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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유공자를 찾아서 41] 조선은행 대구지점에 폭탄을 투척한 '장진홍'
  • 이승준 기자
  • 등록 2023-01-02 11:3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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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준 기자] 장진홍 張鎭弘,1895.06.06 ~1930.07.31. 경상북도 칠곡, 독립장 1962


“너희들 일본제국이 한국을 빨리 독립시켜 주지 않으면 너희들이 멸망할 날도 멀지 않을 것이다. 내 육체는 네 놈들의 손에 죽는다 하더라도 나의 영혼은 한국의 독립과 일본 제국주의 타도를 위하여 지하에 가서라도 싸우고야 말겠다.” - 1930년 장진홍 의사, 순국하기 전 옥중에서 조선총독에게 보낸 서한에서 -


# 경북 칠곡 출신으로 유교 가풍에서 성장하다


장진홍(張鎭弘, 1895. 6. 6 ~ 1930. 7. 31) 선생은 1895년 6월 6일 경상북도 칠곡군(漆谷郡) 인동면(仁同面) 문림리(文林里)에서 부친 장성욱(張聖旭)과 모친 순천(順天) 김씨 사이에서 3남 중 장남으로 출생했다. 일명 재환(在煥), 자는 준극(俊極), 호는 창여(滄旅), 본관은 인동(仁同)이다. 부친은 성격이 순박할 뿐만 아니라 근면하고 온후한 분으로서 선대로부터 내려오는 가훈인 ‘충효’로써 집안을 이끌어 갔다. 이러한 가정 분위기에서 성장한 의사는 부모에 대한 효성과 가정의 화목을 중히 여기게 됐다.


1907년 인명학교(仁明學校:현재의 인동초등학교)에서 장지필 선생의 가르침을 받고 졸업했다. 그 당시 장지필은 학문이 뛰어날 뿐만 아니라 일제가 한국을 병탄하리라는 것을 미리 예견하고 자신의 힘만으로는 한계가 있음을 깨달아 청년들에게 항일의식을 심어 주는 애국계몽운동에 일생을 바칠 것을 결심했다. 그리하여 인명, 협성(協成) 각 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깨우쳐 항일투쟁의식을 심어 주는데 심혈을 기울였다. 이러한 장지필 선생의 가르침을 받은 의사는 구국항쟁 의식과 일제에 대한 적개심이 불타 올랐다.


# 조선보병대 제대 후 광복단에 가입하여 활동하던 중 만주로 망명하다


1914년 3월에 조선보병대(朝鮮步兵隊)에 입교해 군사지식과 학문을 배운 후 상등병까지 승진했으나 일제 치하에 있는 군대에서 더 이상 복무하기가 양심적으로 용납되지 않아 1916년 제대하고 말았다. 동년 12월에 서울로 이사해 향리 출신인 이내성(李乃成)의 권유로 독립운동단체인 광복단(光復團)에 가입해 활동했다. 그러나 국내에서 일경의 감시가 점점 심해져 활동이 더 이상 어렵게 되자 1918년 만주 봉천(현 심양)으로 건너갔다.


만주에 도착한 의사는 조선광복단 소속의 이국필(李國弼)·김정묵(金正黙) 등과 접촉해 독립운동 방략에 관해 논의한 결과 보다 더 과감하고 적극적인 무장투쟁을 전개하기로 하였다. 이를 위해 한국청년들에게 군사훈련을 시켜 정예화된 독립군을 양성, 후일 국내로 진격해 일제와 무력항전을 전개하는 것이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하고 이필국 등과 함께 연해주 하바로프스크로 건너가 한인 청장년 80여명을 규합해 군대 내무서(內務署) 보병조전(步兵操典)을 설치하고 수개월 동안 군사훈련을 실시했다. 그러나 당시 연해주 일대는 러시아혁명으로 적군(赤軍)과 백군(白軍) 간의 내전(內戰)이 심화되고 일본군의 시베리아 출병으로 더 이상 활동이 곤란하게 되자 귀국길에 오르지 않을 수 없었다.


