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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유공자를 찾아서 37] 이중교에 폭탄 투척...한국인의 기상과 독립의지 천명한 '김지섭'
  • 이승준 기자
  • 등록 2022-12-27 23:2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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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준 기자] 김지섭 金祉燮, 1884.07.21 ~1928.02.20. 경상북도 안동, 대통령장 1962


만리창파에 한 몸 맡겨 원수의 배속에 앉았으니 뉘라 친할고. 기구한 세상 분분한 물정 蜀道(촉도)보다 험하고 泰(태)나라보다 무섭구나. 종적 감추어 바다에 뜬 나그네 그 아니 臥薪嘗膽(와신상담)하던 사람 아니던가. 평생 뜻한 바 갈길 정하였으니 고향을 향하는 길 다시 묻지 않으리. - 1923년 12월 선생께서 상하이에서 동경으로 향하는 천성환 호에서 지은 시 가운데서 -


# 어려서 사서삼경에 능통했던 천재, 대나무처럼 곧은 성품


김지섭(金祉燮, 1884. 7. 21 ~ 1928. 2. 20) 선생은 1884년 7월 21일 경북 안동군 풍북면(豊北面) 오미동(五美洞)에서 풍산(豊山) 김씨(金氏)인 부친 김병규(金秉奎)와 모친 신천 강씨(信川康氏) 사이에 2남 중 장남으로 출생했다. 자(字)는 위경(衛卿)이고 호는 추강(秋岡), 본관은 풍산(豊山)이다. 어릴 때부터 재주가 비상하고 학문에 출중해 천재의 칭송을 받았고 일찍이 한학을 배워 사서삼경에 능통했다. 특히 집안의 숙부 되는 운재(雲齋) 김병황(金秉璜)의 문하에서 공부해 일찍이 학문을 터득했다.


15세에 인근 예천군 용문면 죽림동(竹林洞) 예천(醴泉) 권(權)씨 가문의 권석희(權錫禧)와 혼인했다. 불의를 저지르는 것을 보면 참지 못하는 대쪽 같은 성격이 남달리 강했고, 이러한 성품은 훗날 조국의 독립을 되찾기 위해 벌인 항일독립운동의 정신적인 뒷받침이 됐다. 선생은 일어를 배우기 시작한지 2개월 만에 습득하고 스물한 살이 되던 해에 상주보통학교(尙州普通學校) 교원과 금산 지방법원(錦山地方法院) 서기 겸 통역으로 재직했다.


1910년 8월 일제의 무력과 강압에 의해 국권이 상실되자 자신도 공직을 분연히 사직하고 고향으로 내려와 김원봉(金元鳳).곽재기(廓在驥).김시현(金始顯) 등과 시국을 담론해 조국독립 운동방략에 대해 숙의했다.


김지섭 교원 임명장(1907)# 경술국치 직후 공직을 그만두고 낙향. 모스크바 극동민족 대회에 참가


1915년 대구 안일암(安逸庵)에서 국권회복단 중앙총부사건에 연루돼 옥고를 치른 친형인 김형섭과 의기가 투합돼 일제의 침략 만행에 비분강개한 마음을 달래며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김응섭과 함께 대구에서 독립운동을 계획했고 그 후 일제치하에 있는 국내에서 더 이상 활동이 어렵게 되자 국외에서 동지들을 규합, 독립투쟁을 조직적으로 전개하기 위해 1920년 5월 단신으로 국경을 넘어 만주로 망명했다. 그 후 만주와 시베리아 등 각지를 다니면서 조국독립운동의 길을 모색하고 있던 중 1922년 4월 경 의열단원인 장건상(張建相)과 러시아로부터 막대한 운동자금을 지원받기로 상의하고 같은 해 11월 동지들과 함께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극동민족대회에 참가하기도 했다. 그리고 같은 해 여름 상해에서 의열단에 가입해 단장 김원봉, 김시현 등과 함께 보다 적극적인 방법으로 독립운동을 추진할 것을 계획했다.


