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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유공자를 찾아서 40] 대만주재 초대 총영사 '민필호'
  • 이승준 기자
  • 등록 2023-01-02 10:28:51
  • 수정 2023-01-02 11:0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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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준 기자] 민필호 閔弼鎬,1901.02.07 ~1963.04.14. 서울 서울, 독립장 1963


우리 대한민국의 유일한 생존의 길은 우리나라가 왜 이국의 병탄(倂呑)을 당하게 되었는가 하는 역사적 원인을 똑똑히 깨달아야 하고 주의사상(主義思想)이나 집권야욕(執權野慾)만 운운(云云)하는 소아(小我)를 버리고 대아(大我)를 앞세워 나라와 민족이 사는 것이다. - 민필호 선생, 임시정부의 단합을 강조하면서, 1945. 임시정부 주석 판공실장 재임 시 -


# 경술국치 후에 “외국연호 찍힌 졸업장 부끄럽다” 학교 졸업 거부


민필호(閔弼鎬, 1898. 2. 27(음) ~ 1963. 4. 14) 선생은 1898년 서울 호동(壺洞)에서 정2품 의정부찬정(正2品 議政府贊政)을 지낸 부친인 효헌공(孝獻公) 민치헌(閔致憲)과 모친 전주(全州) 이씨(李憲卿) 사이에 4남으로 출생했다. 본관은 여흥(驪興)이며 자(字)는 중우(仲禹), 호는 석린(石麟)이다. 이명(異名)으로 임동반(林東潘)·왕량성(王良誠)이 있다.


선생의 가문은 대대로 혁혁한 명문으로 선생은 유년 시절부터 덕성과 재주가 비범했다. 당시는 국내 정세의 혼란과 밀려오는 열강들의 압력으로 나라의 형세가 기울어지고 내우외환(內憂外患)이 닥쳐오고 있는 때였다. 선생은 11세 때에 서울로 상경해 큰 형 준호(濬鎬)씨가 경영하는 경신(儆新) 소학교 5학년 2학기에 입학해 반년 후에 우등으로 졸업했고 같은 해 휘문의숙(徽文義塾)에 입학해 학습하던 중 3학년 때 경술국치를 당하자 그 이듬해(1911. 4학년) 졸업을 몇 달 앞두고 “외국연호(外國年號)가 적힌 졸업장을 받는 것이 수치스럽다”고 밝히고 같은 해 겨울에 중국으로 건너갔다.


# 상해로 망명, 박달 학원에서 신학문을 배우다


중국에 도착한 선생은 먼저 둘째 형인 제호(濟鎬,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씨의 소개로 상해 프랑스 조계(租界)에서 항일독립운동을 하고 있던 신규식 선생이 창설, 운영하고 있던 박달(博達) 학원에 들어가 중어, 영어, 역사 등을 공부했다. 박달학원 교수진은 박은식, 신채호, 조소앙, 홍명희 등으로 돼 있었다. 또한 남양 중학교를 졸업한 후 1917년 7월에 예관의 지도로 상해에 있는 교통부 체신학교에 들어가 1년 반 동안 전신기술을 배웠고 1918년 12월에 동교를 졸업하자마자 중국 교통부 상해전신국(上海電信局) 전신 검사원으로 일했다. 이듬해(1919) 9월에는 정풍(正風) 문학원 중국문학계에 입학해 1년간 한문을 수학했다.


1918년 1월 미국 윌슨 대통령이 14개조의 민족자결을 제창하자 이를 계기로 동년 6월에 동제사(同濟社) 이사장인 신규식 선생이 본국에 있던 동지들에게 밀서를 보낼 당시에 연락업무를 담당했고 이때 밀서를 휴대하고 본국에 입국한 청년 중 몇 사람은 일경에 붙잡히기도 했다. 1919년 국내에서 3․1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나고 이어 상해에서 역사적인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선생은 같은 해 11월 임시정부 법무총장인 신규식 선생의 비서가 돼 임정의 외교업무를 보좌하는 한편, 동제사 업무에도 협력해 중국 인사들과 연락하는 일을 맡아 일본인들의 비인간적인 만행과 동포들의 항일애국 정신을 알리고 본국, 만주, 구미 등 각지 연락사무를 담당했다.


