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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유공자를 찾아서 49] 전승기원 예배와 일장기 게양 거부한 '신석구'
  • 이승준 기자
  • 등록 2023-01-20 09:2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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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준 기자] 신석구 申錫九, 1875.05.03 ~1950.10.10. 충청북도 청주, 대통령장 1963


“나는 한일합병에 반대한다. 조선사람 치고는 누구나 다 한가지 아니겠는가? 일본사람이 조선사람이 되어보면 또한 재판장이 지금 나의 처지가 되더라도 그러할 것이다. 독립사상은 합병당초부터 지금까지 조금도 변함없이 내 가슴속에서 사무쳐 있다.” - 선생의 공판기록 중 진술내용


# 국민계몽운동을 통한 국권회복 모색


신석구(申錫九, 1875. 5. 3 ~ 1950. 10. 10) 선생은 1875년 5월 3일 충청북도 청원군 미원면 금관리에서 태어났다. 선생의 호는 은재(殷哉) 또는 춘정(春汀)이다. 7살에 어머니를 여의고 15세에 아버지를 잃었다. 때문에 선생은 평생 조실부모해 부모님을 봉양하지 못한 것을 가장 원통해 했다. 유가 가문에서 태어나 어려서 한문을 수학한 선생은 20대 초반 서울에서 군수 자제를 가르치기도 했고, 이후 농업에 종사하기도 했다. 그러나 조국의 현실은 선생을 거기에 안주하게 하지 않았다. 개항 이후 외세의 침략과 침탈 앞에 무방비 상태로 내던져진 나라의 운명을 보면서 선생은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의무를 자각하게 된 것이다. 1905년 11월 을사늑약 체결 이후 우리 민족은 본격적인 반일(反日)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하게 된다. 당시 그것은 크게 두 방향에서 전개됐다. 하나는 장기적인 실력양성운동으로 언론계몽, 대종교, 천도교, 기독교 등의 종교단체를 통한 종교계몽, 각종 학회와 사립학교 설립을 통한 교육계몽, 국어와 국사연구를 통한 학술계몽 등 각계각층의 국민계몽운동으로 진행됐다.


다른 하나는 즉각적 무력투쟁인 의병운동으로 전개됐다. 특히 의병운동은 1907년 7월 정미7조약에 따른 군대해산으로 해산군인들이 대거 의병대열에 참여함으로써 전국적인 의병전쟁으로 확대되고 있었다. 유교적 성장배경을 가졌던 선생 또한 이때에 의병을 일으켜 볼까 생각했다고 한다. 그러나 선생은, “병법에 ‘장수가 군대를 모르면 그 나라는 적을 흥하게 만들고, 병사에게 훈련을 시키지 아니하면 그 장수는 적을 흥하게 하는 것이며, 무기를 이롭게 사용하지 아니하면 그 병사 또한 적을 흥하게 하는 것이다.’고 하였으니 이 세 가지를 갖지 못한 내가 저 막강한 일본 군대를 대적한다는 것은 무고한 생명만 손상할 따름이지 구국할 도리는 아니다.”고 생각해그만두었다. 그 대신 선생은 “우리나라가 망하게 된 것은 큰 도가 없는 까닭이니 나라가 망하지 않게 하려면 종교가 있어야 되겠다. 또 주색잡기, 허랑방탕한 자들은 국민의 의무를 못할 뿐 아니라 패가망신하는 국민의 적들이오 잃어버린 국민들이니 나라를 망하지 않게 하려면 이들을 찾아서 제 의무를 할 줄 아는 국민이 되도록 하는 것이 유일한 구국책임을 깨달았다.”고 하면서 종교를 통한 국민계몽운동으로 국권회복을 모색했다.


