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메일전송
[독립유공자를 찾아서 45] 까치성 전투에서 피체돼 순국한 '이강년'
  • 이승준 기자
  • 등록 2023-01-09 00:03:39
  • 수정 2023-01-13 11:52:10

기사수정

[이승준 기자] 이강년 李康秊, 1858.12.30 ~1908.09.19. 경상북도 문경, 대한민국장 1962


한평생 이 목숨 아껴본 바 없었거늘 죽음 앞둔 지금에서야 삶을 어찌 구하려 하나만 오랑캐 쳐부술 길 다시 찾기 어렵구나 이 몸 비록 간다고 해서 넋마저 사라지랴 - 선생이 옥중에서 남긴 시


# 동학군 투신, 후일 의병항쟁에 필요한 전략자원을 구축


이강년(李康秊, 1858. 12. 30 ~ 1908. 10. 13) 선생의 본은 전주이며 철종 9년 1858년 12월 30일 경상북도 문경군 가은면 도태리에서 아버지 이기태와 어머니 의령 남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자는 낙인(樂仁)이며 호는 운강(雲崗)이다. 선생은 두 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백부의 집에서 자랐고, 장성함에 따라 기골이 점차 장대해져 키가 여덟 자가 넘었고 눈빛은 불이 넘치는 것 같아 위엄이 넘쳐 흘렀다고 한다. 선생은 1880년 무과에 급제해 선전관(宣傳官)에 임명돼 벼슬길에 올랐으나 1884년 갑신정변 후 물러나 고향에 은거하였다. 향리에서 은거하면서 학문에만 열중하던 선생은 1894년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자 동학군에 투신했다. 이때 휘하에서 농민군으로 활약하면서 심산유곡을 누볐던 많은 농민들이 후에 의병항쟁에 가담하게 됐고 보급조달, 지형탐색, 현지 정보망 구축과 같은 의병항쟁에 있어 긴요한 전략자원을 구축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1894년에 청일전쟁, 갑오개혁에 이어 1895년 8월 명성황후시해, 단발령 등 일련의 사건으로 인해 을미의병으로 알려진 의병전쟁이 시작됐다.


이강년 홍패

특히, 단발령은 전국의 재야 유생들을 분개시켜 전쟁의 직접적 불씨가 됐다. 이때 선생은 다시 군사를 일으켜 일인들을 소탕하고자 결심했다. 제천에 유인석 의진이 형성됐다는 말을 듣고 1896년 2월 23일 자신의 가산을 흩어 군사들을 모집했고, 출생지인 문경에서 거의해 왜적의 앞잡이며 양민을 토색질하던 안동관찰사 김석중 등 3명을 생포해 농암시장에서 이들의 반역행위와 토색질한 죄상을 낱낱이 들추며 효수(梟首)했다.


# 유인석 의병진의 유격장으로 활동하다


선생은 의병을 거느리고 안동의 창의대장 권세연을 만나 군사상의 문제를 의논했고, 제천으로 가서 의암 유인석 선생을 찾아 사제의 예를 표하고 의진에 합류했다. 당시 영남유림의 거두인 화서 이항로의 정맥을 이은 유인석 선생은 위정척사 사상을 실천에 옮긴 유학자로 1895년 명성황후 시해사건이 발생하자 같은 해 11월 28일 서상열, 이춘영, 안승우 등으로부터 의병대장에 추대됐을 뿐 아니라 일제의 국권침탈 직후에 많은 의병들과 유생들에게는 정신적인 버팀목이었다.


이강년 생가지무장 출신으로 유림과 간격이 있던 선생은 유인석 선생의 문하에 들면서 의병활동의 사상적 기반을 더욱 굳게 했던 것으로 보인다. 선비들을 중심으로 조직된 당시의 의진들은 아무래도 전투력이 취약했고 유인석의 제천 의진 역시 이러한 고충을 겪고 있었으니 무장으로 실전경험까지 갖춘 선생의 참여는 유인석을 고무시키기에 충분했다. 유인석 의병진의 유격장이 된 선생은 1896년 3월 17일 전군장 홍대석과 함께 군사 6초(哨)를 거느리고 수안보의 병참을 공격했고, 이후 9초(哨)를 거느리고 중군 윤기영과 함께 문경 평천으로 진군했다. 그러나 같은 해 4월 제천 의진이 장기렴이 거느린 관군에게 패하자 유인석은 요동으로 건너갔다. 이때 선생은 후군장(後軍將)을 맡아 유인석의 뒤를 좇아 압록강을 거쳐 만주로 들어가고자 했으나 영월에서 진로가 막혀 소백산으로 후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소백산으로 들어간 선생은 보급이 어렵고 이탈자가 늘어나 의진을 유지하기가 어려워지자 일단 의병을 해산하고 단양 금채동에 은신했다.


의병활동에 따른 문집을 정리하면서 지내던 선생은 1897년 4월 요동으로 들어가 유인석을 비롯한 여러 의병장을 만나 장백, 무송, 즙안, 임강 등에서 이주민 자치단체를 결성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그러나 선생은 고국으로 돌아가서 백성들에게 항일의식을 불어넣고 이를 기반으로 직접 적과 부딪혀 싸우면서 국가의 안녕과 왕실의 권위를 되찾아야 한다는 소신을 갖고서 그 해 7월 다시 단양으로 돌아왔다.


