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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서원 158] 김유신-최치원-설총을 배향한 진주 '남악서원'
  • 이승준 기자
  • 등록 2022-12-30 03:57:28
  • 수정 2022-12-30 05:5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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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신 장군신/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이승준 기자] 경상남도 진주시 금곡면 죽곡리에 있는 신라시대의 서원으로, 1983년 7월 20일 경상남도 문화재자료로 지정됐다. 


680년 무렵 창건됐다고 하는데, 신라의 김유신이 이곳에서 꿈속에 나타난 신령에게 삼국통일의 위업을 이루기 위한 가르침을 받았다고 전해진다.


김유신의 본관은 김해(金海)이며 만노군(萬弩郡, 지금의 충청북도 진천)에서 태어났다. 금관가야(金官伽倻)의 시조인 수로왕(首露王)의 12대손이고, 금관가야의 마지막 왕인 구해왕[仇亥王, 구형왕(仇衡王)이라고도 한다]의 증손이다. 조부인 김무력(金武力)은 구해왕의 막내아들로 벼슬이 각간(角干)에 이르렀고, 백제의 동북지역을 점령해 신주(新州)를 설치하고 관산성(管山城) 전투에서 백제 성왕(聖王, 재위 523~554)을 전사시키기도 했다. 부친은 소판(蘇判)의 벼슬을 지낸 김서현[金舒玄, 김소연(金逍衍)이라고도 한다]으로 그도 대량주(大梁州) 도독(都督) 등을 지내며 진평왕(眞平王, 재위 579~632) 때에 백제·고구려와의 전투에서 활약했다. 모친은 진흥왕(眞興王, 재위 540~576)의 아버지인 입종갈문왕(立宗葛文王)의 손녀 만명(萬明)이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김유신이 해, 달, 화성, 수성, 목성, 금성, 토성 등 일곱 별의 정기를 타고 태어나 등에 칠성(七星)의 무늬가 있었다는 이야기가 기록돼 있다. 그리고 그의 출생과 관련해서 수미산(須彌山)의 꼭대기 33천의 천인(天人)이 신라에 태어났다는 이야기와 억울하게 죽은 고구려의 점장이 추남(楸南)이 환생했다는 이야기도 전하고 있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김유신(金庾信)이 655년(무열왕 2)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 재위 654~661)의 셋째딸인 지조[智照, 지소(智炤)라고도 한다]와 결혼해 김삼광(金三光), 김원술(金元述), 김원정(金元貞), 김장이(金長耳), 김원망(金元望) 등 5명의 아들과 4명의 딸을 낳았고, 이들 이외에 김군승(金軍勝)이라는 서자도 있었다고 기록돼 있다. 


하지만 지조(지소부인)와 결혼했을 때 김유신의 나이는 이미 61살에 이르렀고, 그녀가 김유신이 죽은 지 40년 가까이 되는 712년(성덕왕 11)까지 생존해 있었다는 기록을 볼 때 두 사람의 나이 차이는 상당히 컸을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이들이 모두 무열왕의 딸인 지조의 소생인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이 밖에 삼국통일 과정에서 공을 세운 김흠순(金欽純)이 그의 동생이고, 누이동생은 태종무열왕의 왕비인 문명왕후(文明王后)이다. 곧 김유신은 문명왕후의 소생인 문무왕(文武王, 661~681)과 김인문(金仁問)의 외삼촌이기도 하다.


'삼국사기'에 의하르면, 김유신(金庾信)은 15세 때인 609년(진평왕 31)에 화랑(花郞)이 돼 낭도를 이끌었는데 그 무리를 용화향도(龍華香徒)라고 불렀다. 그리고 17세 때인 611년(진평왕 33)부터 중악(中嶽, 지금의 경주 단석산으로 추정]과 인박산(咽薄山, 지금의 경주 백운산으로 추정)에 홀로 들어가 수련을 했다. 


'삼국사기'에는 김유신이 중악에서 수련을 할 때 난승(難勝)이라는 노인에게서 삼국을 병합할 비법(秘法)을 배웠다는 이야기가 수록돼 있다.



김유신은 629년(진평왕 51) 신라가 고구려의 낭비성(娘臂城)을 공격할 때 큰 공을 세우면서 무용을 떨치기 시작했다. 당시 아버지인 김서현을 따라서 중당당주(中幢幢主)로 참전했던 김유신은 신라군이 패전의 위기에 몰리자 적진으로 용감히 쳐들어가 적장을 죽여 신라의 승리를 이끌어냈다. 


