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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 구석 구석 148] 사육신묘 입산 동산에 있었던 ‘사충서원’
  • 박광준 기자
  • 등록 2023-01-13 22:45:21
  • 수정 2024-04-10 10:4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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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광준 기자] 사충서원은 경기도 하남시에 있는 조선후기 김창집 등 4인의 선현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한 서원으로, 1725년(영조 1) 노론 4대신인 김창집(金昌集).이이명(李頤命).이건명(李健命).조태채(趙泰采)를 제향키 위해 노론계 관료와 유생이 추진하고 국가의 보조에 의해 경기도 과천에 건립됐다.


이들 4대신은 경종 때 왕세제(王世弟 : 후일의 英祖)를 책봉하고 대리청정(代理聽政)을 하는 문제로 소론의 미움을 사서 1722년(경종 2) 노론계의 역모사건(신임옥사)에 연루돼 죽음을 당하였는데, 왕세제가 영조로 즉위한 뒤 노론정권이 수립되면서 신원(伸寃)되고 서원이 건립된 것이다.


건립과 동시에 국가로부터 사액을 받았다. 그러나 1727년의 정미환국(丁未還局)으로 소론정권이 들어서서 신임옥사를 역(逆)으로 번복하고 4대신을 다시 죄인으로 만들자 이 서원도 따라서 철폐됐다.


그 뒤 1740년의 경신처분(庚申處分)으로 4대신이 다시 충신으로 판정됐으나, 한동안 재건되지 않다가 소론세력이 완전히 몰락한 1756년에야 서원을 복설하고 사충서원이라 부르게 했다.


이와 같이, 이 서원은 노론.소론 사이의 시비여하에 따라 철폐와 복설이 거듭되는 우여곡절을 겪을 만큼 당색을 강하게 지니고 있었으나, 영조 이후의 역대 왕들이 모두 영조의 후손이었던 관계로 영조에게 충성을 다한 4대신의 서원이라 해 특별한 은전(恩典)을 받았다.


이에 따라 대원군에 의한 서원철폐 단행 때도 훼철되지 않고 존속됐다. 그 후 1927년 봄에 이 곳이 철도용지(鐵道用地)로 편입됨에 따라 당시 고양군 한지면 보광동(현재의 서울특별시 보광동)으로 이건했다가 6·25때 파괴됐다. 1968년 현재의 위치로 이건했고, 매년 봄.가을에 향사를 지내고 있다.



# 김창집(金昌集, 1648∼1722)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여성(汝成), 호는 몽와(夢窩). 좌의정 상헌(尙憲)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동지중추부사 광찬(光燦)이고, 아버지는 영의정 수항(壽恒)이며, 어머니는 호조좌랑 나성두(羅星斗)의 딸이다. 창협(昌協)·창흡(昌翕)의 형이다. 이른바 노론 4대신으로 불린다.


1672년(현종 13) 진사시에 합격했으나, 1675년 아버지 수항이 화를 입고 귀양 가자 과거 응시를 미뤘다. 1681년(숙종 7) 내시교관을 제수 받았고, 1684년 공조좌랑으로서 정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 정언(正言).병조참의 등을 역임했다. 1689년 기사환국 때 아버지가 진도의 유배지에서 사사되자, 귀향해 장례를 치르고 영평(永平)의 산중에 은거랬다. 1694년 갑술환국으로 정국이 바뀌어 복관되고, 병조참의를 제수 받았으나 사임했다. 다시 동부승지.참.·대사간에 임명됐지만 모두 취임하지 않았다. 그 뒤 철원부사를 제수 받았는데, 이 때 큰 기근이 들고 도둑이 들끓어 민정이 소란하자 관군을 이끌고 토평했다. 강화유수.예조참판.개성유수 등을 역임하고, 호조.이조.형조의 판서를 지냈다. 1705년 지돈녕부사를 거쳐 이듬 해 한성부판윤.우의정, 이어서 좌의정에까지 이르렀다. 1712년에는 사은사로 청나라에 갔다가 이듬 해 귀국, 1717년 영의정에 올랐다.