이력서와 목사임명증서# 구국의 방도로써 기독교 감리교에 입교


그리하여 선생은 구국의 방도로서 기독교 감리교에 입교하기로 결심하고 1907년 7월 14일 처음으로 주일 예배에 참석했다. 선생에 있어서 종교는 개인적 신앙 그 자체만이 아니라 국민계몽의 길이었고 국권회복운동의 길이었다. 그러한 의도는 선생이 1908년 3월 미국인 선교사 왕영덕(王永德: A. W. Wasson)으로부터 세례를 받고 1909년 2월 개성 북부교회의 책임을 맡으면서 구체적으로 실행되기 시작했다. 한국병탄 이후에는 감리교 강원도 홍천구역장(1910. 10 ~ 1914. 8)과 경기도 가평구역장(1914. 9 ~ 1915. 9)으로 활동하면서, 또는 1915년 10월부터 1918년 10월까지 춘천지방에서 부흥사업에 종사하면서 암암리에 국민계몽활동을 했다. 그리고 1918년 11월부터 1919년 3.1운동으로 일제에 피검될 때까지 서울 수표교 교회 목사로서 전도를 통해서도 활동이 이뤄졌다. 1910년대는 헌병, 경찰을 앞세운 일제의 무단정치와 토지조사사업을 통한 토지 약탈이 자행되고 있던 참담한 시기였다. 심지어 교회 내에서도 대다수 외국인 선교사들이 일제의 한국 식민지 지배를 은연중 지지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이와 같은 분위기 속에서 1910년대 내내 이루어졌던 선생의 전도를 통한 국민계몽활동의 고초는 가히 짐작하고도 남을 바가 있다.



#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으로 3.1 독립선언서에 서명


신석구 선생 사진1910년대 선생의 전도를 통한 국민계몽활동은 곧 항일의식의 고취요 독립운동의 전파나 다름 없었다. 이러한 활동의 연계선상에서 선생은 1919년 2월 같은 감리교 목사인 오화영의 권유로 3.1운동 추진 계획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된다. 3.1운동은 제1차 세계대전에 대한 반성으로 인도주의가 고조돼 가던 국제적 분위기 속에서 가혹한 일제의 식민통치로부터의 자주독립을 목적으로 민족역량을 총 결집하면서 추진되고 있었다. 처음 천도교, 기독교, 불교 등 종교계와 각 전문학교 학생층에서 각기 따로 준비되던 3.1운동 계획은 “독립운동은 종파와 당파를 초월한 전민족적 운동이 되어야 한다.”는 이승훈의 주장이 제기되면서 민족대연합전선이 모색되고 있었다. 선생은 이 같은 주장에 적극 공감해 3.1운동이 민족대연합전선으로 발발하는데 기여했다. 그리하여 선생은 민족대표 33인의 한 분으로 선정돼 독립선언서에 서명하고, 1919년 3월 1일 태화관에서 민족대표들과 함께 독립선언식을 가졌다. 이 때문에 선생은 곧바로 일경에 피체돼 경무총감부에 구류됐다가 서대문형무소로 이감되어 2년 6개월 간의 옥고를 치렀다.


경성복심법원 판결문하지만 일제의 탄압은 선생의 인신(人身)을 구속할 수 있었을지언정 선생의 독립의지를 꺾지는 못했다. 선생은 경무총감부에서건, 재판정에서건, “피고는 조선독립운동을 한 것이 틀림없는가”하고 물으면, “그렇다”고 거침없이 대답하였다. “왜 독립을 하려고 하였는가”하고 물으면, “조선은 조선민족으로 통치하도록 하려고 생각하였다”고 하여 일제의 식민통치에 반대하면서 독립운동의 정당성을 주장했다. 그리고 “피고는 조선 독립이 될 줄로 생각하는가”하고 물으면, “그렇다. 될 줄로 생각한다”고 하여 민족독립에의 확고한 신념을 갖고 있음을 드러내곤 하였다. 나아가 “장래에도 또 독립운동을 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선생은 “그렇다. 독립이 될 때까지 할 생각이다”고 대답하였다고 한다.