한편 신규식 선생이 박은식 선생과 함께 '한국통사(韓國通史)'를 쓰고, '이순신전' '안중근전'을 저술하는 일을 가까이에서 보필했다. 그러다가 1920년 7월 상해에서 신규식 선생의 딸인 신명호 여사와 결혼해 단란한 가정을 꾸렸다. 1921년 10월 임시정부 국무회의에서는 국무총리 겸 외무총장인 신규식 선생을 광동(廣東) 중국호법정부에 특사로 파견해 임정을 승인하고 독립운동을 지원해 달라고 협상토록 했다. 임시정부가 조직된 이래 정식으로 특사를 보내어 우방을 방문하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이것은 한국과 중국의 역사상에 있어서도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이었다.


# 중국호법정부와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양국을 상호 승인


선생은 신규식 선생 특사의 수행비서가 돼 동행했으나 아직 나이가 어리고 아는 것이 적어서 맡은 책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 이를 사양했다가 신규식 선생이 재차 설득하자 끝내 거절하지 못하고 수행비서로 동행했다. 선생은 직장(교통부 상해전보국)에 1개월간 휴가를 내고 1921년 10월 26일 신규식 선생과 함께 선편으로 상해를 출발해 이틀 후(10. 28)에 홍콩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신규식 선생은 광동 호법정부의 요인이며 운남(雲南) 독판(督辦)인 당계요(唐繼堯)를 만나 한국의 항일독립운동 실상과 일제의 탄압행위에 대해 허심탄회하게 토로하자 당계요는 이에 전적으로 동감을 표시하고 한국인의 군관 양성을 위해 적극 협조키로 했다.(후에 당계요는 실제로 윈난 군관학교에서 한인 학생 30여 명을 양성시킴)


민필호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의원 당선증(1943)이튿날(10. 29) 선생은 신규식 외무총장을 모시고 구룡에서 출발, 3시간 만에 광동에 도착해 장제(長堤)에 있는 대동(大東)호텔에 여장을 풀었다. 이튿날 선생은 외무총장과 함께 비상총독부(非常總督府)와 각 부회(部會) 및 그 밖의 인사들을 만났다. 이와 전후해서 대본영(大本營)의 비서장 겸 총참의인 호한민(胡漢民).서계룡(徐季龍).여천민(呂天民).유백천(劉白泉) 등을 만나 시국과 임시정부의 원조문제에 대해 토론했다. 다음날 광동에서 발행하는 모든 신문에는 ‘한국의 특사 신규식씨가 광동성으로 와서 우리나라(중국) 당국과의 협상이 매우 융화되어 가니 광동의 모든 사람들은 이를 기뻐하여 경축한다’라는 기사가 게재돼 중국 조야가 임정에 대해 대단한 관심을 갖고 있음을 엿볼 수가 있었다.


같은 해 11월 3일 신규식 선생과 같이 호한민과 중국 외교부장 오정방(伍廷芳)의 안내로 중국 총통부 관저에서 총통 손중산을 만났다. 이때 신규식 선생은 임시정부 호혜 5개 조항을 설명했다. 즉 ①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대중화민국 호법정부를 승인함 ② 대중화민국호법정부는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승인할 것 ③중국군사학교에 한인(韓人)을 대량 수용하여 줄 것 ④5백만 원의 차관건(借款件) ⑤ 적당한 지역을 빌려주어 둔전양병(屯田養兵)할 수 있도록 도와줄 것 등이었다. 


이러한 임정의 요구에 대해 손 총통은 ① ② ③ 항은 문제없이 승인하겠으나, ④항은 북벌군이 무창, 한구 일대를 점령한 뒤에야 도와줄 수 있고 그 전에는 광동 1개 성의 역량으로는 도저히 불가하고, ⑤항은 북벌이 완성된 뒤에야 도와주겠다는 굳은 약속을 얻고 두 정부간에 계통적인 외교 연락을 위해 임시정부 대표를 보내기로 합의했다. 또한 파리강화회의에 한국대표를 보냈으니 중국대표와 연락하여 도와줄 것을 요청했다.


# 임정 요인들의 심부름꾼이 되어 독립을 위한 궂은 일들을 맡아 하다


같은 달 18일 중국 총통부의 각원(閣員)과 참의원, 중의원의 전체 의원, 그리고 육해군 전체 장교가 참석하는 예식에 정식으로 신규식 선생이 초대돼 국서(國書)를 전달하자 손 총통은 “한.중 양국은 전통적으로 깊은 우의를 가지고 있으며 귀국 임시정부가 수석 특사를 보내서 우리 호법정부를 방문하게 되어 실로 영광스런 일이며 두 나라의 외교관계가 열려 장차 친선 우호의 길을 영구히 지속해 나갈 것입니다.”(하략)는 답사를 했다. 임시정부 국무총리 겸 외무총장 신규식과 손 총통은 깊은 악수를 했다. 이로써 중국의 호법정부와 대한민국 임시정부간에 처음으로 양국을 승인하는 계기가 됐다.