운강집 표지# 의병전술에 관해 실전경험을 바탕으로 속오작대도를 만들다


단양 금채동에 은신 중에 선생은 자기 수양과 학문연구를 했는데 그 가운데 특히 의병 전술에 관해 실전경험을 바탕으로 속오작대도(束伍作隊圖)를 만들어 훗날 전투에서 위력을 발휘했다. 선생의 친필로 남아있는 속오작대도는 의병조직도, 행진법, 진격과 후퇴요령 등이 수록됐다.


한편 러일전쟁을 승리로 이끈 일본은 1905년 11월 17일 일본 공사로 하여금 친일대신들을 앞세워 수차에 걸쳐 광무황제를 협박했고, 불법적으로 을사조약을 체결하고 본격적으로 외교권 등 국권탈취에 나섰다. 이를 계기로 나라를 구하려는 백성들이 뭉쳐 전국 각지에서 다시 의병이 활발하게 일어났고, 1907년 군대의 해산은 당시 의병항쟁에 기름을 부은 격이 됐다. 즉, 해산된 군인들이 대부분 의병부대에 합류해 의병으로 전환했던 것이다. 이로 인해 의병의 군사력이 크게 강화됐다.


나라가 위기에 처함을 좌시할 수 없던 선생은 1907년 3월 유인석과 상의한 후, 강원도 원주, 횡성 등지에서 군사를 소모(召募)해 재거의 했다. 같은 해 6월에는 원주읍의 무기고를 열어 병장기를 거두고 군사를 모아 군세를 확충했다. 이어 같은 해 7월 제천읍으로 진군, 군대해산에 반대해 원주 진위대를 이끌고 봉기한 민긍호 의진, 조동교, 오경묵, 정대무 의진 등과 연합해 제천전투에서 500여 명의 적을 토멸하는 혁혁한 전과를 올렸다.


속오작대도(束伍作隊圖)# 광무황제로부터 도체찰사 임명을 받다


이와 같은 소식을 전해들은 광무황제는 선생을 도체찰사(都體察使)에 제수하며 다음과 같은 비장한 밀조를 내렸다.


“아! 나의 죄가 크고 악이 충만하여 황천이 돌보지 않으시니, 이로 말미암아 강한 이웃이 틈을 엿보고 역적 신하가 권세를 농락하여 4천 년을 내린 종묘 사직과 3천 리 넓은 강토가 하루 아침에 오랑캐의 지역이 되었도다. 생각하면 나의 실낱 같은 목숨이야 아까울 것이 없으나 종묘 사직과 만백성을 생각하니 이것이 애통하도다. 선전관 이강년으로 도체찰사를 삼아 지방 4도에 보내니 양가(良家)의 재주 있는 자제들로 각각 의병을 일으키게 하며 소모장(召募將)을 임명하되 인장과 병부(兵符)를 새겨서 쓰도록 하라. 만일 명을 좇지 않는 자가 있으면 관찰사와 수령들을 먼저 베이고 파직하여 내쫓을 것이며, 오직 경기(京畿) 진영의 군사는 나와 함께 사직에 순절할 것이다.”


제천향교 전경

# 도창의대장에 추대되다


제천향교 전경제천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후 구름같이 모여든 40여진이 제천에서 선생을 도창의대장으로 추대했다. 도창의대장으로 추대된 선생은 제천 백묘에서 진을 치고 원주 민긍호, 청풍진 조동교와 연합해 충주의 일본군을 공격하기로 약속했다. 충주는 군사상 요충지로 이곳의 공략은 의병활동의 거점 마련이라는 의미가 있었다. 그리하여 7월 15일 행군을 시작해 충주를 치고자 산하의 의진을 풀어서 작전을 실시했으나 각 의진이 시기를 놓쳐 충주 진격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한편, 선생은 틈을 내어 [국수원류(國讐源流)], [군계 12귀], [통고문(通告文)] 등을 지어 군율을 가다듬었고 이어 일제 앞잡이 김기찬과 일진회 회원 김상호를 총살해 친일매족행위를 징계했다. 원주에서 탄환을 보충해 전력을 보강시켰고, 이때 공을 세운 이만원을 도총독장, 권용일을 우군 선봉장에 임명했다. 8월 3일 선생의 군사들은 주흘산 아래에 있는 혜국사 승려들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고 용기 백배해 갈평으로 진격해 적을 쳐부수고 총과 탄환, 투구 등을 노획했다. 이튿날 다시 갈평에 나아가 순검 1명을 총살하고 달아나는 적을 추격하여 괴성에서 일본군 육군소좌 과전삼태랑과 육군 보병 대토촌을 잡아 효수하고 무기를 노획했다.