642년(선덕여왕 11) 백제가 대야성(大耶城, 지금의 경상남도 합천)을 점령하면서 신라를 압박해오자 김유신은 압량주(押梁州, 지금의 경상북도 경산) 군주(軍主)로 임명됐고, 644년(선덕여왕 13)에는 소판(蘇判)으로 벼슬이 오르고, 같은 해 7개 성을 공격해 승리를 거두었다. 이듬해에는 백제가 매리포성(買利浦城, 지금의 경상남도 거창)을 공격해오자 상주장군(上州將軍)으로 임명되어 다시 출정해 백제군을 패퇴시켰다. 647년(선덕여왕 16) 비담(毘曇)과 염종(廉宗)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에도 진압에 공을 세웠다. 


'삼국사기'에는 당시 왕이 머물던 월성(月城)에 큰 별이 떨어져 병사들이 동요하자 김유신이 한밤에 불붙인 연을 하늘로 띄워 별이 다시 하늘로 오른 것처럼 꾸며 병사들의 사기를 북돋은 뒤에 반란군을 진압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그해 겨울에는 백제가 무산(茂山).감물(甘勿).동잠(桐岑) 3개 성을 공격해오자 방어에 나서 수하인 비녕자(丕寧子)의 활약으로 백제군을 물리쳤다.



백제와 고구려의 공격으로 수세에 몰린 신라는 648년(진덕여왕 2) 김춘추(金春秋)를 당(唐)나라로 보내 원병을 요청했는데, 당나라 태종(太宗, 재위 626~649)은 파병을 약속했다. 압량주 군주로 있던 김유신은 그해에 대야성 수복에 나서 옥문곡(玉門谷)에서 대승을 거두고 백제 장수 8명을 사로잡았다. 


그는 이들을 642년에 대야성에서 죽은 김춘추의 사위와 딸인 품석(品釋)과 고타소(古陁炤)의 유해와 교환했고, 다시 백제의 경내로 쳐들어가 악성(嶽城) 등 12개의 성을 빼앗았다. 그 공으로 김유신은 이찬(伊湌)의 벼슬에 오르고, 상주행군대총관(上州行軍大摠管)으로 임명됐다. 김유신은 이에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백제의 진례(進禮) 등 9개의 성을 공격해 큰 승리를 거두었다. 649년(진덕여왕 3)에는 좌평(佐平) 은상(殷相)이 이끄는 백제군이 신라의 석토(石吐) 등 7개 성을 공격해오자 도살성(道薩城) 아래에서 이들을 대파햇다.


654년(진덕여왕 8) 진덕여왕이 죽은 뒤에 원래는 알천(閼川)이 왕으로 추대됐으나 김유신은 알천과 상의해 진지왕(眞智王, 재위 576∼579)의 손자인 김춘추를 왕으로 세웠다. 그리고 655년(무열왕 2) 태종무열왕의 딸인 지조(智照)를 아내로 맞고, 백제의 도비천성(刀比川城)을 공격해 승리를 거두었다. 이 무렵 그는 백제에 포로로 잡혔던 급찬(級湌) 조미압(租未押)을 통해 백제의 내정을 자세히 파악하고는 백제를 병합할 계획을 본격적으로 추진했다. 김유신은 660년(무열왕 7) 상대등(上大等)으로 임명됐다. 그리고 그해 소정방(蘇定方), 유백영(劉伯英) 등이 이끌고 온 당나라 군대와 연합해 사비성(泗泌城)을 점령하여 백제를 멸망시켰다.



백제가 멸망한 뒤에 당나라는 사비성에 계속 주둔하면서 신라를 침공하려고 꾀했는데, 김유신은 다미공(多美公)과 함께 백제인으로 위장해서 당나라 군대를 공격하자는 계책을 냈다. 그러자 이러한 동향을 알아차린 당나라는 낭장(郞將)인 유인원(劉仁願)이 이끄는 일부 병력만 남기고 철군했다. 무열왕은 백제의 병합에 기여한 공적을 높이 치하해 기존의 17등급 작위 위에 대각간[大角干, 대서발한(大舒發翰)이라고도 한다]이라는 직위를 새로 만들어 김유신에게 주었다.