신규식 선생은 손 총통과의 접견을 마친 뒤 광주에 있는 각국 외교관들을 초청해 한국의 독립운동의 진상을 알리고 또한 중국 호법정부 외교부장 진우인(陳友仁)씨가 개최한 범 태평양회의의 토론회에 참석해 한국독립의 절대 필요성과 아주(亞洲)의 평화를 강연한 뒤 상해로 돌아왔다.


그 후 신규식 선생과 함께 손 총통의 북벌이 완성되기를 고대했으나 반란을 일으킨 진형명(陳炯明)이 부하를 거느리고 광주를 역습해 위기에 몰리게 되자 중국군은 다시 남하해 진형명의 반란군을 토벌하다 실패해 궁지에 몰리는 상황이 됐다. 신규식 선생도 과중한 업무와 누적된 피로가 겹친데다가 이러한 소식을 듣고 병석에 눕기에 이르렀다. 그 위에 임정의 경제는 더 말할 수 없이 곤궁에 빠져, 임정요인들이 식사조차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실정이었다. 이에 신규식 선생은 모든 일에서 상심(傷心)이 극도에 달하게 돼 1922년 8월 5일 한을 남긴 채 서거했다. 선생은 신규식 선생의 장례를 치른 후 이동녕.노백린.김구.이시영 등 임정요인의 활동을 계속 지원했다.


# 임정 재정을 실질적으로 책임지고


'한국 각 당파개략(韓國各當派槪略)' 표지

1923년 10월부터 1936년까지 임시정부 재무총장 이시영 선생의 비서로서 재정의 실질적인 책임을 맡아 임정의 경상비 조달 등 어려운 문제를 해결했다. 당시 임정의 집세를 반년 이상 지불하지 못하자 집주인은 법정에 고소해 이사를 재촉했다. 이때 선생은 임정 대표로 법정에 출두해 선생의 직장(교통부 상해전보국) 보수를 담보로 해 겨우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으니 임정의 경제 형편이 어느 정도였는지 가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상해 프랑스 조계 애인리(愛人里)에 있던 선생의 집은 임정 요인들의 식사 제공 장소였고 청년 동지들의 통신 연락이나 숙소 역할까지 했다.


이와 같은 어려운 업무를 처리하는 한편 1924년 1월에는 상해 교민단 의사회(上海僑民團議事會) 학무위원으로 피선돼 교포의 교육 자치기관인 인성학교(仁成學校)의 운영을 맡기도 했다. 또한 교포들에게 교육비 납부의 정당성을 설득하면서 교포의 교육자치 사업에 진력했다.


# 윤봉길 의거 후 임정 요인들의 신변안전과 활동 지원


1932년 1월 8일 애국단원인 이봉창 의사가 적의 수도 일본 도쿄에서 일왕에게 폭탄을 던지고 같은 해 4월 29일 상해 홍구 공원에서 윤봉길 의사의 폭탄 의거로 시라카와 요시노리 대장과 시게미쓰 마모루 주중 공사 등 사상자가 발생하자 일본 영사 관원들은 당황해 국제공법을 무시하고 야간과 새벽을 이용해 사복경찰과 형사를 풀어 프랑스 조계를 수색, 김구 등 임정 요인들을 검거하는데 혈안이 되고 있었다.


이때 선생은 중국 친우인 은여려(殷汝驢)에게 도움을 청해 김구 선생을 저장성 자싱(嘉興, 가흥)에 있는 전 중국 호법정부 의장 저보성(楮輔成)씨 집으로, 이동녕.이시영.엄항섭.조완구.안공근 등을 상해 성내(城內)를 경유해 항주로 피신케 하는 등 임정요인의 신변위기를 모면케 했다. 그리고 선생은 중국 교통부 상해 전보국에 위치해 임정과 김구(당시 가명은 장진구(張振球)라 하였음)의 서신연락을 담당하는 연락센터로서 본국, 구소련, 구미, 중국 동삼성 각지의 항일운동에 비밀통신연락 임무를 수행하는 한편 중국인들의 협조를 얻어 경제적인 도움을 받도록 했다. 상해에서 활동이 갈수록 어려워지자 선생은 항주 전보국으로 직장을 옮겨 그곳에서 통신연락업무를 담당하다가 당시 중국 국민당 CC파(1927년 진과부가 건립한 장개석의 특무정부공작기관임)의 영수(領岫) 진과부(陳果夫) 선생의 추천으로 성명을 임동반(林東潘)이라 바꾸고 남경 교통부의 직원으로 전근했다.


