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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서원 159] 황희를 제향한 '산양서원'
  • 이승준 기자
  • 등록 2023-01-03 01:47:06
  • 수정 2023-01-03 01:4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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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준 기자] 산양서원은 조선시대 문신 황희(黃喜)를 제향키 위해 세운 소동사(召東祠)가 발전한 것으로, 1857년(철종 8)에 건립됐다. 


1423년(세종 5) 강원도 관찰사로 임명된 황희는 이 지방에 흉년이 들자 관고(官庫)를 열어 백성을 구제했다. 삼척지방에서는 그의 은덕을 기리기 위해 돌을 쌓아 대(臺)를 만들고 소공대(召公臺)라 했다. 



1516년(중종 11) 4대손 황맹헌(黃孟獻)이 이곳에 비를 세웠고, 풍우로 무너진 것을 1578년(선조 11) 6대손 황정식(黃廷式)이 다시 세웠다. 1824년(순조 24) 사림(士林)에서 소동사를 세웠고, 후에 산양서원으로 발전했다. 


황희는 성품이 너그럽고 어질며 침착했다. 그리고 사리가 깊고 청렴하고, 충효가 지극했다. 학문에 힘써 높은 학덕을 쌓았으므로 태종으로부터 “공신은 아니지만 나는 공신으로서 대우했고, 하루라도 접견하지 못하면 반드시 불러서 접견했으며, 하루라도 좌우를 떠나지 못하게 하였다.” 할 정도로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그는 농사개량에 유의해 곡식 종자를 배급하고, 각 도에 명령해 뽕나무를 많이 심어 의생활을 풍족케 했다. 또한 '경제육전(經濟六典)'을 펴내면서, 종래 원집(元集)과 속집(續集)으로 나눠 내용이 중복되고 누락되거나 내용과 현실이 괴리되는 것을 수정, 보완했다.


한편, 국방문제에도 관심을 기울여 북방 야인과 남방 왜에 대한 방비책을 강구했다. 그리고 예법을 널리 바르게 잡는 데에 노력해, 원나라의 영향이 지대한 고려의 예법을 명나라의 예법과 조선의 현실을 참작해 개정, 보완했다.



또한, 인권에 유의해 천첩(賤妾) 소생의 천역(賤役)을 면제하는 등 태종대의 국가기반을 확립하는 데 공헌했다. 세종대에는 의정부의 최고관직인 영의정부사로서 영집현전경연예문관춘추관서운관사 세자사 상정소도제조(領集賢殿經筵藝文館春秋館書雲觀事世子師詳定所都提調) 등을 겸대했다.


그리고 중앙과 지방의 백성들의 마음을 진정(鎭定)시키면서, 4군6진의 개척, 외교와 문물제도의 정비, 집현전을 중심으로 한 문물의 진흥 등을 지휘, 감독했다. 특히, 세종 말기에 세종의 숭불과 연관해 궁중 안에 설치된 내불당(內佛堂)을 두고 일어난 세종과 유학자 중신 간의 마찰을 중화시키는 데 힘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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