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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유공자를 찾아서 38] 2.8 독립선언의 주역 '최팔용'
  • 이승준 기자
  • 등록 2022-12-31 21:37: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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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준 기자] 최팔용 崔八鏞, 1891.07.13. ~ 1922.09.14. 함경남도 홍원, 독립장 1962

“무릇 국가 또는 민족이 멸망한다 해도 반드시 영구히 망하는 것은 아니다. 또 국가, 민족이 융성한다 해도 또한 영구히 융성하는 것은 아니다. 보라! 멸망의 길을 걷던 폴란드는 지금 독립이 되고, 이에 반해서 천하에 위엄을 자랑하던 러시아 제국은 지금 망하지 않았는가?”

- 1918. 4. 13 동경의 YMCA 강연회에서 선생의 웅변 중 -


# 신문명을 배우기 위해 일본에 건너가다


최팔용(崔八鏞, 1891. 7. 13 ~ 1922. 9. 14) 선생은 1891년 7월 13일 함경남도 홍원군에서 출생했다. 비교적 유복한 가정에서 성장해 어려서부터 향리 서당에서 한문을 배웠다. 열강의 문명과 문물이 국내에 들어오면서 향리에까지 영향을 미치게 되자 선생은 세계문명에 대한 눈을 떠 신학문을 배우고자 스무 살이 되던 해인 1910년 봄 가족들에게도 알리지 않고 단신으로 일본으로 건너갔다. 


동경에서 수개월 동안 머무르는 동안 조국이 일본의 무력과 강압에 의해 빼앗기게 됐다는 경술국치의 비보를 듣고 통분해 즉시 귀국, 고향에 돌아와 강의록으로 영어와 수학 등을 독학하면서 실력을 쌓았다. 그 후 상경해 오성중학교 정치과에 입학했다. 


선생의 원만한 성품과 대인관계는 일본유학생 사이에서 지도적인 인물로 인정돼 존경받게 됐다. 당시 일본에서 공부하고 있던 젊은이들은 국내 문제에 대해 민감한 반응을 가지고 있었고, 일제의 민족차별은 이들 젊은 학도들의 감정을 폭발시키는 요인이 됐고 항일의식의 정도와 수단의 차이는 있을 망정 모두가 한결같이 자주독립을 열망하는 마음은 일치했다. 이 때 선생은 일본 한인유학생 학우회에 가입해 활동했다.


한인 유학생학우회는 1912년 10월 27일 동경에 체류하는 한국인 유학생 전부를 회원으로 조직됐는데 학생이 조직한 단체로서는 가장 유력한 단체였다. 이 회는 대한흥학회의 후신인 조선유학생친목회의 뒤를 이어 안재홍, 최한기, 서경묵 등의 주창으로 조직됐다. 학우회의 운영은 민족주의 사상을 고취하는데 목표를 뒀는데, 모든 동경 유학생은 이 학우회에 가입하도록 의무가 지어져 있었고 만일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국적(國敵)’ 또는 ‘일본의 견(犬)’이라고 매도 당하도록 돼 있었다. 


대한흥학회 이래의 배일사상이 학우회에로 계승돼 정기총회나 졸업생 환송회, 웅변회, 망년회, 신입생 환영회 등 회합이 있을 때마다 배일사상이 고조되고 있었다. 선생은 학우회에서 활발히 활동을 전개했고 1918년 2월 10일 정기총회에서는 학우회의 기관지 ‘학지광’의 편집국장과 평의원으로 선출됐다.



# 2․8독립선언운동을 준비하다


선생의 한국 독립운동에 대한 의식은 1918년 4월 13일 동경 기독교청년회관(YMCA)에서 개최된 조도전대학 동창회 주최 웅변대회에서 나타나고 있었다. 선생은 조도전대학을 대표해 참가하면서, 조국독립을 위한 노력을 전개해야 할 것을 다음과 같이 제기했다.