노론으로서 숙종 말년 세자의 대리청정을 주장하다가 소론의 탄핵을 받았다. 숙종이 죽은 뒤 영의정으로 원상(院相 : 나이어린 왕을 보필하던 재상급의 원로 관료)이 돼 온갖 정사를 도맡았다. 경종이 즉위해 34세가 되도록 병약하고 자녀가 없자, 후계자 선정 문제로 노론.소론이 대립했다. 이 때 영중추부사 이이명(李頤命), 판중추부사 조태채(趙泰采), 좌의정 이건명(李健命) 등과 함께 연잉군(延礽君 : 뒤에 영조)을 왕세자로 세우기로 상의해, 김대비(金大妃 : 숙종의 계비)의 후원을 얻었다. 이에 경종의 비 어씨와 아버지 어유구(魚有龜), 사직(司直) 유봉휘(柳鳳輝) 등의 격렬한 반대가 있었으나 결국 실행했다.


1721년(경종 1) 다시 왕세제의 대리청정을 상소해, 처음에 경종은 대소 정사를 세제에게 맡길 것을 허락했으나 소론의 격렬한 반대로 실패했다. 수개월 후 소론의 극렬한 탄핵으로 노론이 축출되고 소론 일색의 정국이 됐다. 곧 이어 소론의 김일경(金一鏡).목호룡(睦虎龍) 등이 노론의 반역 도모를 무고해 신임사화가 일어나자, 거제도에 위리안치됐다가 이듬 해 성주에서 사사됐다. 1724년 영조 즉위 후 관작이 복구됐다. 영조의 묘정(廟庭)에 배향됐다. 영조 때 과천에 사충서원(四忠書院)을 세워 이이명.조태채.이건명과 함께 배향했고, 거제의 반곡서원(盤谷書院)에도 제향했다. 저술로는 '국조자경편 國朝自警編' '몽와집' 등이 있다. 시호는 충헌(忠獻)이다.

 


# 이이명(李頤命, 1658∼1722)


조선 후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지인(智仁) 또는 양숙(養叔), 호는 소재(疎齋). 세종의 아들 밀성군(密城君)의 6대손으로, 할아버지는 영의정 경여(敬輿)이고, 아버지는 대사헌 민적(敏迪)이며, 어머니는 의주부윤 황일호(黃一皓)의 딸이다. 작은아버지 지평 민채(敏采)의 양자로 들어갔다.


1680년(숙종 6) 별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해 홍문관정자로부터 벼슬살이를 시작했다. 그 뒤 홍문관의 박사.수찬.교리.응교, 사헌부지평, 사간원헌납, 이조좌랑, 의정부사인 등을 역임하면서 송시열(宋時烈).김석주(金錫胄) 등의 지원 아래 이선(李選).이수언(李秀言) 등과 함께 노론의 기수로 활약했다. 1686년 사헌부의 집의로 있으면서 문과 중시에 병과로 급제, 이듬해 1월 강원도관찰사에 특제(特除)됐다. 그리하여 강원도관찰사로 나간 지 8개월 만에 승정원의 승지가 되는 남다른 승진을 거듭했다. 그러나 1689년 기사환국으로 영해로 유배됐다가 남해로 이배되는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유배생활 5년 만에 갑술옥사가 일어나 호조참의로 조정에 돌아온 뒤, 승지를 거쳐 1696년(숙종 22) 평안도관찰사로 뽑혔지만, 늙은 어머니의 병을 이유로 극구 사절하고 강화부유수로 나갔다. 


그러다가 2년 만에 대사간이 되어 돌아왔다가 형 사명(師命)의 죄를 변호하다가 다시 공주로 유배되고 말았다. 이듬 해 2월 유배는 풀렸으나, 2년 동안 기용되지 못하다가, 1701년 예조판서로 특임됐다. 이어 대사헌.한성부판.이조판서.병조판서 등을 거쳐 1706년 우의정에 올랐다. 그리고 1708년 숙종의 신임을 한 몸에 받으면서 좌의정에 올라 세제(世弟 : 뒤의 영조)의 대리청정을 추진하다 실패해 다시 남해로 유배되기까지, 15년 동안을 노론 정권의 핵심적 존재로 활약했다. 이 동안 숙종의 죽음으로 고부사(告訃使)가 되어 연경(燕京)에 갔을 때, 독일신부 쾨글러(K─ gler, I.)와 포르투갈신부 사우레즈(Saurez, J.) 등과 교유하면서 천주교와 천문, 역산에 관한 서적을 얻어와 이를 소개했다고 전한다.



