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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서원 162] 길재의 위패와 영정을 봉안한 ‘청풍 서원(淸風書院)’
  • 이승준 기자
  • 등록 2023-01-13 11:15:05
  • 수정 2023-01-13 11:17: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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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준 기자] 청풍서원은 충남 금산군 부리면 불이리에 있는 서원으로, 1678년(숙종 4)에 길재의 청절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청풍서원(淸風書院)은 1678년(숙종 4)에 창건하였는데 서원철폐령으로 1868년(고종 5)에 훼철되었다가 1979년에 복원했다. 길재(吉再)를 추모하는 서원으로 충남 지정 문화재 자료 제16호이다.


그 뒤 1976년과 1979년에 군의 지원으로 복원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경내의 건물은 청풍사(淸風祠), 신문(神門), 청풍서원(淸風書院), 백세청풍비(百世淸風碑), 비각(碑閣), 지주 중류비(砥柱中流碑) 등이 있다. 백세청풍비(百世淸風碑)는 은나라 충신 백이와 숙제의 청풍은 백세에 영원하라는 뜻이다. 지주 중류비(砥柱中流碑)는 지주(砥柱)란 중국의 허난성 황하 중류에 있는 산을 말하며 황하강이 범람해도 지주산은 쓰러지지 않는다는 길재 선생의 충절을 비유한 것이다.


충절공 야은 길재(忠節公 冶隱 吉再 1353~1419)는 목은 이색(牧隱 李穡), 포은 정몽주(圃隱 鄭夢周)와 함께 고려 삼은(高麗 3隱)이라 한다. 이색, 정몽주, 권근 등에게 학문을 배웠고 이방원과 친분이 두터웠다. 이방원이 태종이 되어 태상박사(太常博士)로 불렀으나 길재는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 하며 거절했다. 그리고 이 동네 이름이 원래 부리(富利)였는데 불이(不二)라고 고쳐 불렀다.


유명한 회고시에~ "오백 년 도읍지를 필마로 돌아드니, 산천은 의구한데 인걸은 간데없네, 어즈버 태평연월이 꿈이런가 하노라"가 있다.





사우에는 길재의 영정과 위패가 봉안돼 있다. 강당은 마루와 양쪽 협실로 돼 있는데, 원내의 여러 행사와 유림의 회합 및 학문강론장소로 사용되고 있다.


이 서원에서는 매년 9월 15일에 향사를 지내고 있다. 


# 청풍사 


1984년 5월 17일 충청남도 문화재자료로 지정됐다. 충청남도 금산군 부리면(富利面) 불이리에 있다. 조선 초부터 건립을 추진하다가 1741년(영조17)에 지방 유림과 군수에 의해 건립, 길재의 영정과 위패를 봉안했다. 


금산군에 남아 있는 사당 가운데 가장 오래됐다.1871년(고종8)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성곡서원이 훼철되자 배향되던 충간공 김신을 이곳으로 옮겨 추배했고, 1904년(고종 41) 지방 유림과 전라북도관찰사이용식의 지원으로 중수했다. 


김신은 1946년 황풍사 건립과 동시 이배하고 청풍사는 길재를 단향으로 해마다 봄과 가을에 향사한다.



총면적 5482㎡로, 정면 3칸 측면 2칸이다. 1976년과 1979년에 보수했고 1990년 5월 29일 보호구역으로 지정했다.


청풍사는 서원을 개설하고 길재의 충절과 도덕을 이을 인물을 양성했고, 원래 마을 이름도 부리이던 것을 길재의 불사이군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불이로 고쳤다고 한다. 청풍사 앞에는 불이유허비와 백세청풍비가, 마당에는 지주중류비가 건립돼 있다.


길재는 1374년 생원시에, 1383년(우왕 9) 사마감시(司馬監試)에 합격했다. 1388년에 순유박사(諄諭博士)를 거쳐 성균박사로 승진했다. 1390년 계림부(鷄林府)의 교수가 제수됐으나 부임하지 않았다.태종이 태상박사(太常博士)에 임명했으나 두 임금을 섬기지 않겠다는 뜻을 밝히면서 거절했다. 


이후 고향 선산에 내려와 후진양성에 힘썼다. 세상의 영달에 뜻을 두지 않고 성리학을 연구하였기 때문에 가르침을 얻으려는 학자가 줄을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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