# 낙양군관학교에 한국 청년 연락책을 맡아 활동


당시 남경에서 활동하던 김구와 지청천.이범석.안공근 등은 진과부를 만나 낙양군관학교(洛陽軍官學校)에서 한국 청년들을 훈련시키기로 논의하고 중국 군사위원회 위원장 장개석에게 요청해 한국 청년 백여 명을 입학시켰다. 이때 한인 교관으로 지청천.이범석을 임명하고 선생은 낙양군관학교에 입학시킬 한국 청년을 수용키 위해 임시정부와 중국 국민정부간의 연락원으로 활약했다.


1937년 중국인 주관자(主管者)의 추천으로 중국 군사위원회 위원장 장개석 시종실(侍從室)의 직속기관인 암전연구소(暗電硏究所) 총무(대령급)로 근무했다. 이때 선생은 이름을 왕량성(王良誠)이라 바꾸고 연구공작을 담당했다. 이어 군사위원회 기술연구실 제3조장(소장급)으로 승진해 근무하던 중 1938년 11월부터 장개석 장군의 시종실이 이동함에 따라 곤명(昆明), 중경 등지로 전전하다 1939년 5월에 일단 동직을 사임하고 김구 주석을 보필하기 시작했다. 이때 중국정부로부터 중·일 전쟁 기간 중에 일본의 외교, 군사 암호전보 36종을 연구 해독한 공로로 중화민국 육.해.공군 광화장장(光華獎章)을 받았고 사직 후에도 공로자라 해 중국 군사위원회에서 봉급을 계속 지불 받았다.


# 1939년 중국 관직을 사임하고 김구 주석을 보필, 임정 활동 지원


민필호 사진

선생이 임정에 복귀했을 때 임시정부 청사는 너무 협소하고 중국 국민당이 원조해주는 매월 6만원의 경비로 임정 직원과 가족 등 300여명의 생활을 겨우 유지하고 있었다. 이런 시련과 곤경 속에서 선생은 1940년 5월 김구 주석의 판공실장(辦公室長), 임정 외무부차장(부장 : 조소앙), 의정원 의원 등을 겸임하고 경제, 외교 등 여러 방면의 중책을 맡아 1945년 10월까지 헌신적인 활동으로 임정 발전에 커다란 기여를 하였다.


우선 중경 화평로(和平路) 오사야항(吳師爺巷) 1호에 있던 임정 청사가 너무 협소해 칠성강(七星崗) 연화지(蓮花池)에 있는 옛날 여관(약 80칸에 달함)을 물색한 후 중국국민당 중앙당부와 적극 교섭해 거액(1200만원)의 지원을 받아 청사를 이전시키는 한편, 중경 근처 토교(土橋) 신한촌(新韓村) 청년회관에 있는 학병 중에 건장한 청년 12명을 선발해 주석 경호대를 편성하고 주석 판공실이 관리하게 했다. 그리고 청년회관에 있는 학병 19명을 서안(西安) 광복군 제2지대장 이범석에게 보내어 군사훈련을 받게 했다.


그 외에 지방 공작비로 5백만 원을 전후 3차에 걸쳐 중국정부로부터 원조받았고 이당치국(以黨治國)의 건국이념에 따라 한국 독립당이 설립되자 동 당의 선전부장이 되어 임시정부 기관지였던 상해판 독립신문을 새로이 복간 발행하여 중경판 독립신문시대를 열어 놓았다.


선생은 한국독립당의 당사(黨舍)가 없어 당의 운영에 곤란함을 안타깝게 여겨 주가화에게 요청해 8백만을 지원받아 교장구(較場口) 부근에 있는 상해 테라스식 가옥 1동을 구입해 당사로 활용토록 했다. 1944년 안원생(安原生 :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스웨덴인 벤지(Beni e, 기독교 세계전쟁복리회의 중경 책임자)로부터 100만원의 원조를 받아 토교 신한촌에 기독교 청년회관을 건설하고 중경 화평로 오사야항 1호(전 임시정부 사무실)에 무료 의료소를 설립하게 되자 선생도 이 일에 적극 협조했다.


