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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금의 여행이야기 1]홍성 월백산과 홍주를 구한 ‘홍가신의 자랑스런 구국정신’
  • 윤여금 기자
  • 등록 2023-01-11 09:02:00
  • 수정 2023-03-02 11:4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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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여금 기자] 이몽학의 난은 왜란의 혼란 속에서 1596년 7월 6일 (선조 29), 충청도 홍산현 무량사에서 일어난 사건으로 임진왜란 와중에 벌어진 반란 중 최대 규모였다. 이들은 불과 며칠만에 관아를 습격하고 이어 임천, 정산, 청양, 대흥을 연이어 점령하고 서울로 가는 요충지 홍주읍성을 공격해 위기에 처한 목사 홍가신은 소수의 병력만이 남아 있어 홍주읍성이 위태롭게 처하게 된다. 


이때 임득의는 1956년 7월 7일 가솔과 지역민 800 여 명과 무장 박명현과 홍가신을 도와 함께 선봉을 담당했다. 홍가신을 비롯 임득의, 박명현, 최호, 신경행 등 청난 공신의 투철한 충절의 정신으로 짧은 기간에 반란군을 진압한 이 위세를 지켜본 당세의 백성들은 청난 5공신을 신으로까지 호칭했고, 그 흔적이 오늘날에 전해져 정월 초하루 아침에 백월산의 정상에 있는 산신각에 올라 소원을 비는 풍습이 남아있다.


청난 5공신이 있었기에 왜란 중에 큰 반란을 홍주의 중심도시 홍성에서 평정하고, 옳지 못한 불의에 저항하는 자랑스러운 고장의 정신적문화유산이라 생각한다.

  

백월산에서 바라본 홍성군 전경 홍주의 수호신이 된 홍주목사 홍가신(1541~1615) 본관은 남양(南陽), 자(子)는 홍도, 호는(만전당晩全堂), 시호는 문장이며, 어린시절을 충무공 이순신, 1545~1607)함께 보냈다. 


1571년(선조 4)에 강릉참봉으로 출사해 여러 관직을 거쳐 1594년 (선조 27)에 홍주목사로 부임해 약 5년 동안 머물렀다.


1596년 (선조 29)에 이몽학 난을 평정한 공으로 1604년(선조 30) 청난공신 1등에 책록됐고 영원군에 봉해졌고, 벼슬은 강화부사, 형조참판, 강원도관찰사, 개성부유수, 한성부우윤 겸 지의금부사 등을 거쳐 1610년 (광해군 2) 형조판서까지 지냈다.


저서 '만전집晩全集과 만전당만록' 등이 있고, 아산의 인산서원과 온양의 정퇴서원에 배향됐다.

 

홍가신(洪可臣)에게는 5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넷째아들인 홍비는 충무공 이순신의 딸과 결혼해 이순신의 집안과 사돈을 맺었고, 홍가신의 손자 홍우정(1595~1656)의 딸은 임득의의 손자 임진교와 결혼해 임득의의 집안과도 사돈을 맺었다.

 

해동지도, 보물제1591호 조선후기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소 복제품.조선후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지도로 공주, 청주, 홍주 등 충청도 각 군현과 산천들을 그렸고 속리산과 계룡산은 따로 주기했다. 지도 동남쪽에는 충청도 각 군현과 서울과의 거리를 기록했는데, 이몽학의 반란군이 일어났던 홍산과 홍주와의 거리는 120리 약 48km)로 적었다.


홍가신청난비(洪可臣淸亂碑), 홍가신청난비(洪可臣淸亂碑)는 충청남도 홍성군 홍성읍 월산리 월백산 기슭에 소재. 1984년 5월 17일 충청남도의 문화재자료 제165호로 지정.홍가신청난비(洪可臣淸亂碑)


임진왜란이 일어난 후 민심이 동요된 틈을 타서 왕의 서자인 이몽학이 조선 선조 30년(1597)에 반란을 일으켜 홍주성을 쳐들어와, 당시 홍가신은 홍주목사로 있으면서 난을 평정했고, 그 공으로 청난공신(淸難功臣) 1등에 봉해졌다. 비는 인조 19년(1641)에 세웠졌으나, 파손된 것을 1973년 홍성군수가 보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1598년(선조 31년) 11월. 7년 동안의 임진왜란이 끝난 이후 (선조 재위 1567~1608)에는 지난 7년간의 전란 중에 공훈자를 회계해 대대적으로 공신을 봉하도록 했다. 이 때 봉해진 공신들은 세 종류로 각 공신을 3등급으로 나눠 차등있게 내렸다.


1604년 (선조 37년)6월 25일에 정하고 10월 29일 대대적으로 호성공신 86명, 선무공신 18명과 함께 청난공신 5명을 봉했는데, 청난공신 1등에는 홍가신. 2등 박명현과 최호, 3등 신경행과 임득의가 선정됐다. 


또한 청난공신을 도와서 공을 세운 이들한테 조정에서는 1605년 (선조 38년) 4월 16일 ‘청난원신공신’으로 봉했는데, 여기에는 청난공신 3등에 녹훈된 임득의의 형제들과 아들, 조카들과 함께 955명이 녹훈됐다.

 

홍주청난사(洪州淸難祠), 홍주읍 월산리 월백산 기슭에 소재.홍주청난사(洪州淸難祠


(洪州淸難祠)는 홍주읍 월산리 월백산 기슭에 소재한다. 이몽학 난을 진압한 청난 5공신의 위패를 모신 곳으로 매년 음력 3월 20일에 청난 5공신의 넋을 기리는 제사를 지낸다.