귀국 후 얼마 되지 않아 전국적으로 3.1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나 평화적이고 민주적으로 우리의 자주독립의지를 세계만방에 외치자 이에 당황한 일제는 무력을 동원해 비인간적이고 악랄한 방법으로 시위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무수한 인명과 재산의 피해가 발생했다. 특히 무고한 주민들을 교회 안에 가둔 채 불을 지르고 총격을 가한 제암리학살사건은 일제의 잔학상을 드러낸 대표적인 만행이었다.


장진홍 의사가 의거할 당시 조선은행 대구지점 사진# 3․1독립운동 당시 일제의 잔혹한 만행을 세계열강에 알리기 위해 전국 답사


이에 격분한 의사는 일제의 만행을 조사해 이 사실을 세계만방에 알려 일제의 국제적 위신을 실추시킴은 물론 한국인의 독립열망을 열강국들에게 호소키로 결심하고 동생인 진환(鎭煥)에게 조사활동에 따른 자금의 필요성을 설명하자 이에 기꺼이 동감하고 전답 5두락(약 1,000평)을 몽땅 팔아 거금을 만들어 의사에게 건네 주었다. 의사는 서적 행상으로 가장해 전국 각지를 돌아다니면서 일제가 자행한 학살, 방화, 고문 등의 사실을 자세히 조사해 그 결과를 작성, 때마침 동년(1919) 7월 미국 군함이 인천항에 입항하는 것을 기회로 해 동 함대 내에 근무하고 있는 경북 출신 승무원 하사관 김상철(金相哲)을 만나 조사서를 전달하고 그 내용을 영문으로 번역해 세계각국에 배포해 줄 것을 요청했다.


그 후 독립운동이 기세부진(氣勢不振)함을 개탄하면서 부산에서 조선일보 지국을 경영하기도 하고 또 매약상의 이름을 빌려 각지를 전전하면서 시기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1927년 4월경에 경북 경산군 경산시장에서 매약상에 종사하고 있던 의사는 광복단의 동지인 이내성(李乃城)의 소개로 일본인 굴절무삼랑(掘切茂三郞)을 만났다. 굴절은 일본인이면서도 한국의 독립을 염원하는 사람으로 폭탄에 대한 전문가였다.


# 항일 구국방략에 대해 고민하던 중 폭탄 전문가를 만나 제조기술을 배우다


의사는 일제의 관공서, 은행 등 공공기관을 폭파해 일제를 혼란에 빠트리기로 결심하고 굴절에게 폭탄 구입을 요청하자 굴절은 만주에 가서 폭탄을 가져오기로 하고 헤어졌다. 같은 해 5월경 영천군 영천 읍내에서 다시 만난 굴절은 만주에 있는 기성폭탄은 폭발성능이 약할 뿐만 아니라 이것을 국내로 반입하기에는 일경의 경비가 삼엄한 국경을 통과해야 하는 위험 부담이 있어 가져오지 못했지만 그대신 성능이 우수한 폭탄을 가지고 왔다 하면서 다이나마이트와 뇌관 각 4개, 도화선을 보여주면서 함석관에 넣고 그 주위에 다수의 철편을 채워야 한다는 폭탄 제조법을 가르쳐 주었다. 의사는 동지들과 함께 폭탄투척을 속히 실행할 것, 폭탄제조 재료인 다이나마이트는 도로 공사장 또는 광산 등의 노동자를 매수해 입수할 것, 만일 검거되면 동지들과의 관계를 자백하지 아니할 것, 한 사람이 전 책임을 질 것 등을 서약했다.


장진홍 의사가 의거할 당시 사용한 칼이와 같이 폭탄의거에 신명을 바치기로 맹세하고 영천 거주 박문선을 통해 소림봉치(小林峯治)로부터 3회에 걸쳐 다이나마이트, 뇌관 각 30개, 도화선 25척(尺)을 대금 15원에 양도받고 이것을 재료로 삼아 다수의 폭탄을 제조해 경찰부, 조선은행, 식산은행, 법원, 형무소, 동척 대구지점, 지서, 대구부호 모씨댁 등 9개소에 투척키로 계획하고 동지를 물색하던 중 황진박(黃鎭璞)·박관영(朴觀永)을 만나 뜻을 같이 하자고 설득했다. 이때 두 사람은 의사의 뜻에 크게 찬성했으나 일신상의 이유를 들어 폭탄투척 실행에는 마땅치 않다는 의사를 표시했다. 이에 의사는 단독으로 거사를 추진키로 했다. 