민필호 유묵# 일본이 패망하자 임정 요인들의 환국과 교포 보호 맡아


1945년 8월 마침내 일제가 패망하자 임시정부 요인들은 귀국을 서둘렀으나 한 달이 지나도 뚜렷한 귀국대책이 없게 되자 선생은 김구 주석과 장개석 주석의 면담을 적극 주선하고 1945년 10월 16일 오후 2시 중경 시내 상청사(上淸寺) 장 주석의 관저(官邸)에서 양국 주석의 회담이 이뤄졌다. 이때 김구 주석은 8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진행된 중일전쟁의 승리를 축하하고 오랫동안 임정에 베풀어준 중국의 두터운 우정에 감사를 표한 다음


1. 중국 각지에 있는 일교민(日僑民)과 일본 포로를 일본으로 압송시킬 때 한인을 일인과 함께 취급하지 말고 한국인을 별도로 모아 자유롭게 거주토록 하고 일군(日軍) 중 한적(韓籍) 군인은 가려내어 모두 광복군으로 집결시키라는 명령을 전국에 내려 한인들을 안전하게 귀국할 수 있도록 하여주고


2. 임정 귀국 후 선생과 박찬익(朴贊翊) 두 사람을 대표단으로 이곳에 주재케 해 임정의 잔무와 정식 정부가 수립되기 전까지 모든 여화교민권익사무(旅華僑民權益事務)를 처리하게 해달라고 설명하자 장 주석은 이를 흔쾌히 받아들였다.


김.장 주석의 회담 후 김구 주석은 임정 국무회의를 열어 임정주화대표단(臨政駐華代表團) 부단장에 선생을 임명했다. 이어 선생은 중국국민당 요인과 교섭해 ①귀국인사명단 작성 ②환국 여비 6억 원 ③비행기 2대 제공 ④전신연락을 위하여 무전과 통신사를 비행기에 배치하고 본국에 도착한 후 중국과 연락하게 하며 ⑤임정에서 중경 비행장까지 버스 한대를 제공하여 각원들을 탑승시키며 김구 주석은 따로 승용차 1대로 모시기로 하며 ⑥그 외에 장 주석은 김 주석에게 정치자금으로 미화 20만 달러를 비밀리에 보내주도록 하는 등 환국 준비에 만전을 기했다.


1945년 11월 5일 아침 임정의 전요원들은 기념사진을 찍고 중국 국민당 측에서 준비한 차량 편으로 중경 공항으로 이동해 두 대의 항공편으로 분승했다. 비행기에 오르기 전 김구 주석은 선생의 손을 잡고 “임정의 잔무를 처리하고 이곳 중경에 남아있는 직원과 가족들을 귀국시키는 중책을 처리할 사람은 자네 밖에 없으니 임무를 완성하게. 나는 믿고 떠나네. 앞으로 자주 연락하고 조심하게”라고 당부한 후 귀국길에 올랐다.


선생은 임정요인들을 보낸 뒤 ①임정 잔무 처리 ②임정 소유건물과 토지처리 ③임정이 임대한 건물처리 ④중경 거주 임정 직원과 가족의 귀국 사무 ⑤귀국하기 전 체류기간 동안의 직원과 동포들의 생활비 조달 업무 ⑥임정 직원 이외의 교포들의 귀국업무 ⑦중경 주재 광복군 귀국 관련 업무 ⑧여화한교(旅華韓橋) 생명, 재산보호와 관련된 업무 ⑨화북, 화중, 화남, 만주 일대에 대표단과 분단(分團)을 설치하는 업무 등을 처리하였다. 1945년 11월부터 이듬해(1946) 7월까지 중경 주재 임정 직원과 가족, 중경 토교 신한촌에 있는 학병 80여명과 중국적(籍) 광복군 직원 등 100여명을 중국측과 적극 교섭해 4차례에 걸쳐 귀국 수송하는 일에 몰두하는 한편, 생활비 조달과 귀국알선, 광복군 환국협조, 교포의 생명과 재산보호에 진력했다.


# 광복 후에도 청렴결백한 생활. 대만주재 초대 총영사로 일해


1948년 10월 중국 내란으로 인해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화대표단원은 잔여 교민들을 대만으로 이동시켰고 그 후 1949년 8월 중화민국 대만주재 대한민국 초대 총영사를 역임하다 신병으로 1951년 7월 총영사직을 사직했다. 1957년 7월 귀국해 중일전쟁 중 중경에서 창설된 한중문화협회를 재건해 한.중간에 우호와 문화교류를 꾀하며 청렴결백한 생활을 하다가 1963년 4월 14일 오전 7시 서울 성북구 돈암동 자택에서 숙환으로 서거했다. 선생의 저서로는 유명한 '한중외교사화(韓中外交史話)' '한국사지총서(韓國史地叢書)' 등이 있고, 신규식의 '한국혼(韓國魂)'을 중국어로 번역 소개한 글도 있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했다./사진출처-국가보훈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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