“무릇 국가 또는 민족이 멸망한다 해도 반드시 영구히 망하는 것은 아니다. 또 국가, 민족이 융성한다 해도 또한 영구히 융성되는 것은 아니다. 보라! 멸망의 길을 걷던 폴란드는 지금 독립이 되고, 이에 반해서 천하에 위엄을 자랑하던 러시아 제국은 지금 망하지 않았는가?”


선생의 우국심정이 구체적으로 실천되는 것은 이 해 여름 ‘학지광’의 편집위원이던 최승만에게 직접 자신의 의도를 제의하면서 나타났다. 즉 선생은 ‘윌슨이 민족자결론을 내세운 지금 우리가 조국광복을 부르짖기에 가장 좋은 기회이니, 우리도 이 기회에 일어나자’고 제안한 것이다. 선생은 이 제안과 함께 곧 비밀리 동지규합에 나섰다. 후에 거족적으로 일어난2.8독립운동을 위한 의미 있는 첫걸음이었던 것이다.


선생을 비롯해 송계백, 이종근, 김도연, 전영택, 윤창석, 김상덕 등 10명의 실행위원이 선출됐다. 대표위원들은 일본 경찰의 감시를 피해가면서 밀의를 했다. 독립선언문과 민족대회소집청원서, 그리고 결의문을 국문, 영문, 일문으로 작성해 자필로 서명하고 일본 조야(朝野)와 외국공관에 보내기로 했다. 또한 비밀결사인 조선청년독립단을 발족시키기로 하고 구체적인 추진계획도 수립했다.


# 조선청년독립단 발족과 함께 독립선언문 낭독하다


재일본 한국 YMCA 회관 입구의 모습거사 전일 저녁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대표위원들은 모두 모여 ‘내일 다 붙들려 갈 것이요. 또 언제 나오게 될지 모르니 여러분은 우리의 뒤를 이어 잘 싸워 주시오’하면서 후배들에게 뒷일을 부탁했다. 대표들은 반드시 기소(起訴)될 것으로 각오하고 국민의 일원으로 조국과 민족을 위해서 한번은 죽을 인생이니 이러한 숭고한 일에 목숨을 바친다는 일이 오히려 영광이라는 자긍심을 가지고 추호도 변함이 없이 태연한 심경으로 거사에 임할 마음의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2월 8일 동경에서는 보기 드물게 눈이 많이 내렸다. 오전 10시경 대표들과 학생들은 이미 마련된 독립운동 문서들을 각국 대(공)사, 귀, 중 양원의 의원, 조선총독부와 동경 및 각지 신문사, 잡지사, 그리고 저명인사, 학자 등에게 우송했다. 동경 유학생들은 학우회 총회를 이날 오후 2시에 YMCA에서 열겠다는 통지를 받아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었다. 학생들은 아침부터 모이기 시작했고, 동경 경시청에서는 이미 눈치를 채 오전부터 사복과 정복의 경찰이 주위를 서성대고 있었다.


동경 신전구 소석천정의 기독교청년회관에서 유학생학우회라는 명목으로 동경 유학생의 거의 모두를 망라한 600여명이 모인 가운데 매우 긴장된 분위기 속에서 미리 짜여진 순서대로 학우회 회장 백남규가 재회를 선언하자마자 선생이 긴급동의를 청하면서 재빨리 단상에 올라가 조선청년독립단 발족을 급히 선언했고 만장은 박수로 환성을 울렸다. 이어 독립선언문을 정숙하면서도 비장한 음성으로 낭독해 내려갔다.


2.8독립선언기념비선언서에 나타난 2.8정신을 요약하면 아래와 같다.


1. 한국은 역사적으로 단일민족이며 문화민족이었기 때문에 우리의 국가주권이 외교적이고 형식적인 관계 이외로는 근본적으로 침해 당한 일이 없다는 것을 천명함.


2. 일본은 군국주의의 무력으로 한국 침략을 단계적으로 감행하였으며, 한국과 일본이 러일전쟁 시에 체결한 국제관계를 배신한 일본을 사기범이라고 규정함.


