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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서원 164] 두촌 박양무외 3인을 배향하는 '훈령서원(薰嶺書院)'
  • 이승준 기자
  • 등록 2023-01-15 08:2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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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준 기자] 1541년(중종 신축) 청도군 이서면 신촌리 훈령산 아래에 훈령서당을 지었다. 영남의 여러 사림에서 즐겨 글방을 찾아 문과 도의를 강론하고 후학을 육성하니 지역을 넘어 기호지방에 이르기까지 여러 유림들이 유문(儒門)의 창서(暢敍) 표치(標幟)로 흠모하고 칭송했다 한다. 


불행히 1592 선조 25년 임진왜란을 맞아 병화에 서당이 불타고 1623년 인조 계축년에 중창해 훈령서당을 훈령재로 바꾸고 1844년 헌종갑진년과 1908년 무신년의 중수를 거쳐 1971년 신해년에 다시 중건해 숭조(崇祖)에 노력하고 있다. 



매년 5월 5일에 회합을 가진다. 이를 고을 사람들이 부러워해 199년에 향도유림이 훈련재를 훈령서원으로 승호했다. 또 1845년 헌종을사년에 창건됐으나 1868년 고종5년 대원군의 서원훼철로 없어졌던 숭절사를 1986년 병인년에 다시 복설해 입향중조인 김천(金泉) 도독우(道督郵) 두촌(杜村) 선생과 학덕의 명성으로 숭앙됐던 화은(華隱), 호재(湖齋), 농암(聾巖) 선생 등 네분을 배향해 음력 3월 상정일에 춘향을, 9월 상정일에 추향을 올린다.

    

# 두촌(杜村) 박양무(朴楊茂)


자는 약생(若生), 호는 두촌이다. 고려 공민왕 때 선무랑(宣務郞)을 거쳐 김천(金泉) 도독우(道督郵)를 지냈다. 포은 정몽주 선생을 종유(從遊) 고려의 운명이 다함을 슬퍼해 벼슬을 버리고 만수산 골짜기로 퇴거했다. 뜻을 함께한 제현(諸賢)들과 은둔하다가 낙향해 화양 대성산에 은거하여 성학(聖學)을 강마(講磨) 후인을 양성했다. 정헌(正軒) 이종상(李鍾祥)의 봉안문에 공의 의열(義烈)은 야은(冶隱) 경곡(耕谷)과 짝이된다고 했다.

 


# 화은(華隱) 박계은(朴繼隱)


호는 화은이다. 세종 때 문학과 덕행으로 나라에서 추중(推重)되고 온 사림(士林)이 긍식(矜式)해 후학으로부터 더욱 존경됐다. 고계(高溪) 이휘영(李彙寧) 당향 조문에 ‘ 경학은 가문을 이었고 문아(文雅)한 풍조는 나라에 떨쳤네. 신안에 고려(古廬)를 정하시니 남쪽의 선비들이 선생의 인격을 표준으로 삼았네’ 라고 했다.

 

# 호재(湖齋) 박맹문(朴孟文)


호를 호재라 했다. 성종 때 순천(順天) 교수(敎授)로 직제학(直提學) 최연(崔淵)과 교유하면서 문명을 얻었다. 상향 축문에 ‘학문은 두루 소통했고 덕행은 돈독해 이륜(彛倫)을 밝혔네. 국왕이 교수에 임명하니 아름다운 은혜가 후인에 미치네’라고 했다.

 


# 농암(聾巖) 박란(朴鸞)


자는 운경(雲卿) 호는 농암(聾巖)이다. 중종 때 진사를 지내면서 향도 사림에 공헌한 업적이 현저했다. 1541년 신축년에는 향로당(鄕老堂) 현판과 향로당 기문을 쓰고 향규(鄕規) 18조를 지었다. 일찍이 삼족당 (三足堂) 김대유 (金大有) 선생과 경재(警齋) 곽 순(郭珣), 퇴계 이황, 남명 조식 선생과 문유하며 의례(儀禮)를 강론했다. 만념에는 이서 칠곡인 오수곡(吾守谷)에 정사를 지어 회양정거(晦養靜居)하면서 덕행을 펼쳤다. 고계의 당향 축문에는 ‘ 소학의 공을 떨쳐 대현(大賢)들이 그 덕에 감화되는 구나. 기미를 붙잡고 가슴을 풀어내니 그 은혜가 향숙(鄕塾)에 미치는 구나’ 라고 했다./사진출처-한국서원연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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