김지섭 통감부 재판소 통역생 임명장(1909)# 중국에서 의열단 가입. 대대적인 국내 폭탄 의거 추진


같은 해 7월 서울로 돌아와 김시현 등과 함께 총독부 등 일제기관을 파괴시키고 일제 고관들을 제거해 민족의식을 고취시킬 것을 다짐한 후 상해의 이현준(李賢俊)으로부터 거사에 필요한 폭탄을 반입하기로 결정했다. 이듬해(1923. 1) 상해에서 개최된 국민대표회의에 참석한 후 국내에서 의거를 결행키 위해 2월에 폭탄 36개(대형 6개 : 건물파괴용, 소형 30개 : 대인살상용)를 천진을 거쳐 국내에 반입키로 했다. 그러나 안동현과 신의주 사이의 국경지방 일대에 대한 일제의 삼엄한 경계로 인하여 반입하기가 곤란하다고 판단, 안동현에 중계소를 설치해 김시현.유석현 등과 함께 폭탄의 일부를 국경 경계망을 뚫고 신의주로 반입시켰고 나머지는 의열단에 입단한 황옥이 직접 서울로 운반했다.




김지섭 의열단 특파원 신임장(1923)같은 해 3월 15일을 기해 총독부, 경찰서, 재판소, 동양척식회사, 매일신보사 등을 동시에 폭파시키기 위해 거사를 추진하다가 사전에 이를 탐지한 일경에 의해 김시현 등 3명이 붙잡히고 또한 수사가 강화되자 의사를 비롯한 김원봉·장건상 등은 삼엄한 일제의 감시망을 피해 겨우 상해로 건너갔다.


이 대대적인 작탄 의거 계획의 이면에는 경기도 경찰부의 한인경부(韓人警部)인 황옥이 관련돼 있다고 하며 상해에 밀파된 황옥은 극동민족대회 회의내용과 독립운동가의 활동을 조사, 기회를 만들어 일망 타진코자 음흉한 계획을 세웠다는 것이 기려수필(騎驢隨筆)과 예심변론과정에 나타나기도 한다.


황옥은 국경시찰이라는 공용출장의 허가를 받아 상해에서 김시현 등과 동지가 되어 의열단에 가입했고 안동에서 서울로 폭탄을 운반할 때에는 폭탄을 포장한 궤짝에 ‘총독부경부공용하물(總督府驚部共用荷物)’이란 쪽지를 달아 무난히 운반하는데 일조를 했다. 그러나 일경은 이러한 모든 사정을 사전에 탐지해 일거에 김시현 등을 붙잡아 투옥하게 됐던 것이다.


# 폭탄 의거 중단되자, 친일부호 상대로 군자금 모집


이렇게 대대적인 작탄 의거를 성사시키지 못한 의사는 동년 12월 당시 서울 시내 무교정(武橋町) 총독부 판사직에 있던 백윤화(白允和)에게 군자금 5만원을 요구했으나 전액(5만원) 지불이 불가능하다고 해 1만원을 출연하라고 했다. 이때 백윤화는 현금 2천원을 경성지방법원 사무실에서 주겠다고 했다가 약속을 어겼는데 동지 윤병구(尹炳球)가 자금지원을 받기 위해 백윤화 집에 갔다가 미리 잠복해 있던 일경들에 의해 피체되고 말았다.



동아일보 1924년 4월 25일자 기사 사본

군자금 확보 계획마저 뜻대로 되지 않자 의사는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해서는 일왕을 타도하는 길밖에 없다는 신념을 갖고 단신으로 일본에 잠입해 일왕을 폭살하기로 결심했다. 이 무렵 일본에서 관동대지진(1923. 9. 1)이 발생해 민심이 흉흉하고 유언비어가 성행하자 일제는 정부에 대한 일본 국민의 불만을 해소하고 민심 수습책의 일환으로 한인(韓人)들이 폭동을 일으켰다는 유언비어를 퍼뜨린 후 무고한 우리 교포 6,600여 명을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 같은 한인 교포들의 비참한 소식이 전해지자 조국독립을 위해 항일활동을 전개했던 독립운동가들뿐만 아니라 온국민이 분개하게 됐다.


