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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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준 기자] 오천서원은 조선 성종 때 대사헌(大司憲)을 지낸 대봉(大峰) 양희지(楊熙止)를 추모하기 위해 1744년(영조 20)에 건립된 것으로 대구지역의 23개 서원 가운데 4번째로 건립되었다. 원래는 지금 위치에서 북쪽으로 2km 떨어진 지점인 파령골에 있었다. 1868년(고종 5)서원철폐령에 의해 훼철되었고, 1905년 현재의 위치로 이건하면서 당호를 무릉재라고 하였다. 1971년 유림총회의 의결로 사당을 신축하여 오천사라 하고 당호도 오천서원으로 바꾸었다.


# 양희지(楊熙止, 1439~1504)



공의 자는 가행(可行)이요 호는 대봉(大峯)으로 본관은 중화(中和)이다. 세종(世宗)21년(1432)에 군수(郡守) 양맹순(楊孟淳)의 아들로 태어났으니 일찍 잡안이 외롭고 가난하여 떠돌아 다니며 울산으로 여식(旅食)할때 양근군수(楊根郡守) 이종근(李宗根)의 아버지인 충속공이 그의 사람됨을 보고 한눈에 들었다.


문의현령(文議縣令)도 지낸바 있었던 이종근에게는 1남1녀를 두있어 위 딸을 주게하여 공을 사위로 삼게 되었으니 충숙공(忠肅公) 이 예의 손서가 되어 울산에 살게 되었다.


세조(世祖) 8년(1462)에 이르러 사마시(司의馬試)의 생진과(生進科)와 소과(小科)에 합격하여 세조10년(1464) 성균관 유생으로 있을 때 원각사(圓覺寺)의 개혁안을 맹렬히 반대 하였다


성종(成宗) 5년(1474)에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응시 병과로 급제하여 되어 성종의 부름을 받아 편전(便殿)에서 알현 희지(稀枝) 라는 이름과 정보(楨父)라는 자(字)를 하사 받았다. 

그러나 뒤에 이르러 그는 다시 초명을 사용하였다. 



등과한 뒤에 검열(檢閱)에 임명되었다가 이듬해에는 승문원 정자(承文院 正字)로 사가독서를 하고 성종 9년(1478) 부수찬에 올라 경연관을 겹직 이어 교리(校理) 문학(文學) 검상 대사간 충청도관찰사등을 거쳐 도승지로 직재학을 겸했다가 연산군(燕山君) 4년(1498) 무어 사화(戊午士禍)가 일어나자 직을 사퇴하여 버렸다


뒤에 다시 대사헌 부제학 형조참판등으로 여러차례 임명되었으나 직을 맡지 않았다.


연산군 6년 다시 대사관의 직에 나아가 무오사화로 극변으로 귀양 보냈던 사람을을 남쪽지방으로 옮기도록 하였다가 노사신(盧思愼) 유자광(柳子光) 등으로부터 노획되어 삭직을 당하고 전리(田里)에 쫓겨난 몸이 되었다. 



이에 앞서 한훤당 김굉필(寒喧堂 金宏弼)이 희천(熙川)의 적소(謫所)에 있을 때 정암 조광조(靜庵 趙光祖)가 어천찰방(魚川察訪)으로 부임하는 아버지를 따라감에 알고 글을 써주어 그로 하여금 김굉필의 문화에 들게하였다.


그후 연산군10년 (1504)에 복관이 되어 한성부 우윤(漢城府右尹)을 거쳐 우빈객(右賓客)이 되있으나 곧 병사하고 말았다.


성종24년(1493)10월에 장령(掌令)으로 있으면서 좌병영의 이영(移營)을 건의한 일이 있었다.


공은 말하기를 국가의 주장(主將)되는 자는 마땅히 왜인(倭人)과 더불어 뒤섞인 곳에는 있을 수 없으니 좌수영(左水營)을 개운포로 이설한 것은 국가를 위해서 옳은 일이나 병마절도사영이 또 울산에 있어 염포의 왜인과는 더불어 가까이 있고 이는 수로(水路)로 10여리요 육로로 겨우 20여리에 지나지 않으며 소리치면 서로 들릴 정도라 바로 볼 때 성위의 깃발을 역력히 볼 수 있어 좌병영(左兵營)을 내지로 옮겨 엿볼수 없도록 하는 것이 옳다고 하였다.



울산 출신이었던 공은 누구보다도 울산사정을 소상하게 잘 아는 처지에 있을 것이다 

연산군10년(1504)에65세로 죽은 공은 글씨를 잘썼으며 문집으로 대봉집(大峯集)이 있으며 대구의 오천서원(梧川書院)에 재향 되었었다.


문장에 뛰어나고 재주가 있었으나 임사홍·유자광(柳子光)·노공필(盧公弼) 등과 친하고, 임금의 뜻만 맞추려 하는 등 출처(出處)에 비난을 받기도 하였다. 저서로는 ≪대봉집≫이 있다.


오천서원은 야트막한 야산기슭에 남향으로 자리잡고 있으며, 2개의 영역으로 분리 배치되어 있다. 좌측으로 외삼문, 강당, 서재가 일곽을 이루고 있으며 강당 우측에 제향공간인 사당이 한단 높게 토장(土墻)으로 둘러싸여 일곽을 이루고 있다. 강당의 출입과 사당의 출입이 외부에서 별도로 진입할 수 있게 분리되어 있으며, 향사시 활동에 편하도록 강당 우측에 협문(夾門)을 두어 사당과 연결될 수 있도록 배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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