3. 일제는 기만과 폭력으로 민족의사에 반하는 병탄을 감행했으므로 한민족은 세계의 정의 앞에서 우리의 독립을 요구할 수 있는 권리를 주장함.


4. 영.미 양국은 한국이 일본의 보호국이 되고 병탄되는 것을 승인했으므로 이 기회에 구악(舊惡)을 속죄할 의무가 있다는 것을 천명함.


5. 총독정치가 언론, 출판, 결사, 집회의 자유를 강압하고 있다고 지적하여 민주정치, 민주국가에의 열망을 나타냄.


6. 종전으로 국제연맹이 생기면 군국주의와 강국의 횡포가 없어질 것이라고 밝히고, 국제사회에서 불의의 침략행위를 거부하여 세계평화에 대한 의지를 굳게함.


7. 일본이 학생들의 요구에 불응한다면 영원히 혈전을 전개한다는 민족적인 선전포고를 하고 대일 항쟁의 의지를 천명함.


8. 일본과 세계에 대하여 한민족의 민족자결을 천명하였음


선언문 낭독에 이어 시가행진을 계획했으나 일본경찰은 해산을 요구하고 탄압을 시작했다. 이에 학생들은 흥분해 고함을 지르며 저항함으로써 일본경찰과 격투가 벌어졌다. 치고 차는 난투극으로 장내는 일대 혼란을 일으키게 됐다.


2.8독립선언 직후 육탄 항거 끝에 경찰서에 연행되다


일제 강점에 짓눌린 민족을 위해 일어선 애국학생들은 육탄항쟁을 전개했으나 대항할 그 이상의 힘이 없어지자 하나 둘씩 일본경찰에 묶이기 시작했다. 그 날 오후 3시 50분이 지나 2.8독립운동대표 10명과 주모 학생 20여 명은 일경에 피체돼 서신전 경찰서로 연행됐다. 이들은 경찰서에서 수일 동안 고문과 취조를 받고 일부는 풀려났으나 선생을 비롯해 대표위원들은 정식재판에 회부됐다. 


崔八鏞氏(學生界主幹) 유망한 인격으로 삼십이세에 장서2월 10일 동경지방재판소에서 저들은 내란죄를 뒤집어 씌우려 했으나 어느 일본인 변호사가 ‘학생들의 신분으로 자기 나라와 독립을 부르짖은 것이 어찌하여 일본 법률의 내란죄에 해당되느냐, 민족자결의 사조가 팽창함에 비추어 학생들의 주장은 정당한 것이다.’라고 변론해 내란죄의 적용은 좌절됐다. 


그리하여 출판법 제26조가 적용돼 2월 15일 1심 판결에서 비교적 가벼운 금고 1년이 선고됐으나 이에 불복 공소해 3월 21일 공소심에서 금고 9월을 받고 또 다시 상고하는 등 법정투쟁을 했으나 6월 26일 기각되고 말았다.


이로써 2.8독립선언식은 끝났으나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뒷일을 인계 받은 학생들을 중심으로 2월 12일 일비곡(日比谷) 음악당 부근에서 1백여 명의 유학생들이 모여 전 유학생대회를 개최했고, 2월 23일 독립선언서 및 국민대회 청원서를 일본 국회에 보내는 한편 ‘조선청년독립단 민족대회 소집촉진부 취지서’를 공원에서 배포하고 시위운동을 벌이려다 사전에 일본 경시청에 탐지돼 뜻을 이루지 못했다. 비록 빈손으로 일어난 운동이었으나, 2.8독립운동은 3.1독립운동을 촉발시켜 전 민족이 궐기하는 계기를 마련했던 것이다.


선생은 9개월의 금고형을 받고 소압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고, 이후 출옥해 서울로 이사했다. 그리고 일경의 엄중한 감시와 미행을 당하면서도 비밀리에 동지들과 긴밀한 연락을 취하면서 재기의 기회를 엿보았으나 1922년 9월 14일 열망하던 독립의 꿈을 실현하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나니 향년 32세였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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