이런 민족적 분노가 일어나고 있는 상황에서 의열단은 1924년 동경에서 소위 제국의회(帝國議會)가 개최되고 이때 일제 총리를 비롯한 여러 대신과 함께 조선 총독이 참석한다는 것을 신문보도를 통해 입수하게 됐다. 이에 단원들은 제국의회에 폭탄을 던져 일제의 주구를 처단하고 일제의 만행을 만천하에 알림으로써 이 기회에 관동대지진으로 학살된 우리 동포들의 원혼을 달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왔다고 판단했다.


# 적의 수도 일본 동경에 폭탄결사대원으로 지원하다


이러한 소식을 들은 의사는 의열단장 김원봉에게 일본말에 능숙하고 일본인과 비슷하게 생긴 본인이 최적임자라고 이야기하고 본인이 가겠다고 자원하고 나섰다. 이에 의열단에서는 의사를 일본에 특파해 거사를 실행할 결사대원으로 임명해 필요한 자금을 지원해 주었다. 이때 의사에게는 3년 전에 최윤동(崔允東)으로부터 받은 폭탄 3개가 있었다. 그러나 폭탄을 지니고 일본에 잠입한다는 것은 그리 쉽지 않을 뿐만 아니라 적의 심장부인 동경 국회 의사당에 들어가 일제주구를 처단하는 일이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런 불가능하고 불확실한 거사계획에 앞서 윤자영(尹滋英)은 일본 동경으로 가는 가장 좋은 방법을 의사에게 알려주면서 일본인 친구 두 사람을 소개해주었다. 두 사람은 모두 공산주의자들이었는데 일본 좌가현(佐駕縣) 출신으로 일찍이 동경에서 신문 기자 생활을 한 수도광이(秀島廣二)는 상해에 거주하면서 소련 공산당과 상해 공산당의 연락을 담당하던 자이고 다른 한 명은 일본 장기현(長岐縣) 출신으로 상해에서 이발업을 하던 소림개(小林開)라는 자였다. 이중 소림개의 형인 소림간일(小林幹一)은 삼정물산회사의 석탄 싣는 배인 천성환(天城丸)의 선원으로 그 배가 지금 상해의 대안(對岸)인 포동(浦東)에 정박 중이라는 첩보도 입수했다.


일본 도쿄 김지섭 선생 투탄 의거지의사는 일제를 처단하러 가면서 일본인의 도움을 받는다는 것이 몹시 마음에 걸렸고 비록 일시적으로 그들의 도움을 받기는 했지만 이들의 호의를 액면 그대로 믿지 않고 계속 경계했다. 의열단에서는 외항 선원들이 흔히 밀수와 밀항을 주선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내고 이들과 교섭을 벌여 의사를 의열단 특파원으로 선발해 여비를 주고 천성환호에 승선토록 했다. 이때 의사는 소림개를 통하여 선원 승무원인 소림간일과 흑도리경(黑島理經)을 소개받고 코카인과 아편을 밀수입하기 위해 일본에 가는 중촌언태랑(中村彦太朗)이라고 속이고 폭탄 3개를 행낭 속에 숨긴 채 일본 배에 승선했던 것이다.


# 일본인으로 가장, 거사를 위해 천성환호에 몸을 싣고 장도에 올라


또한 의사는 일본 관헌이 수상히 여길 경우를 대비해 중촌언태랑이라는 가명의 명함 30장을 휴대하고 같은 해 12월 21일 밤 상해에서 천성환호에 몸을 싣고 장도에 올랐다. 이때 의사는 나라와 겨레를 위한 애국충정의 웅지를 다음의 싯귀로 표현했다.