김유신은 661년(문무왕 1) 소정방이 이끄는 당나라 군대가 고구려의 평양성 공격에 나서자 대장군(大將軍)으로 임명돼 신라군을 이끌고 출병했고, 김인문 등과 함께 평양성 인근으로 진군해 당나라 군대에 군량을 제공했다. 그리고 663년(문무왕 3) 백제의 잔존세력이 왜인(倭人)과 함께 두솔성(豆率城, 지금의 충청남도 청양), 임존성(任存城, 지금의 충청남도 예산) 등지에서 부흥운동을 펼치자 이를 진압키 위해 출병했다. 664년(문무왕 4) 김유신은 왕에게 퇴직을 청했으나 왕은 이를 허락하지 않고 그에게 궤장(几杖)을 하사했다.


한편, 이렇듯 김유신의 정치적 영향력이 커지자 당나라 고종(高宗, 재위 649~683)은 665년(문무왕 5) 사신으로 파견한 양동벽(梁冬碧)을 통해 봉상정경 평양군 개국공(奉常正卿平壤郡開國公)으로 봉하고 2천호의 식읍(食邑)을 지급한다는 칙서를 보내 그를 회유하려 했다. 그리고 666년(문무왕 6)에는 김유신의 맏아들인 대아찬(大阿湌) 김삼광(金三光)을 좌무위익부중랑장(左武衛翊府中郞將)으로 임명해 당나라로 불러들여 볼모로 삼았다.



668년(문무왕 8) 당나라가 고구려 침략에 나섰을 때 김유신은 대당대총관(大幢大摠管)으로 임명됐으나 직접 참전하지 않고, 병사를 이끌고 출병한 문무왕을 대신해 내정을 책임졌다. 고구려를 멸망시킨 뒤에 문무왕은 김유신이 삼국 병합에 세운 공을 치하하면서 새로 태대각간[太大角干, 태대서발한(太大舒發翰)이라고도 한다]이라는 직위를 만들어 그에게 내리고, 5백호의 식읍도 주었다.


김유신은 673년(문무왕 13)에 79세의 나이로 죽었다. 문무왕은 그의 죽음을 슬퍼하면서 채색비단 1천 필과 벼 2천 석을 보내 장례를 치르게 했다고 한다. 그는 금산원(金山原, 지금의 경주시 송화산으로 추정)에 매장됐다. 


'삼국사기'에는 그가 죽기 전에 군복을 입고 병기를 든 수십 명이 유신의 집에서 울면서 나오다가 홀연히 사라지는 기이한 일이 벌어졌고, 김유신이 자신을 보호하던 음병(陰兵)이 떠난 것이라며 죽음을 예견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신라의 제33대 성덕왕(聖德王, 재위 702∼737)은 712년(성덕왕 11) 김유신의 아내인 지조를 부인(夫人)으로 봉했고, 해마다 1천석의 곡식을 주었다. 그리고 제42대 흥덕왕(興德王, 재위 826~836)은 835년(흥덕왕 10)에 김유신을 흥무대왕(興武大王)으로 추존했다. 


경주에 있는 김유신 묘/자료사진하지만 '삼국유사'에는 제54대 경명왕(景明王, 재위 917∼924)이 그를 흥호대왕(興虎大王)으로 추존했다. 그의 묘가 서산(西山) 모지사(毛只寺)의 북동쪽 봉우리에 있다고 기록돼 있다. 김유신은 조선 시대에도 삼국통일의 주역으로 높이 숭배돼 명종(明宗) 때인 1563년(명종 18)에 최치원(崔致遠), 설총(薛聰)과 함께 경주의 서악서원(西嶽書院)에 배향됐다. 


1919년 지방 유림들이 중건하면서 경주에 있는 서악서원을 본떠 남악서원이라고 이름지었다. 


경내에는 사당, 서원, 솟을대문이 남북의 축 위에 배치돼 있고 서원 좌우에 재(齋)가 마주보고 있는 ‘ㅁ’자형의 배치 형태를 띠고 있다. 서원은 정면 4칸, 측면 2칸의 5량 구조 팔작지붕이고 대청이 없이 툇마루를 확장시켜 대청의 역할을 하도록 했다. 


재는 각각 정면 4칸, 측면 2칸으로 돼 있다. 서원 뒤에는 사당이 있는데, 정면 3칸, 측면 1칸의 3량 구조 팔작지붕으로 전툇간이 없는 평면 구조이다./사진-윤정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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