1721년(경종 1) 세제의 대리청정이 실패하자, 주모자 김창집(金昌集) 등과 함께 관작을 삭탈당하고 남해에 유배돼 있던 중, 목호룡(睦虎龍)의 고변으로 이듬해 4월 서울로 압송, 사사(賜死)됐다. 공주에 우선 안장됏다가, 1725년(영조 1) 복작되면서 임천 옥곡(玉谷)에 이장됏다. 그리고 영조의 지시로 한강가에 사우(祀宇)가 건립됐다. 저서로는 시.문을 엮은 '소재집' 20권 10책, '양역변통사의 良役變通私議'와 '강역관계도설 疆域關係圖說' '강도삼충전 江都三忠傳' 등이 있다. 시호는 충문(忠文)이다.

 

# 조태채(趙泰采, 1660∼1722)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양주(楊州). 자는 유량(幼亮), 호는 이우당(二憂堂). 존성(存性)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형조판서 계원(啓遠)이고, 아버지는 괴산군수 희석(禧錫)이다. 어머니는 백홍일(白弘一)의 딸이다. 태구(泰耉)의 종제이며, 태억(泰億)의 종형이다.


1686년(숙종 12) 별시문과에 종형 태구와 함께 병과로 급제했다. 내직으로 승문원의 정자.저작.박사와 성균관의 전적.직강, 사헌부의 감찰.지평.대사헌, 사간원의 정언.헌납.대사간, 홍문관의 수찬.교리, 승정원의 동부승지, 장례원의 판결사, 한성부의 판윤, 그리고 육조의 판서, 좌참찬 겸 판의금부사 등을 거쳐, 1717년 좌의정에 이르고 판중추부사에 전직했다. 외직으로는 옥구현감.공주목사.평안감사 등을 역임했다. 1713년 동지사(冬至使)로, 1720년(경종 즉위년) 사은사(謝恩使)로 두 차례 청나라에 다녀온 바 있다. 그는 도량이 크고 사려가 깊으면서 해학을 즐겨 담론을 잘 했고, 풍채가 썩 훌륭했다고 한다.


족질이 대부분 소론에 기운 데 반해, 유독 노론에 머물렀다. 그는 당시 공론(公論)의 부재 현상을 통렬히 비판했고, 당론에 대해서도 비판적 입장을 취했다. 윤선거(尹宣擧)의 문집을 훼판(毁板)하고 이어 그를 배향하던 서원까지 훼철하려 하자, 은액(恩額)만을 철회한다면 다른 일반 향사(鄕祠)와 다를 바 없이 되고, 또 향사는 조정에서 간섭할 바가 아닌 것을 들어 은액만을 철회할 것을 왕에게 진언, 이를 관철시켰다.


이는 당시 정언 성진령(成震齡)의 논핵(論劾)을 받게 되기는 했으나, 후일 성진령이 후회한 것으로 보면, 당시 정국의 상황을 잘 이해하고 있던 그의 식견에서 나온 처사라 할 것이다.



경종이 즉위한 후 정국이 더욱 혼란해져가는 가운데 정언 이정소(李廷熽)의 건저상소(建儲上疏)를 채택, 영의정 김창집(金昌集), 판부사 이이명(李頤命), 좌의정 이건명(李健命), 호조판서 민진원(閔鎭遠) 등과 함께 1721년 연잉군(延礽君 : 뒤의 영조)의 세제책봉을 건의, 실현시켰고, 이어 세제의 대리청정까지 이르게 했다. 그러나 소론인 우의정 조태구의 지휘를 받은 사직(司直) 유봉휘(柳鳳輝)의 건저반대소(建儲反對疏)와 좌참찬 최석항(崔錫恒)의 대리청정 환수(還收)를 청하는 소 등 소론의 적극적인 반대로 대리청정의 명이 철회되고 건저를 주장했던 노론세력이 대거 정계에서 제거되기에 이르렀다. 특히 이 해 전 승지 김일경(金一鏡)이 올린 노론 4대신 축출의 소가 승정원에서 채택돼 판중추부사로 있던 그도 그 중 한 사람으로 진도에 유배되고 다음해 적소에서 사사됐다. 1725년(영조 1) 우의정 정호(鄭澔)의 진언으로 복작(復爵)됐다. 절도(絶島)에 나눠 유배되었던 자녀들도 모두 풀려나게 됐다.