1927년 8월에 의사는 다이나마이트, 뇌관, 도화선, 쇠붙이 파편(새 가마솥을 망치로 부수어 폭탄파편을 만들었음) 등을 구해 2개의 폭탄을 만든 후 천둥이 치고 폭우가 쏟아지는 날인 10월 1일 오후에 그 위력을 시험하기 위해 칠곡, 선산의 군계(郡界)의 산중 협곡(일명 휘안고개)에서 폭파 시험을 한 결과 협곡의 양벽이 완전히 붕괴되는 위력을 보고 일제 건물들을 폭파시키기에 충분하다는 것을 확인했다.


# 폭탄을 직접 제조해 산중협곡에서 성공적인 성능실험 마치다


우선 운전수를 매수해 자동차로 전기(前記) 9개소에 폭탄을 투척하려고 했으나 운전수의 매수가 여의치 않아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다. 이에 의사는 계획을 변경해 투척장소를 경북도청, 경북경찰부, 조선은행 대구지점, 식산은행 대구지점, 대구 부호집 등 5개소로 정했다. 같은 해 10월 16일 칠곡군 인동면 자택에서 과(鍋 : 노구솥), 가래 등을 부수어 파편으로 만들고 다이너마이트, 뇌관, 도화선 및 회로회(懷爐灰), 위산공관(胃散空罐) 5개(폭탄 1개 중에 다이너마이트 뇌관 각 5본) 등을 사용해 점화 후 20 ~ 30분 경과 후 작렬할 6개의 폭탄을 제조했다. 폭탄 6개 중 1개는 자택에 두고 익일(17일) 오전 2시경 소탄(小彈) 1개는 자살용으로 품속에 지니고 다른 대탄(大彈) 4개는 자전거에 실어 자택을 출발한 후 오후 5시경 대구 달성정(達城町) 매서(妹胥) 김상한(金商翰)의 집에 들러 숙소를 정했다. 잡화상 등에서 호(糊 : 풀), 마뉴(麻紐 : 삼으로 만든 끈), 정강신보(靜岡申報) 15, 6매를 구입한 후 김상한의 집에서 하루를 묵었다.


이튿날 18일 오전 9시경 전 날 밤에 구입한 포장용 신문 및 마뉴, 폭탄 4개를 자전거 하대(荷臺)에 싣고 덕흥여관(德興旅館)에 가서 “나는 부내(府內) 남산정(南山町) 길전상점(吉田商店)의 점원이다. 전날 밤에 2층 청소 중 추락해 부상당했으므로 4, 5일간 정양하게 되어 이 여관에 왔으니 묵게 해 달라”고 하자 동 여관 사환인 박노선(朴魯宣)이 객실로 안내했다.


# 폭탄을 벌꿀선물로 위장, 조선은행 대구지점에 송부하다


의사는 같은 여관에서 미리 준비해 온 폭탄을 포장한 다음 11시 30분경 박에게 신문지에 포장한 4개의 소포를 내주면서 “나는 부상을 입어 걸을 수 없으니 이 벌꿀선물 상자를 조선은행, 도청, 식산은행의 순서대로 급히 배달 해달라”고 하자 박은 친절하고 자기에게 잘 대해 준 것을 고마워하고 있는 터라 아무 의심 없이 소포를 받아 가지고 제일 먼저 조선은행으로 향해 갔다.


장진홍 의사의 서신전 은행원이 주판알을 퉁기기에 분주한 조선은행 대구지점에는 30세를 전후한 허름한 한 청년이 신문지에 싸인 나무상자 4개를 가지고 와서 그 중 한 개를 어떤 사람의 선물이라 해 국고계 주임 복지흥삼(福地興三)에게 나무상자 1개를 내놓았다. 이때 이상한 화약 냄새를 맡은 은행원인 일인 길촌결(吉村潔)이 의심을 갖고 서둘러 나무상자를 풀었다. 나무상자의 뚜껑을 연 길촌결은 뜻밖의 선물로 놀라움과 두려움으로 얼굴이 하얗게 창백해졌다.


