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메일전송
[독립유공자를 찾아서 36] 무궁화 노래시를 지어 무궁화 사랑과 애국심 높힌 '남궁억'
  • 이승준 기자
  • 등록 2022-12-27 22:44:18

기사수정

[이승준 기자] 남궁억 南宮檍, 1863.12.27 ~1939.04.05. 강원도 홍천, 독립장 1977


"땅이 크고 사람이 많은 나라가큰 나라가 아니고/땅이 작고 사람이 적어도/위대한 인물이 많은 나라가/위대한 나라가 되는 것이다. - 1907년 4월 20일 종로 YMCA 강당에서 행한 「生存競爭」이라는 제하의 연설문 속에서 -


# 통역관 양성소인 동문학에 입학하여 서구문명과 개화사상에 눈을 뜨다


1963년 12월 27일(음) 서울 정동(貞洞) 왜송골(倭松)에서 철종대 중추부 도사(都事)를 지낸 부친 남궁영(南宮永)과 모친 덕수(德水) 이씨 사이에 태어났다. 본관은 함열(咸悅), 이름은 억(檍), 자는 치만(致萬), 호는 한서(翰西)이다. 부친을 일찍 여위어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선생은 1874년 한문 사숙에 입학하여 9년 동안 수학하였으며 16세가 되던 해에 남원(南原) 양(梁)씨와 결혼했다.


21세가 되던 해(1883년) 9월 서울 정동에 있던 외아문(外衙門) 즉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統理交涉通商事務衙門)의 부속기관으로 설치된 동문학(同文學)에 입학했다. 이 학교는 영어를 가르치는 신식학교로서 과학과 일반문화를 가르치지 않는 일종의 통역관양성소였다. 1882년 7월에 임오군란 뒤 청나라의 세력이 뻗치면서 청나라 이홍장(李鴻章)의 막객(幕客)이었던 묄렌도르프(Paul Gorge Von Mollendorff : 穆麟德)가 외아문협판(外衙門協辦) 겸 세관의 책임자인 총세무사로 부임하면서 외아문의 부속기관으로 동문학이 세워지게 됐던 것이다.


# 어전 통역관으로 관직생활을 출발하다


동문학에서 1년간 수학한 뒤 1884년 말 수석으로 졸업한 후 묄렌도르프의 추천으로 세관에서 견습생으로 2년간 일했다. 묄렌도르프가 한로밀약사건(韓露密約事件)의 폭로로 물러나자 1885년 10월 미국인 메릴(Henry F. Merill : 한국명 墨賢理)이 대신 부임하게 되자 선생은 그의 사무실에 계속 근무하게 됐다.


1886년 내부(內部) 주사(主事)로 임명되어 고종 앞에서 어전 통역을 담당하게 됐는데 이것이 관직생활의 첫 출발이었다. 1887년에 이르러 정부에서는 수교한 나라에 외교사절을 파견하게 됐다. 같은 해 5월에 도승지 민영준(閔泳駿)을 판리대신(辦理大臣)으로 일본에, 6월에 내무협판(內務協辦) 박정양(朴定陽)을 전권대신으로 미국에, 조민희(趙民熙)를 영.독.러.이(伊).불 5개국 전권대신으로 임명하여 부임시켰다. 유럽에 파견하게 된 조민희 전권대신 통역수행을 위해 선생을 서기관으로 승진시키고 채현식(蔡賢埴)을 번역관으로 임명했다.


조민희 공사와 선생은 함께 서울을 출발, 유럽 순방에 올라 홍콩까지 갔으나 청나라의 간섭과 방해로 1년 반 동안 홍콩에 체재하다가 소환돼 귀국했다.


1889년 1월 선생은 궁내부(宮內部)의 별군직(別軍職)에 임명돼 4년간 국왕(고종)을 시종했고 1893년에는 경상북도 칠곡부사로 임명돼 지방아전들의 부정부패를 뿌리뽑는 등 선정에도 힘을 썼다. 1895년 4월에는 내부(內部) 토목국장으로 중용돼 종로와 정동 일대 및 육조(六曺) 앞 남대문 사이의 도로를 확장 정비하는 동시에 탑골공원(현 파고다공원) 조성에도 힘을 기울였다.