# 신사참배 거부항쟁에 앞장서다


독립선언관계자 신석구 등 17인 만기출옥1921년 11월 4일 서대문형무소를 출옥한 선생은 당시 일제의 ‘문화정치’에 의한 민족분열정책에도 불구하고 목회활동과 항일운동을 계속했다. 선생은 원산 상리교회 목사(1921. 11 ~ 1925. 8), 강원도 고성구역장(1925. 9 ~ 1926. 8), 춘천읍교회 목사(1926. 9 ~ 1927. 8), 경기도 가평구역장(1927. 9 ~ 1928. 8)으로서 활동했고, 1928년 9월부터 1929년 8월까지는 서울 지방에서 부흥사업에 종사했다. 그리고 1930년대에 들어와 선생은 강원도 철원구역장 및 황해도 한포(汗浦)구역장(1929. 9 ~ 1931. 6), 강원도 이천구역 담임 겸 이안(伊安)지방 감리사(1931. 7 ~ 1935. 4), 충남 천안구역 담임 겸 천안지방 감리사(1935. 5 ~ 1939. 4)로서 활동했다. 그러던 중 선생은 1938년 7월 천안지방에서 신사참배 거부운동에 앞장 섬으로써 다시 한 번 항일운동의 깃발을 높이 들었다.


신석구 정치범 카드.일제는 1931년 본격적인 ‘황민화 정책’을 감행했다. 이에 따라 일제는 우리의 민족 정체성을 말살하기 위해 순차적으로 일본어 상용(1937. 3), 신사참배/(1937. 7), 황국신민 서사(1937. 10), 창씨개명1939. 11) 등을 강요하였다. 특히 신사참배문제는 감리교 목사이자 민족대표인 선생에게 있어 종교적 양심의 문제인 동시에 민족적 양심의 문제였다. 즉 일본 신도(神道)에 대한 신사참배는 선생에게 있어 종교적으로는 하나님을 배반하는 행위요, 민족적으로는 식민지 정책에 협력함으로써 조국과 민족을 배반하는 것으로 생각됐다. 결국 그것은 일제에 대한 투항과 친일로 해석될 수 있는 중대한 사안이었다. 때문에 당시 감리교단 지도부의 결정에 의해 신사참배를 행하던 분위기 속에서도 선생은 이를 단호하게 거부해 민족적, 종교적 양심을 지켜 갔던 것이다. 일제하에서 그 같은 거부항쟁은 일제의 가혹한 탄압을 동반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선생은 천안경찰서에 1938년 7월 피검돼 2개월 간 갖은 악형을 당하였고, 그로 말미암아 중병이 들어 석방됐다.


# 전승기원 예배와 일장기 게양 거부 등으로 투옥


신석구 동상석방 후에도 선생은 끝내 굴복하지 않고 1939년 5월 신사(神社)가 없는 지역인 평남 용강군 신유리교회의 담임으로 가서 항일운동을 계속했다. 즉 1941년 3월에는 조선 감리교회를 일본기독교단의 산하에 두고 일제의 침략전쟁에 호응하려는 감리교 통리자의 친일 배족행위에 반대하다가 강제 은퇴를 당하기도 했다. 그리고 같은 해 12월 일제의 태평양전쟁 도발 때에는 일경의 민족운동자 예비 검속 조치에 의해 1개월 이상 구금되는 고초를 겪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광복 직전인 1945년 5월에도 선생은 대동아전쟁 전승기원 예배 및 일장기 게양을 거부하다가 용강경찰서에 다시 피검되는 등 한시도 일제에 대한 항쟁을 멈추지 않았다.


광복 이후 선생은 북한지방에 남아 반공운동을 전개하다가 1946년 3.1절 기념 방송 사건, 1947년 3월 기독교민주당 비밀결사 사건으로 2차례 투옥됐다. 그리고 1949년 4월 진남포에서 반공비밀결사를 영도했다는 죄목으로 북한 중앙정치보위부에 다시 피검돼 10년 형을 선고 받았다. 그리하여 평양형무소에서 복역 중 국군의 평양탈환 직전인 1950년 10월 10일 공산군에 의해 총살 순국했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사진출처-국가보훈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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