의외에도 상자 속에는 다이너마이트가 들어있었고 도화선에 불이 붙어있어 뇌관까지 불과 2센티 밖에 남아있지 않은 그야말로 폭발직전의 상태에 놓여있는 폭탄선물이었기 때문이었다. 당황한 주임과 은행원은 소리를 치면서 우선 불이 붙은 도화선을 자른 다음 뱅크 대 밑에 있던 나머지 3개를 지점 앞뜰 자전거 주차장에 급히 옮긴 후 곧바로 경찰서에 신고했다. 급보를 받은 경찰관은 즉시 은행으로 출동해 사건의 경위를 조사하는 한편 은행원이 주차장으로 옮겨놓은 나머지 폭탄 3개를 은행 옆 한길에 옮겨 놓았다. 그러나 옮겨 놓은 지 1, 2분이 경과한 11시 50분경 요란한 폭음을 내면서 폭탄 3개가 잇달아 폭발해 현장에 있던 은행원, 경찰관 등 5명이 파편에 맞아 중상을 입었고 은행 창문 70여 개가 전파했다. 특히 유리파편은 산산히 흩어져 대구역까지 날아갔고 은행 주위의 전선은 모두 끊어지는 가공할 만한 위력이었다.


# 한낮에 조선은행 대구지점에서 천지를 진동하는 굉음이 울려 퍼지다


그것은 잠자고 있던 한 민족에게는 독립의 함성이었고 민족혼을 일깨운 한낮의 우뢰 소리였다. 대낮에 짙은 화약냄새 속에 찢어지는 듯한 비명소리가 대구시내를 온통 뒤흔들었고 요란한 폭음을 듣고 달려온 인파로 은행 주위에는 심한 혼란에 빠졌고 당황하고 놀란 일경들은 전 시내에 비상 근무령을 내리고 범인체포에 혈안이 됐다.


일경은 폭탄을 운반했던 박노선을 붙잡아 폭탄 운반 경위를 심문하고 즉시 덕흥여관으로 출동했으나 의사가 묵었던 덕흥여관 2호실에는 폭탄 포장에 쓰던 풀 1개, 마뉴의 1단(端)이 일경들을 비웃는 듯 방치돼 있을 뿐이었다. 아무런 의심 없이 박노환이 폭탄 꾸러미를 들고 여관 문을 나서자, 의사는 여관을 떠나 김상한의 집으로 가 준비해 둔 모자와 구두를 갈아 신고 변장해 선산군(善山郡) 해평면(海平面)으로 피신해 동지 황진박.박관영과 만나 성공의 축배를 나눴다.


대구지방법원 입정하는 광경한편, 사건 발생과 동시에 일경은 수사본부를 대구에 두고 전국적으로 비상 경계망을 폈다. 현장에서 확보한 자료를 검색하는 동시에 여관에 남겨 놓고 간 물품 및 폭탄 제조와 그 포장에 쓴 물건 등을 근거로 경북의 경찰, 헌병, 관공서 직원 등을 총동원해 과거에 조금이라도 의심이 있던 사람들을 모두 수색, 검거토록 했으나 단서조차 발견할 수가 없었다. 이렇게 되자 1928년 1월 엉뚱하게도 전에 독립운동에 종사한 바 있는 이정기(李定基) 외 8명을 검거해 악독한 고문으로 자백을 받아 진범으로 꾸며 대구지방법원 검사국에 송치해 공판에까지 회부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때 민족저항 시인인 육사 이원록(李源祿, 90 건국훈장 애국장) 선생도 동 사건에 연루되어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그러나 폭탄거사가 뜻대로 성사되지 못함을 안 의사는 매우 억울하게 여기고 제2의 거사를 계획했다. 1927년 11월 안동군에 있는 친족인 장용희(張龍熙)를 설득해 안동의 경찰서, 은행을 폭파하기로 하고 다이너마이트 폭탄 3개를 제조해 장으로 하여금 투척토록 했으나 장의 신병으로 인해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2차 계획 역시 뜻을 이루지 못하자 다시 1928년 1월에 전부터 친교가 두터운 영천 읍내에 거주하는 김사실(金士實)을 적임자로 생각하고 그를 방문해 자신이 대구 조선은행에 폭탄을 투척했음을 알리고 같이 거사할 것을 권유했다. 김사실의 지지를 얻은 의사는 영천경찰서와 영천 부호 이인석(李麟錫)의 집을 폭파하기로 하고 폭탄 2개를 제조해 1928년 1월 20일 김사실에게 1개를 건네주고 시기를 보아서 동일시각에 투탄키로 했다. 그러나 일경의 수사망이 점차적으로 좁혀져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다.