# 명성황후가 시해당하자 관직을 사임하고 서재필과 함께 '독립신문'을 편집 발행하다


1895년 일본 낭인들이 주축이 돼 명성황후시해사건이 발생하자 덕수궁 대한문 앞에 엎드려 통곡하면서 일인(日人)들의 만행을 규탄했다. 이 후 곧 관직을 사임하고 서재필이 간행하던 '독립신문' 영문판 편집에 종사했다. 서재필은 1896년 12년 만에 귀국해 중추원 고문직에 임명도ㅐㅆ으나 국민을 계몽하기 위해 주 3회 신문을 간행했다.


1면과 2면은 논설과 관보, 잡보, 외국통신을, 3면은 광고를 실었고 1면에서 3면까지는 제호부터 본문 기사에 이르기까지 순 한글을 사용했고 4면은 영문으로 논문을 비롯해 국내의 정치 동향 등을 소개했다. 원고는 서재필이 직접 썼고 편집은 선생이 담당했다.


1896년 7월 서재필.이상재 등과 함께 독립협회를 창립해 중앙위원, 서기, 사법위원, 평의원 등에 선출되고 국민계몽과 자주 자강 국가 건설에 앞장서는 등 독립협회의 주요 지도자로 활약했고 같은 해 11월에 독립협회의 기관지인 '대조선독립협회회보' 창간호가 간행되자 편집을 담당했다. 동 회보는 국한문이나 한문으로 이뤄졌고 1897년 8월 15일에 18호까지 간행됐다.


한편 독립신문에 대한 호응이 매우 높아지자 창간된 이듬해인 1897년부터 국문판과 영문판으로 분리되고 격일제로 간행됐다.


大韓協會報新刊1898년 9월 5일에는 나수연(羅壽淵)·유근(柳瑾) 등과 함께 황성신문을 창간하고 사장에 취임해 국민을 계몽하고 독립협회의 활동을 적극 지원했다. 특히 황성신문은 오늘날의 합자회사와 같은 고금제(股金制)를 한국 신문사상 최초로 채택·운영하여 부족한 자본금을 충당했다는 점에서 특이했다.


# 황성신문 사장에 취임해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하다


같은 해 독립협회는 만민공동회를 개최해 외세의 침략간섭정책을 배격하고 러시아의 세력을 요동반도로 후퇴시키는 한편 자주민권 자강운동을 맹렬히 전개해 큰 성과를 거뒀고, 마침내 중추원(中樞院)을 개편해 한국 역사상 최초의 의회를 개설해 전제군주제를 입헌대의군주제로 개혁하기 직전에까지 이르게 됐다.


그러나 친로수구파들은 독립협회의 의회설립운동이 전제군주제의 입헌대의군주제로의 개혁이 아니라 광무황제를 폐위시키고 공화제를 수립하려는 운동이라고 모략함으로써 이상재와 선생을 비롯하여 독립협회 지도자 17명이 1898년 11월 피체됐다.


서울 시민들은 자발적으로 만민공동회를 개최해 선생을 비롯한 17명의 지도자들의 석방을 요구했고 정부 대신들의 건의도 있어 풀려 나왔으나 1898년 12월 황제의 친로수구파의 탄압에 의해 독립협회는 강제해산당하고 말았다.


1900년 7월 30일에는 러시아가 일본에게 한국을 분할 점령하자고 제의했던 내용이 일본 신문 '대판신보(大阪新報)'에 보도되자 이를 황성신문에 옮겨 실어 러시아와 일본의 한국 침략 야욕을 폭로하고 이를 경계하는 논평을 실어 국민들의 경각심을 촉구했다가 경무청에 20일간 구금되기도 했다.


# 황성신문에 노일협정의 부당함을 게재했다가 3개월 동안 구금되다


또한 1902년 5월 7일에는 1894년 갑오농민운동 이래 줄곧 침략정책을 추진해 오던 일본이 러시아와 맺은 노일협정(露日協定)의 부당함을 논박한 사설을 '황성신문'에 게재했다가 5월 총무원 나수연과 함께 또다시 구속돼 3개월 동안 심한 고문을 받고 8월에 석방됐다.


1903년 4월 대한제국 군부의 영관 유동근(柳東根)이라는 자가 선생과 황성신문 나수연이 일본에 망명 중이던 박영효 등과 공모해 의병을 일으키려 한다고 모함하여 선생은 다시 경무청에 구속됐으나 진상이 밝혀져 4개월 뒤에 무죄로 풀려났다. 하지만 이를 계기로 황성신문의 사장직을 사임하게 됐다.