만리창파에 한 몸 맡겨 원수의 배속에 앉았으니 뉘라 친할고. 기구한 세상 분분한 물정 蜀道(촉도)보다 험하고 泰(태)나라보다 무섭구나. 종적 감추어 바다에 뜬 나그네 그 아니 와신상담하던 사람 아니던가. 평생 뜻한 바 갈길 정하였으니 고향을 향하는 길 다시 묻지 않으리.


(萬里飄然一粟 舟中皆敵有誰親 崎嶇世路難於蜀 忿憤輿情甚矣秦 今日潛踪浮海客 昔年嘗膽臥薪人 此行己決平生志 不向關門更問津)


천성환은 상해를 출발한지 약 10일 후인 12월 31일 밤늦게 일본 복강현(福岡縣) 팔번제철소(八幡製鐵所) 안벽(岸壁)에 도착했다. 열흘 동안 하루 한번 내지 두 번 주는 주먹밥으로 끼니를 때우며 배 밑 창고에서 지내는 바람에 신체가 허약해질 대로 허약해져 그야말로 탈진상태였다. 그러나 이미 의열 투쟁에 몸을 던진 기백으로 지옥 같은 하루하루를 이겨낼 수가 있었다. 의사는 밤이 되자 선창에서 나와 선원들의 주선으로 팔번시에 있는 비전옥(備前屋)이라는 여관에서 1924년 1월 3일까지 3일간 유숙했다. 여기에서 며칠간 투숙하게 된 것은 여비가 떨어져 오도가도 못한 실정이었기 때문이었다. 의사가 상해를 출발할 당시 여비로 지급받은 것은 일화로 40원뿐이었다.


승선과 동시에 전송하는 사람에게 3원을 빌려 줬고 배에서는 주먹밥만 먹다 보니 자연히 심부름꾼에게 김치와 물, 담배 등을 종종 차입했고 일본에 도착해서도 여관비, 여비 등 잡비로 인해 급기야 자신의 시계, 외투 등을 모두 전당포에 맡겨 겨우 교통여비를 마련해 동경까지 가게 됐다.


김지섭 공판 사진# 침략의 아성인 일제 왕궁에 작탄하기로 결심하다


1924년 1월 4일에 팔번시를 출발해 동경으로 가던 중 대판(大阪)에서 의회가 휴회했다는 신문 보도를 보았으나 언제 다시 개최한다는 정보를 얻을 수 없어 마침내 계획을 바꾸고 침략의 아성인 왕궁에 투탄키로 결정했다. 이렇게 결심하게 된 배경에는 이미 여비가 떨어져 더 이상 때를 기다릴 만한 여유가 없었고 그런 상태에서 폭발물을 지니고 있다가 검문이라도 받는 날에는 지금까지 노심초사하며 동경에 온 것이 하루 아침에 물거품이 되는 형국이라 이에 최후의 선택을 결행하게 됐던 것이다. 이리하여 일본인들이 숭배하는 왕궁 부근에 폭탄을 던져 일본인을 놀라게 함은 물론 일제의 침략상을 국제적으로 널리 알리고 한국의 독립 의지를 세계만방에 호소하는 지름길이라고 생각하고 왕궁에 폭탄을 던져 성공한다면 제국의회의 거사보다 더 큰 목적을 달성할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갖은 우여곡절 끝에 1월 5일 동경에 도착한 의사는 당일 품천(品川)역을 거쳐 고전마장(高田馬場) 역에서 내려 인력거로 조도전(早稻田)의 서수(瑞穗) 여관에 가서 그곳에서 아침 식사를 하였다. 그리고 오전 11시경 동 여관을 나와 동경시의 지도를 구입하고 의거현장을 확인하기 위해 일비곡(日比谷), 이중교(二重橋), 앵전문(櫻田門) 부근을 세밀히 답사한 후 왕궁과 가장 가까운 다리가 이중교라는 것을 확인하고 이날 오후 7시에 때마침 지나가던 구경꾼 2명과 동행인 것처럼 가장하여 이중교로 쉽게 접근할 수 있었다.