# 제2의 거사를 도모하던 중 일경의 감시가 좁혀지자 최후의 거사를 위해 일본으로 건너가다


신변의 위험으로 국내에서의 활동이 어려워지자 같은 해 2월경 일본으로 건너간 의사는 자성(茨城), 복도(福島), 기옥(埼玉), 청삼(靑森) 등지를 전전했고 같은 해 12월경 동경에 이르러 최후의 거사로 일제의 중의원(衆議院) 및 경시청에 투탄한 후 노령 방면으로 탈출할 계획을 세우고 망명전의 결별을 위해서 대판(오사카)에서 안경점을 하고 있는 동생(張義煥)을 찾아갔다.


한편 국내에서는 1927년 7월 사건 담당 고등과장이 파면되고 복전(福田) 과장이 새로 부임해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사건 전말에 대해 다시 조사하기 시작했다. 복전은 수명의 용의자를 용의 선상에 올려놓고 극비리에 수사를 진행시켰다. 그러던 중 경북 경찰서 경부 최석현(崔錫鉉)이 폭탄사건이 의사에 의해 일어났음을 감지하고 구보전(久保田)·남(南)부장·정(鄭)순사 등 4명을 지게꾼과 엿장사 등으로 변장시켜 의사의 본적지와 거취할만한 곳에 보내어 수사에 전력했다. 그러나 의사의 행적이 묘연해 수사의 진전을 보지 못하던 중 최근 일본으로부터 귀국한 노동자가 작년 11, 12월경 동경 또는 대판(오사카)에서 만나본 적이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였다.


대구복심법원 사형 판결문행적을 내사하던 일경은 의사의 동생이 수 년 전 일본에 건너가 대판(오사카)시 동성구(東城區)에서 안경상을 경영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이리하여 경북경찰부에서는 구보전, 남부장 및 최석현 등 3명을 일본에 급파했다. 일본 대판(오사카)에 도착한 이들은 대판(오사카)시 동서구(東西區) 저사야정(猪飼野町) 508에 있는 장의환의 안경 상점을 확인하고 대판(오사카)부 천왕사(天王寺) 앞에 있는 일출(日出)여관에 여장을 풀었다. 현지에 거주하고 있는 조선인 노동자 이춘득(李春得).남주희(南周熙) 등을 포섭한 일경은 안경상점을 감시토록 했다. 그러나 의사의 소재를 확인하지 못하고 절망에 빠져 있던 중 여자 정탐원을 이용해 직접 안경점에 잠입시켜 확인토록 했다.


1929년 2월 18일 여자 정탐원은 신원을 속이고 안경상점에 들어가 장의환 부인의 동정심을 얻은 후 하룻밤을 묵으면서 장의환의 7, 8세 된 어린아이를 유혹해 김해중(金海中)이라는 인물이 2층 안경공장에 숨어 지내고 있다는 것을 알아내고 다음날 일경에 알렸다. 이에 일경들은 이춘득을 안경도매상으로 위장시켜 계약금 30원으로 안경 1만 5천 개를 조선에 판매할 계획인 양 주문하고 밤 11시에 장의환의 집에서 주연을 같이 하도록 하는 한편, 같은 시간에 현지 일본인 형사 2명을 지원받아 담을 넘어가 의사를 체포키로 했다..