1905년 3월에 황제의 요구로 다시 관직에 나아가 경상도 성주 목사로 부임해 선정을 베풀었다. 그러나 일진회 의원으로서 친일파인 경상도 관찰사 이근택(李根澤)의 가혹한 수탈에 항거하여 동년 9월 사임하고 서울로 돌아오고 말았다.


# 현산(峴山)학교를 세워 청년들에게 애국계몽운동을 실시하다


일제가 동년 11월 무력으로 대신들을 위협해 을사5조약을 강제로 체결하고 국권을 박탈하자 이에 비분강개해 건강을 해치기도 했으나 다음 해 2월 다시 강원도 양양군수로 임명됐다. 이때 민지개발(民智開發)에 뜻을 두어 양양군청 뒷산에 현산(峴山)학교를 세워 청년들에게 구국 교육을 실시하는 등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하는 한편 조림 녹화 사업에도 노력했다.


關東會任員1907년 7월 19일 일제가 헤이그밀사사건을 구실로 광무황제를 강제 양위시키고 7월 24일에는 정미7조약을 강제체결해 일본인 차관을 임명하는 소위 차관정치를 시작했고, 8월 1일에는 대한제국의 군대를 강제 해산시키는 등 침략을 강화하자 양양군수의 관직을 사임하고 상경했다.


같은 해 11월 풍전등화처럼 위태로워진 국운과 난국을 수습하고자 권동진(權東鎭).오세창(吳世昌).윤효정(尹孝定).장지연.정운복(鄭雲復) 등과 함께 대한협회(大韓協會)를 창립한 후 평의원으로 활동하다가 1908년 2월에 그 회장으로 추대돼 애국계몽운동에 헌신했다.


# 대한협회 회장으로 추대돼 민족실력배양에 힘쓰다


대한협회는 1906년 3월에 설치돼 1907년 8월에 해산된 대한자강회의 후신으로써 교육과 산업을 일으키고 민족의 실력을 배양해 국권회복의 기초를 만들려고 한 것이었다. 이 협회의 기본강령은 교육의 보급, 산업의 개발, 생명재산의 보호, 행정제도의 개선, 관민폐습의 교정, 근면저축의 실행, 권리의무 책임의 복종의 사상을 고취한다는 7개조를 내세우고 있다. 이 협회는 기관지로 '대한협회월보(大韓協會月報)'와 '대한민보(大韓民報)'를 발간해 계몽운동에 노력했다.


1908년 4월부터 '대한협회회보(大韓協會會報)' 잡지를 창간해 회장인 선생은 7대 강령에 대한 설명과 독립의 중요성을 강조한다는 글을 게재해 읽는 이로 하여금 감동을 주었다. 동 잡지 2호(1908. 5. 25刊)에는 '思想과 能力의 相須'라는 논설을 실어 사상에도 능력을 필요로 하고 능력에도 사상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역설했고, 3호(1908. 6. 25 刊)에도 1면 논설란에 '사회조사(社會調査)'라는 글을 투고했다.


당시 일제는 대한협회의 활동에 대해 음으로 양으로 탄압했고 또한 회원들 간에 강경, 온건론으로 대립돼 통합이 어려워지자 선생은 1908년 6월 회장직을 사임했다.


교육에 대한 남다른 관심과 열정을 가지고 있던 선생은 1908년 1월 '장학월보(獎學月報)'의 잡지가 창간되자 창간호에 축사를 실어 교육보급의 중요성을 일깨워 주고 그 전도를 축복했고 서울, 경기, 충청도 인사들이 기호학회(畿湖學會)를 설립해 같은 해 8월에 월보가 창간되자 서울 출신으로서 축사를 게재하여 기호인의 긍지를 갖고 월보를 계속 간행해줄 것을 당부하기도 했다.


# 순한글 '교육월보'를 간행해 어려운 학생들의 통신강의록 교재로 활용하다


국민교육의 필요성을 절감하던 선생은 대한협회 회장직에서 물러나면서 평소 가깝게 지내고 있던 대한협회 교육부장 여병현(呂炳鉉)을 인쇄인으로 해 '교육월보(敎育月報)' 잡지를 순 한글로 간행했다. 동 잡지는 한글교육과 독서를 통한 국가발전과 일제로부터의 주권회복을 발행취지로 천명한 일종의 통신강의록으로써 학교에 다니지 못하는 불우한 청년을 대상으로 한 것이었다.