1908년에 쓴 선생의 옥중서한8월 중순에서 9월 중순까지 단양 유치, 영월, 병두, 연풍 등지에서 적과 대치했으나 전세는 다소 불리했다. 허나 9월에 들어서면서 김상한, 윤기영, 주광식이 군사를 거느리고 합세하자 전세를 다시 회복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9월 16일 제천 추치에서 대전해 적 200명을 사로잡았고, 9월 27일 죽령에서 다시 적 200명을 사로잡았고, 10월 5일 단양 고리평에서 적 80명을 사로잡는 놀라운 전과를 거뒀다. 그러나 날씨가 추워지고 산중에서 눈보라를 헤치면서 적과 대치하게 되자 전세는 다시 불리해졌다. 이에 굴하지 않고 10월 23일 풍기 백자동 전투에서 적 100명을 사로잡는 등 분전했으나 선생은 그 간의 과로로 병을 얻어 11월 12일 풍기 복상동에서는 대패하고 말았다. 이때 선생은 내가 거의한 지 12년에 이와 같이 패배한 때는 없었다고 탄식하면서 부하 장령들의 죽음을 슬퍼했다.


# 13개도 의병연합의 호서지역 대장으로 선임되다


한편, 종래 분산적으로 전개되어온 각 의진 중심의 개별 항쟁만으로는 거의의 궁극적 목표인 일제를 몰아내는데 한계가 있음을 자각한 이인영과 허위 등의 의병장은 대일연합전선의 형성을 도모했다. 즉, 전국의 의병부대들이 분산적으로 싸우지 말고 하나의 통합된 지휘부 밑에서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하면서 경기지방으로 모여 서울을 포위하고 일제 통감부와 담판하고 일제를 한국에서 몰아내는 연합의병운동을 전개할 계획이었다. 이에 같은 해 11월 각 의진에 통문을 띄워 전국의 의진들이 경기도 양주에 모일 것을 호소하고 13도창의대진소를 결성하였는데, 선생은 호서창의대장에 선임됐다.


선생의 판결문선생은 이와 같은 거시적 항쟁계획에 호응하여 즉각 서울진공작전에 참여할 것을 결정했다. 그리하여 약속한 기일 내에 양주로 집결키 위해 의진의 북상을 서둘렀다. 박장호 의진과 연계해 경기도로 진입하는 과정에서 11월 21일 전동, 12월 3일 낭천, 12월 5일에는 경기도 건천에서 일제의 발악적인 저지선을 뚫어야 했다. 그러나 혹독한 폭설과 추위로 교통이 마비되고 식량과 탄약의 조달이 어려워 더 이상의 진군이 어려웠다. 결국 선생은 서울진공을 미루고 부대를 재정비하여 이후의 항전을 준비할 수 밖에 없었다.


# 까치성 전투에서 피체돼 순국하다


선생은 신돌석의병장 같은 평민출신이 아니었음에도 동학농민운동에 참가할 만큼 민중의 이해를 잘 파악하고 그들의 입장에 접근해 있었으므로 가는 곳마다 지방민들의 적극적인 지원을 얻을 수 있었다. 그 위에 의암 유인석 선생의 제자로서 유림과 선비들과의 교분, 광무황제의 도체찰사 위임, 선생 자신의 뛰어난 용병술, 아들 3형제를 모두 의진에 참여케 한 헌신성 등은 선생의 의진을 일제가 가장 두려워한 막강한 의병세력으로 성장케 하는 요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6월 4일 청풍 까치성 전투에서 장마비로 인해 화승총을 쓸 수 없는 상황에서 퇴로가 막혀 고전하던 끝에 선생은 복사뼈에 탄환을 맞아 적에게 사로잡히고 말았다.


이강년 전적 추모비

선생은 그동안 온갖 고초를 무릅쓰고 생사를 같이하던 휘하 장병들의 시신을 돌아 보면서 마을사람들에게 “내가 잡힌 몸이 되었으니 별 수 없다. 전사한 사람들을 잘 매장하여 주기 바란다”고 부탁하고 충주로 압송됐다. 군수가 음식을 대접하고자 했으나 적의 음식이 어찌 목에 넘어가겠느냐고 물리쳤고, 서울의 재판정에서도 ‘국가의 세금을 빼앗는 것이 의병인가’라는 재판장의 질문에 “임금의 마음을 받들어 국가의 어려운 일에 앞장서서 나라를 위하여 공금을 사용한 것이 역적이냐? 원수인 적의 세력에 의지하여 임금을 협박해 적을 섬기면서 국가의 녹을 먹는 것이 역적이냐? 의병을 일으켜 왜놈들을 섬멸하고 5적, 7적을 죽여 국가에 보답하고 백성을 편안하게 하려 한 것이다”고 준열히 꾸짖었다. 선생은 결국 교수형을 선고 받고 1908년 10월 13일 51세 일생을 마쳤다. 저서로는 '운강문집'이 있고 그 제자와 의병시절의 부하들에 의해 엮어진 '운강선생 창의일록'이 있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했다./사진제공-국가보훈처 

0
  • 목록 바로가기
  • 인쇄


 성공의 길을 찾아서더보기
 황준호의 융합건축더보기
 칼럼더보기
 심종대의 실천하는 행동 더보기
 건강칼럼더보기
 독자기고더보기
 기획연재더보기
 인터뷰더보기
모바일 버전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