# 일경의 간교한 계략에 의해 일본 대판(오사카)에서 붙잡혀 대구로 압송되다


일경의 계략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 장의환의 집에서는 의사를 비롯해 직공과, 이춘득 등 여섯 명이 식탁에 마주앉아 술잔을 주고 받으며 유쾌한 분위기가 무르익고 있었다. 이때 뜻밖의 침입자가 있자 모두 놀라고 있는데 의사만이 벌떡 일어나 전등을 부수고 암흑을 틈타 뒤뜰로 뛰어 내렸으나 아래층에서 기다리고 있던 일경에 의해 붙잡히고 말았다.


2월 19일 대구에 압송된 의사는 일경의 심문을 받는 도중 모든 사실을 그대로 말한 후 “일제가 한국을 독립시켜 주지 않는다면 일본이 멸망할 날도 그리 멀지 않을 것이며 이번 거사는 야만 일본을 타도하기 위하여 정의의 폭탄을 던진 것인데 성공하지 못하고 너희들의 손에 붙들린 것이 천추의 유한이다”고 크게 호통친 다음 “한국의 피를 받은 자로서 일제 경찰의 주구가 되어 동족의 광복운동을 이다지도 방해하는 악질 조선인 경관의 죄상이야말로 나의 죽은 혼이라도 용서할 수 없다”고 꾸짖어 주구 경관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그리고 이번 사건은 자기 혼자만이 한 것이라고 주장해 다른 사람의 이름을 대지 않아 혹독한 고문을 받았다.


장진홍 기념비각# 법정에서 두 차례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그때마다 “대한독립만세”를 삼창하다


의사는 피체된 지 반년만인 1930년 2월 17일 대구지방법원 1심 재판에서 사형 언도를 받자 그 자리에서 “대한독립만세”를 고창해 불굴의 독립의지를 과시하였했다. 깉은 해 4월 24일 대구복심법원에서도 역시 사형이 언도되자 의사는 하늘을 쳐다보고 크게 웃은 다음 어느 사이에 간직해 둔 주먹만한 돌을 꺼내 재판장을 향해 던지고 “대한독립만세”라고 큰소리로 삼창한 다음 다시 의자를 집어 던졌다.


그 후 간은해 7월 21일 고등법원에 상고했으나 기각돼 사형이 확정됐다. 의사는 옥중에서도 일경의 모진 고문과 악형에도 굴하지 않고 굳은 의지와 지조를 지켰고, 총독 재등실(齋藤實)에게 보내는 서한을 작성하여 간수에게 부쳐 줄 것을 부탁했다. 그 내용에는 “너희들 일본 제국이 한국을 빨리 독립시켜 주지 않으면 너희들이 멸망할 날도 그리 멀지 않을 것이다. 내 육체는 네놈들의 손에 죽는다 하더라도 나의 영혼은 한국의 독립과 일본 제국주의 타도를 위하여 지하에 가서라도 싸우겠다”라는 것으로 민족의 의지와 자신의 확고한 투쟁목적을 표명했다.


# 참혹한 고문 속에서도 동지들을 밀고하지 않고, 사형집행 전 자결로 순국하다


사형이 확정된 후에 일제에 의해 치욕스런 죽음을 당하느니보다는 차라리 깨끗이 죽자라고 결심한 의사는 1930. 7. 31 찌는 듯한 여름의 무더운 밤에 자결 순국했다. 의사는 왜적의 교수대에서 이슬이 되기보다는 차라리 선종(善終) 일도(一途)로 사생취의(捨生取義)의 정로(正路)를 단행했던 것이다. 의사는 정녕 35세의 젊은 청춘을 조국광복 제단에 바치시고 한 점 부끄럼 없는 생애를 마쳤지만, 의사의 시신은 왜경의 압력으로 경북 칠곡군 석적면 남율(南栗)의 언덕에 한낱 나무토막처럼 매장 당했다. 이 어찌 나라 없는 설움에만 그칠 것인가?


왜경의 금제(禁制)로 인해 친족이나 동지들조차 영결 장소에 입회까지 못한 무덤이 되었을 망정, 조국이 광복되기까지 15년간에 걸쳐 그의 무덤 곁을 지나가는 행인들은 반드시 머리를 숙이고 옷깃을 여며 예를 올렸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사진출처-국가보훈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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