그 내용을 보면 조선과 세계의 역사, 지리, 산술, 물리학, 생리학, 그리고 풍속개량을 목적으로 한 가정학과 초보적인 한문, 상식 등을 실었으며 후에 농업과 형법에 대한 내용을 첨가했다.


그리고 가정교육에도 남달리 관심이 있어 뒷날 1918년에 이르러 '가정교육(家庭敎育)'이란 단행본을 간행하기도 했다.


前皇城新聞社長 南宮檍氏被檢: 牟谷學校長으로서 育英事業에 從事하든中1909년 봄 '교육월보'가 재정난으로 허덕이고 있을 때 강원도 출신 인사들로 설립된 관동학회(關東學會) 회장에 추대됐다. 이 학회는 1907년 3월에 결성됐고 서울에 학회건물이 있었고 선생의 부친과 조부는 서울에서 살았으나 그 윗 대(代)는 홍천(洪川)에 묻혀 있으므로 강원도인이라 해 선생을 학회의 회장으로 추대했던 것이다.


이 무렵 송병준·이용구 중심의 일진회가 날뛰면서 한일합방 성명서를 공표하자 이에 대해 선생은 일진회의 주장이 언어도단이라고 반박하고 즉각 황성신문에 1909년 12월 11일자에 잡보 '오학회의결(五學會議決)'이란 제목하에 규탄의 성명서를 발표했다. 5학회는 관동학회를 비롯해 기호(畿湖).서북(西北).교남(嶠南).호남(湖南)학회 등이었다.


이듬해인 1910년 8월 29일 일제의 강압과 무력에 의해 한국이 병탄되자 관동학회도 해산당하고 말았다. 그뒤 선생은 민립대학설립운동이 전개될 때 박은식.노백린.양기탁 등 애국지사들과 함께 이 운동에 동참했으나 일제 당국의 대학설립 불허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 학생들에게 애국가사와 무궁화를 보급해 민족의식을 고취하다


1910년 나라가 병탄되자 독립회복을 위해서는 교육을 통해 신세대들에게 민족의식과 독립사상을 각성시켜야 한다고 생각하고 새세대 교육에 직접 뛰어들기로 했다.


같은 해 11월 배화학당의 교사가 돼 영어와 붓글씨, 역사, 가정교육, 국문법 등을 가르쳤다. 한편 선생은 또 야간에는 상동교회 안에 있는 청년학원 원장을 겸하면서 독립사상 고취와 애국사가 보급, 한글서체 창안 및 보급에 매진했다. 특히 선생은 배화학교에서 학생들에게 애국가사를 보급했고 또 전국 13도를 무궁화 꽃으로 수놓아 삼천리 금수강산을 상징한 무궁화 수본을 고안해 여학생들에게 수놓게 함으로써 민족의식 고취에 큰 영향을 끼쳤다.


건강이 쇠약해지면서 친지들의 권유로 1918년 학교를 사임하고 선대의 고향인 강원도 홍천군 서면(西面) 모곡리(牟谷里 : 보리울)로 낙향했다.


이후 기독교에 귀의한 선생은 1919년 9월 교회를 세우는 한편 4년제 보통학교 정도의 사립모곡학교를 세워 농촌 청소년 교육운동에 주력하게 됐다. 교육비는 무료였고 학생들에게 독립정신을 심어주기 위해 학교 안에 무궁화 묘목을 심어 전국 기독교계 학교에 보급해 무궁화 사랑 운동을 전국적으로 전개했다.


# 강원 홍천에서 모곡학교를 설립하여 농촌청년들에게 독립정신을 심어주다


일제의 감시에도 저작에도 힘을 써 1924년에는 4권으로 된 '동사략(東史略)'을 저술해 우리 역사를 가르치는 한편 애국적 찬송가와 시를 지어 전국의 교회와 기독교계 학교에 보급했다. 선생이 1922년에 지은 ‘일하러 가세 삼천리 강산 위해’는 지금까지도 널리 애창되는 노래이다.


1. 삼천리 반도 금수강산 하나님 주신 동산 이 강산에 할일 많아 사방에 일꾼을 부르네 곧 금일(今日)에 일 가려고 누구가 대답을 할까

(후렴)

일하러 가세 일하러 가 삼천리 강산 위해

하나님 명령 받았으니 반도 강산에 일하러 가세


2. 삼천리 반도 금수강산 하나님 주신 동산 봄 돌아와 밭갈 때니 사방에 일꾼을 부르네 곧 금일에 일 가려고 누구가 대답을 할까


3. 삼천리 반도 금수강산 하나님 주신 동산 곡식 익어 거둘 때니 사방에 일꾼을 부르네 곧 금일에 일 가려고 누구가 대답을 할까


1923년에는 무궁화 노래시를 지어 무궁화 사랑과 애국심을 높히는 데 큰 역할을했다


금수강산 삼천리에 각색 초목 번성하다

춘하추동 우로상설(雨露霜雪) 성장 성숙차례로다

초목 중에 각기 자랑 여러말로 지껄인다.