# 이중교에 폭탄을 투척, 한국인의 기상과 독립의지를 천명하다


그 부근을 배회하면서 적당한 기회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던 중 부근을 순찰하고 있던 경관이 다가와서 이제 밤이 되어 구경할 수 없으므로 속히 돌아가라고 하자 동행하던 2명은 즉시 그 자리를 떠났지만 의사가 머뭇거리면서 서성거리고 있자 이중교 입구를 경계하고 있던 일비곡경찰서 순사 강본번영(岡本繁榮)이 “당신은 누구냐”라고 수하하고 의사를 붙들려고 할 때 재빨리 폭탄 한 개를 던졌다. 그러나 불행히도 도화선의 고장으로 뇌관만 발화했을 뿐 폭발되지 않았다. 의사는 순간 번개같이 호위경관을 밀치고 다리(이중교)의 중앙까지 돌진했을 때 성문을 지키고 있던 근위병들이 달려 오므로 나머지 폭탄 2개를 이중교 한복판에 던졌으나 이번 또한 약한 소리의 폭음만 내고 불발되고 말았다.


의사가 던진 폭탄은 상해에서 선편으로 올 때 장기간 배 밑 창고에서 보내는 동안 폭탄에 습기가 배여 있어 그 기능이 작동되지 않아 불발되고 말았던 것이다. 이러는 사이 3, 4명의 근위병들이 달려와 의사는 뜻을 이루지 못하고 그만 피체돼 일비곡 경찰서에 구금됐다. 비록 거사는 성공하지 못했지만 이 사건이 일제에게 주는 충격은 실로 엄청난 것이었다. 의사의 작탄 의거에 당황한 일본 사법성에서는 검사총장 영목(鈴木), 검사정(檢事正) 예심판사 및 검사 등을 동 경찰서에 보내어 엄중한 취조를 했고 당시 신내각을 조직하고 있던 청포(淸浦)는 내각 조직을 중지했고 근신하던 산본내각(山本內閣)은 긴급 각의를 열어 대책을 강구했고 각 신문사의 취재반과 경찰, 헌병들의 계엄차량들이 동경 전 시가지를 누비기도 했다.


일제는 이 사건으로 내무차관 총본청치(塚本淸治)를 견책하고 경시총감 탕천창평(湯淺倉平), 경무부장 정력송태랑(正力松太郞) 및 태홍전구만치(太弘田久萬治) 등을 파면하는 등 경찰 수뇌부를 경질시켰다.


김지섭 건국공로훈장증(1962)이중교에서 붙들린 의사는 동경 시곡형무소(市谷刑務所)에 수감돼 지리하고 악독한 고문에 시달리면서 8개월이나 예심을 받았다. 이때 유학생 학우회, 기독교 청년회, 천도교 청년회 등에서 사식(私食)을 차입하는 등 한국 청년들이 따뜻한 동포애로 보살펴 주자 의사는 동포의 온정에 대해 감격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미안한 마음을 금치 못했다고 한다. 1924년 9월 9일 동경지방재판소에서 1차 공판이 개정되었는데 예심기간 동안 갖은 고문으로 심신이 피폐해 지쳐 있었지만 일제 판사 앞에서 당당히 자신의 독립의지를 피력했다.


# 옥중에서도 일제의 학정을 통박해 일헌들을 아연실색하게 만들다


같은 해 10월 11일에 열린 2차 공판에서 의사는 7, 8매나 되는 장문의 진술서를 펼쳐 들고 ‘우리 조선에 대한 일본 정부의 학정을 논박하고’라고 일제의 침략 식민정치를 통박한 다음 이어서 ‘이번 내가 취한 행동은 침략정치에 도취되고 있는 왜국 관민을 각성시키고 그의 반성을 촉구하기 위함이었다.’라고 당당한 어조로 소신을 밝혔다. 또한 ‘속지말고 일치 협력하여 세계평화를 유지하려는 큰 이상에서 이 일을 감행하였다'라고 비통한 어조로 역설하였다.