그는 조정의 공론이 땅에 떨어지고 함묵(含默)이 성풍(成風)이 되어가는 실정을 크게 문제삼았고, 민생의 사활이 달려 있다고 할 수 있는 수령의 현부(賢否)를 중요시했다. 특히 수령의 어질고 못됨을 가리고 백성의 질고를 살피며, 진휼 상황을 감독하는 등 경외(京外)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가까이 모시는 신하 중에서 명망이 있는 자로 하여금 어사로 삼아 파견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주장. 빈번한 어사의 파견은 비용만 낭비하고 감사와 수령의 처지를 손상시킨다 해 절제할 것을 건의했다. 그는 노론 4대신의 한 사람으로 다양한 경력이 말하듯, 정적도 추종자도 많다. 그렇지만 어느 한쪽에 크게 기울어짐이 없이 끝까지 대의를 따르려 하여 세인의 칭송을 얻었다. 과천의 사충서원(四忠書院)과 진도의 봉암사(鳳巖祠)에 제향됏다. 저서로 '이우당집'이 있다. 시호는 충익(忠翼)이다.

 

# 이건명(李健命, 1663∼1722)


조선 후기의 문신. 노론사대신(老論四大臣)의 한 사람이다.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중강(仲剛), 호는 한포재(寒圃齋). 유록(綏祿)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영의정 경여(敬輿)이고, 아버지는 이조판서 민서(敏敍)이며, 어머니는 정승 원두표(元斗杓)의 딸이다.


1684년(숙종 10) 진사시에 합격하고 1686년 춘당대 문과에 을과로 급제, 설서(說書)에 임명되고 수찬(修撰).교리.이조정랑.응교(應敎).사간을 역임했다. 1698년 서장관(書狀官)으로 청나라에 다녀온 뒤 우승지.대사간.이조참의.이조판서 등의 요직을 두루 거쳤다.



1717년 종형 이이명(李頤命)이 숙종의 뒤를 이을 후계자 문제로 숙종과 단독 면대했던 정유독대(丁酉獨對) 직후, 특별히 우의정에 발탁돼 왕자 연잉군(延礽君 : 뒤의 영조)의 보호를 부탁받았고, 숙종상(肅宗喪)에 총호사(總護使)로서 장례를 총괄했다.


이어 경종 즉위 후 좌의정에 승진해 김창집(金昌集).이이명.조태채(趙泰采)와 함께 노론의 영수로서 연잉군의 왕세자 책봉에 노력했으나, 이로 인해 반대파인 소론의 미움을 받았다. 1722년(경종 2) 노론이 모역한다는 목호룡(睦虎龍)의 고변으로 전라도 흥양(興陽)의 뱀섬〔蛇島〕에 위리안치됐다.


그러다가 앞서 주청사로 청나라에 가 있으면서 세자 책봉을 요청하는 명분으로 경종이 병이 없음에도 위증(痿症 : 양기가 없어 여자를 가까이 하지 못하는 병)이 있다고 발설했다는 죄목으로 소론의 맹렬한 탄핵을 받아 유배지에서 목이 베여 죽임을 당했다.


재상으로 있을 때 민생에 깊은 관심을 보였고, 특히 당시의 현안이던 양역(良役) 문제에 있어서 감필론(減疋論 : 군포 2필을 1필로 감하자는 주장)과 결역전용책(結役轉用策 : 수령이 私用으로 쓰는 田結雜役價를 전용해 감필에 따른 부족한 재정을 보충하자는 방책)을 주장해, 뒷날 영조 때의 균역법 제정에 큰 영향을 미쳤다. 시문에 능하고 송설체(松雪體)에 뛰어났다. 송시열(宋時烈)을 학문과 정치의 모범으로 숭배했고, 김창집 형제 및 민진원(閔鎭遠).정호(鄭澔) 등과 친밀했다. 1725년(영조 1) 노론 정권 하에서 신원돼 충민(忠愍)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과천의 사충서원(四忠書院), 흥덕(興德)의 동산서원(東山書院), 나주의 서하사(西河祠)에 제향됐다. 저서로 시문과 소차(疏箚)를 모은 '한포재집' 10권이 전한다.


근래 자리를 옮겨 세운 탓에 강당, 동재, 서재, 장판고, 서고, 제기고, 고사, 누각 등 서원을 구성하는 건물들이 모두 생략되고, 단지 제사를 지내는 사당과 삼문만 복원됐다. 사당과 삼문이 남향으로 배치됐고, 서원 남쪽 가까운 곳에 수복청(守僕廳)이 위치하고 있다. 사당에는 4대신의 영정과 위패가 봉안됐다. 삼문 오른쪽 앞에는 서원과 함께 옮겨온 묘정비가 있다. 삼문을 들어서면 정면 4칸, 측면 2칸의 사당이 있다. 사당은 맞배지붕으로서 정면에 사충서원이라는 원액이 걸려있다./사진출처/(사) 한국서원연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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