복사 오약 변화해도 편시춘(片時春)이 네 아닌가

더군다나 벗지 꽃은 산과 길에 변화해도

열흘 안에 다 지고서 열매조차 희소(稀少)하다

울밀 황국(黃菊) 자랑스런 서리 속에 꽃 핀다고

그러하나 열매 있난 뿌리로만 싹이 난다

특별하다 무궁화는 자랑할 하도 많다

여름 가을 지나도록 무궁무진 꽃이 핀다

그 씨 번식하는 것 씨심어서 될 뿐더러

접 붙여도 살 수 있고 꺼꽂이도 성하도다.

오늘 조선(한국) 삼천리에 이 꽃 희소(稀少) 탄식말에

영원 번창 우리꽃은 삼천리에 무궁하다


南宮檍氏 自宅에서 永眠[肖]1925년 3월 모곡학교를 6년제 사립학교로 인가받아 유지들로부터 기부금을 얻는 한편 건물을 증축하고 역량있는 교사를 채용하여 내실을 기했다.


1929년 4월에는 청소년을 위한 사회집 '조선 이야기'를 저술해 모곡학교 한국사 교육의 교재로 활용했다. 조선 이야기는 전부 5권으로 된 인물 중심의 사서라 할 수 있는데 청소년의 자주독립정신과 우리 역사에 대한 자부심을 복돋워 주기 위해 집필했다.


# 청소년들의 자주독립정신과 역사인식을 심어주기 위해 조국광복기원제단을 설립하다


선생은 이 무렵 보리울에 일제 몰래 조국광복기원제단을 쌓고 그곳에서 조국의 광복을 기도하였으며 서울에 갈 때는 일제가 부설한 철도나 일인이 운영하는 버스를 타지 않고 수백리 길을 걸어가는 투철한 항일의식을 보이기도 하였다.


이처럼 만년에도 청소년 교육 및 무궁화와 애국가사 보급운동을 통한 애국계몽운동에 매진하던 선생은 만 70세가 되던 해 일찍이 학생들에게 가르친 '무궁화 동산'이라는 노래를 가르쳤다는 이유로 1933년 11월 일제에 의해 소위 ‘십자가당(十字家黨)’사건으로 피체되고 말았다.


우리의 웃음은 따듯한 봄바람 춘풍을 만난 무궁화 동산

우리의 눈물이 떨어질 때마다 또다시 소생하는 이천만

(후렴)

빛나가라 삼천리 무궁화 동산

잘살아라 이천만의 고려족(高麗族)

백화(百花)가 만발한 무궁화 동산에 미묘히 노래하는 동무야

백천만 화초가 웃는 것 같이 즐거워하라 우리 이천만


이 시를 통해 조국광복을 확신하는 선생의 예지를 확인할 수 있었다. 선생은 피체된 뒤 1935년 2월에 1년 형(刑)이 확정되었지만 집행유예로 풀려날 때까지 1년 3개월 동안 서울 서대문 감옥에서 옥고를 치뤘고 출옥 후 옥중 후유증으로 병고에 시달리다가 조국광복을 보지 못하고 1939년 4월 5일에 77세를 일기로 서거했다.


선생이 그토록 애정을 갖고 키워 왔던 모곡학교는 선생이 피체된 후 일제의 탄압으로 공립학교로 전환됐다가 학생들이 입학을 거부하는 사태가 일어나는 등 우여곡절 끝에 결국 폐쇄되는 비운을 겪었으나 광복 이후 선생의 문하생들에 의해 재건되어 모곡초등학교와 한서중학교로 계승돼 오고 있다./사진출처-국가보훈처 

0
  • 목록 바로가기
  • 인쇄


 성공의 길을 찾아서더보기
 황준호의 융합건축더보기
 칼럼더보기
 심종대의 실천하는 행동 더보기
 건강칼럼더보기
 독자기고더보기
 기획연재더보기
 인터뷰더보기
모바일 버전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