이때 방청석은 발 들여 놓을 틈 없이 초만원을 이뤘고 경계가 삼엄했다. 의사는 이어 총독정치의 악랄성과 비인간성을 폭로하고 동양척식의 착취와 동포생활의 빈곤을 들어 일제의 학정을 통박한 다음 ‘한국 사람은 한국의 독립을 위하여 독립선언서에서도 명시한 바와 같이 최후의 일인 최후의 일각까지 항쟁할 것이다’라고 1시간 20분 동안이나 열변을 토하여 일헌(日憲)을 아연실색케 하였다. 끝으로 의사는 사형이 아니면 무죄 석방하라고 주장하였다. 일제 검사는 왕궁 침입은 국가에 대한 반역임을 들어 의사에게 사형을 구형하였다. 이 자리에서 일본인 변호사 포시(布市) 등은 일제의 학정을 사실 그대로 논박하면서 폭탄의 불발 등을 증거로 해 의사의 무죄를 주장했다.


김지섭의 묘비석같은 해 10월 16일에 열린 3차 공판에서 포시 변호사의 변론이 끝나고 재판장이 의사의 답변을 허락하자 의사는 분연히 일어나 말하기를 ‘우리 한국인은 굶어 죽고 맞아 죽고 하는 가운데 나 홀로 적국에 들어와 사형을 받는다 하는 것은 진실로 넘치는 영광이다’라면서 유창하게 답변을 마치고 의연한 태도로 앉았다. 3차에 걸친 공판 후 같은 해 11월 6일 동경지방재판소에서 무기징역을 받았다.


1925년 1월 6일 무기징역을 선고 받은 후 항소를 제기했으나 1925년 8월 12일 동경 공소원(控訴院)의 공소심에서 산기(山崎), 송곡(松谷), 등창(藤倉) 등 세 변호사는 비록 일본인들이었으나 총독통치의 잔학성과 밀정정책(황옥사건을 말함)을 지적해 그 비열한 행위를 논박하면서 끝끝내 의사의 무죄를 주장했였다. 그러나 재판장은 이 변론을 묵살하고 무기징역을 언도했다. 이때 변호사 산기(山崎)가 자의로 상고했는데 이 사실을 안 의사는 상고를 취하시키고 말았다. 시곡형무소에 수감된 의사는 서울 형무소로 이송시켜 줄 것을 요청했으나 묵살되고 천엽(千葉) 형무소로 이감됐다.


# 적지 형무소에서 단식투쟁을 전개, 지조를 지키다 순국하시다


이중교 투탄의 실패와 일제의 처사에 분개한 의사는 옥중에서 단식투쟁을 전개했다. 그러나 동포들의 간곡한 만류가 있었고 감옥내의 의사가 곁을 떠나지 않으므로 굶어 죽을 자유조차 없었다.


1927년 20년 징역으로 감형되어 북해도 망고(網尻) 형무소로 이감설이 떠도는 가운데 1928년 2월 20일 옥사 순국하시니 향년 44세였다.


의사의 죽음에 의문을 품은 일인 변호사 등이 앞장서서 사인을 규명하여 줄 것을 강력히 요구했으나 일제는 이미 화장을 해버린 후였다. 의사의 부고장을 받은 김탁(金鐸)이 의사의 친동생 김희섭(金禧燮)에게 전달해 유해를 고국으로 모셔왔고, 고향 안동의 오미동에 안장했으나 당시 일제의 탄압과 감시로 봉분도 못하고 평장을 한 상태로 있었다. 광복 후 사회 각계인사들이 참석한 가운데 사회장을 치룬 후 예천군 호명면(虎鳴面) 대지동(大枝洞)에 이장해 비로소 평안한 유택이 마련됐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사진출처-국가보훈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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