 




홍후만전묘(洪侯晩全廟), 홍후만전묘(洪侯晩全廟)는 홍성읍 월산리 월백산 정상 소재.홍후만전묘(洪侯晩全廟)


홍후만전묘(洪侯晩全廟)는 홍성읍 월산리 월백산 정상 소재한다.


이몽학의 난을 진압한 홍주목사 홍가신을 민간에서 모시는 사당으로 홍가신 목사가 떠난 이후 위기가 닥칠때마다 이곳에서 제를 지내면 평화가 찾아왔다는 전설이 있다. 이러한 이유로 홍성에서는 매년 정월 길일에 제사를 지내고 있다고 한다.


사당 내부에는 월백산신과 홍가신 다섯분의 가족상이 있고, 그옆으로 홍가신을 비롯 청난 5공신 위폐를 모신 사당. 공식적인 명칭은 홍후만전묘(洪侯晩全廟)라 한다.


특히 선반 아래에 있는 ‘맷돌바위’는 정초에 사람들이 찾아와 소원을 비는 바위로 새해 소원을 말하며 작은 돌을 맷돌 돌리듯 돌려서 달라 붙으면 소원이 성취된다는 신호라고 한다.

 

월백산 마을의 어떤 주민은 “월백산 마을에 1년에 16번의 악상이 발생해 이 사당에서 제를 지낸 후부터는 더욱 더 조심하는 삶의 자세로 바뀌면서 이 마을에 악상이 없어진 이유로 말이암아 매년 2월 1일에는 제를 지내고 있다.”고 말했다.

 월백산 정상에 있는 코끼리 바위코끼리 바위


옛날에 이 코끼리 바위 밑에서 쌀이 나왔다고 한다. 매일 한 끼 분량의 쌀이 쏟아졌는데, 바위 주변에 사는 할머니만 쌀을 받을 수 있었다. 한 끼의 쌀만으로도 감사하며 만족했던 할머니는 욕심이 생겨 쌀이 부족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쌀을 더 받기위해 할머니는 구멍 밑에다 바가지를 대고 산신령에게 정성껏 기도를 했지만 한끼 분량의 쌀만 나왔다. 화가 난 할머니는 부지깽이로 쌀이 나오는 구멍을 쑤셨고 구멍은 점점 메워졌다. 할머니는 완전히 메워진 구멍을 쑤시다가 숨을 거두고 말았다.


월백산 정상에 있는 이 코끼리 바위는 분수에 넘치는 욕심은 파멸을 낳는다는 교훈을 전해주면서 오가는 사람들을 내려다보고 있다.

  

월백산 정상에 선녀가 내려와 놀았다는 자리 월백산 정상에 선녀가 내려와 놀았다는 자리


옛날에 하늘에서 선녀가 백월산에 내려와 놀았는데, 그 내려 앉은 자리에  풀이 나지 않았다고 하며, 선녀가 다시 내려올 때를 기다리고 있다고 전한다. 이 곳은 예쁜 딸을 낳고 싶어하는 사람이 이곳에 선녀같이 예쁜딸을 낳게 해달라고 소원을 빌면 소원성취 된다고 전한다.


홍가신 청난공신 교서(洪可臣 淸難功臣 敎書), 보물 제1815호 1604년홍가신 청난공신 교서(洪可臣 淸難功臣 敎書), 보물 제1815호 1604년, 전체-가로 193* 세로 43cm 아산 홍가신 기념관


1604년(선조 37)10월 작성된 문서로 임진왜란 중 발행한 이몽학의 난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운 5명의 공신에게 내린 공신교서로 본 문서는 청난공신 1등에 봉해진 홍가신에게 내린 교지로좌측에 임금의 도장인 시명지보(施命之寶)가 찍혀있다.


 

홍가신 추증 교지(洪可臣追贈敎旨), 보물 제1815호 1615년 가로 71.5 *세로 68cm 아산 홍가신 기념관1615년(광해군 7)7월 24일 작성한 교지로 동년 6월 14일에 세상을 떠난 ‘분충출기합모적의청난공신(奮忠出氣合謀迪毅淸難功臣) 숭정대부(崇政大夫)영원군 치사 홍가신을 대광보국숭록대부(崇祿大夫)의정부 우의정 겸영경연사 김춘추관사 세자부(議政府右議政兼領經筵事金春秋館事世子傅) 영원부원군(鈴原府院君)으로 추봉(追封) 한다.’ 내용의 추증 교지이다. 연호에 임금의 도장인 ‘시명지보(施命之寶)’가 찍혀있고, 그 옆에‘친공신추증사(親功臣追贈事)’라고 쓰여있다.

 


삼인보검(三寅寶劍)


삼인보검(三寅寶劍), 1590년 추정 전체-길이 68cm 검-길이 67.5cm, 군산시 향토문화 제2호 군산근대역사박물관최호가 선조에게 하사받은 호신용 검으로 삼인보(三寅寶)란 인년(寅年), 인월(寅月), 인일(寅日)에 만들었다는 것을 뜻해 1590년 (선조 23)에 제작한 것으로 추정한다. 검신(劍身)에는 북두칠성(北斗七星)과 함께 ‘삼인보검(三寅寶劍)’이 새겨져 있고, 그 아래에 병서(竝書)로 ‘호신(護身)’, ‘장령(將令)’, ‘부(符)’가 새겨져있다./사진-윤여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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