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메일전송
[서울시 구석 구석 143] 상여꾼 집단 ‘상투골’에서 유래된 ‘상도동’
  • 박광준 기자
  • 등록 2022-12-25 17:54:45
  • 수정 2024-04-10 10:38:16

기사수정

지금은 쉽게 볼 수 없는 상여꾼 모습/사진출처-한국학중앙연구원 [박광준 기자] 상도동의 동명은 전일에 이곳에 상여꾼이 집단으로 거주해 ‘상투골’이라고 정하던 데에서 유래됐다고 한다. 상도동의 현 위치를 살펴보면, 구의 중앙에 위치한 동으로 동쪽으로는 흑석동, 서쪽으로는 대방동과 신대방동, 남쪽으로는 관악구 봉천동, 북쪽으론 노량진동에 인접하고 있다. 


# 상도동의 자연부락과 자연지명 명칭


먼저 상도 제1동에는 숭실대학교 밑 로터리에서 봉천동으로 넘어가는 고개로 ‘살피재’가 있다. 옛날 이곳은 수목이 울창해 도둑이 많이 출몰해 이 재를 넘기 전에 사람들이 ‘살피고 가라’고 해 그러한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또 ‘사당이고개’(숭실대학교에서 사당 4동으로 넘어가는 고개)는 옛날 이 고개 부근에 큰 사당이 있다고 해 붙여진 이름이고, ‘병목꿀고개’(상도1동 국민주택 일대)는 옛날 골짜기 모양이 병목처럼 아래쪽이 좁다 해 붙여진 이름이고, ‘여박굴산’(상도 1동 산 49-36번지)은 숭실대학교 뒷산 이름으로 일명 ‘십자가산’이라고도 불렀다. 


‘한전사택’은 일제 때 한전 작원들이 이곳에 살았다 해 붙여진 이름이고, ‘능꿀’은 옛날 효령대군의 자제 서원군의 능이 있다 해 붙여진 이름으로 상도 1동 413, 416번지 상도성결교회 부근 일대를 일컫는데 지금은 능의 흔적도 찾아 볼 수 없다. 

 

1930년대의 나무시장‘나무시장’은 지금의 미륵암과 숭실대학교 부근으로, 가난한 사람들이 자녀들의 학비조달을 위해 나무를 했다가 새벽 일찍 이곳에서 팔고 다시 나무를 하러 가던 곳으로 주로 장작.솔개비.깔지 등이 매매됐고 이곳의 부자들과 일본인들이 사갔다고 한다.


‘한증막(상도 1동 288번지)은 한증목욕탕이 있어 붙여진 이름으로 과거에는 ’우정목욕탕‘이 자리잡고 있었으나 현재에는 사라졌고 이곳 주민과 버스정류정 표시판에서 ’중앙하이츠‘로 변경됐다. 


상도 1동 산 49번지에는 백운암이라는 암자가 있어 ’백운대‘라고 불리어지는데, 이곳에는 백운파출소도 있다. 


소쇠울개천이어 상도 제2동에는 ’소쇠울개천‘이 있었다. 이 개천은 상도 2동 대림아파트 앞에 있던 개울의 이름으로 자금은 복개돼 보이지 않으나 상도동 전체를 통과해 흐르는 개천이었다.


’장승백이‘는 상도 2동 영도시장 맞은편 삼거리의 노량진파출소, 우리은행 상도지점 앞에 있는 곳으로, 조선시대 장승이 세워진 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고, ’흐리목고개‘는 상도 2동 대림아파트에서 살피재로 넘어가다 우측 봉천동 은천초등학교의 흐리목이라는 마을로 들어가는 고개를 말한다.   


장승백이

’꽃밭재‘는 상도 2동 동사무소 앞 동작교육구청과 영동시장 사이를 말하는 것으로, 옛날 이곳에는 여러 가지 꽃들을 많이 재배해 팔았다고 해 붙여진 이름으로, 일명 화전촌이라 했다. 


’만양고개‘(상도 2동 대림아파트 옆에서 넘어가는 고개)는 옛날 이 고개가 워낙 길어서 ’마냥 넘어간다‘고 한데서 붙여진 이름이고, ’마치고개‘(지금의 상도 2동 27-29번지 일대)는 임진왜란 당시 이곳에 칼과 징을 만드는 대장간이 많이 들어서면서 밤낮 망치소리가 난다고 해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밤골마을/이젠 사진 속으로만 남은 밤골마을의 얼굴 밤골상회 밤골‘은 옛날 이곳에 밤나무가 많이 있다고 해 붙여진 이름이고, ’배나무골‘(상도 2동 10통 일대)은 배나무가 많이 했다고 해 붙여진 이름이다. 


상도 제3동에는 ’성대골‘이 있다. 이 굴은 성대시장 입구 국사봉 골짜기까지의 마을 이름으로 옛날 이곳에 신씨 성을 가진 부자가 살았다. 그가 죽어 묘자리를 구해 땅을 파헤쳐보니 복숭아꽃이 한아름 나왔다고 한다. 그때부터 성도화리 라고 부르다가 차츰 성도아리.성도리.성대리로 변천됐다고 한다. 


’주막거리‘는 상도 3동 우체국이 있는 지역으로 옛날 수원.안양쪽 사람들이 한양에 입성하기 위해서는 이곳을 지내야 한다. 이 지점에 도착하면 해가 저물어 하룻밤을 묵고 다음 날 한양으로 들어가야 했다고 한다. 그래서 이곳에 숙박을 할 수 있는 주막이 많이 생기면서 붙여진 이름이다. 


’빈수골‘은 ’빙수골‘이라고 한다. 현 성대시장 뒤쪽 사자암이 위치한 아래 지역을 가리킨다. 이 지역에 항상 찬물이 나는 우물이 있었다 해 빙수골로 불려지던 이름이 빈수골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상도 제4동에는 ’강적골‘ 마을이 있다. 지금의 상도 4동 210.220.223번지 일대와 양녕대군  묘소가 있는 일대로서, 이 마을 이름은 양녕대군의 시호가 강정공이다. 이곳에 묘소가 생기고부터 강정골로 불려지다가 강적곡으로 변한 것이라 한다. 옛날에 강적골고개에는 도둑이 많이 출몰했다고 한다. 또 약수터 뒤쪽 봉천고개 학교부지에는 ’강정사‘라는 절이 있다고 하나 지금은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다. 


’능고개‘는 상도 4동 국사봉중학교에서 봉천동으로 넘어가는 고개이름으로, 지금의 지덕사가 처음에는 중구 도동에 세워져 문종도 같이 살고 있었으나, 워낙 살림이 빈궁해 끼니를 제대로 잊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추운 겨울날, 한 노승이 이 집을 지나다가 밤이 깊어 묵고 가기를 청하는지라 불러들여 불을 지피고 죽을 끊여 중에게만 대접했다. 이튿날 노승은 은혜에 보답키 위해 그 주인을 데리고 이 지점에 와서 “장차 죽거든 이 곳에 묘를 쓰라”고 일러주었다. 그로부터 몇 년 후 그 주인이 죽자 중이 가르쳐준 능고개에다 묘를 썼더니 그때부터 자손이 번창하고 가세가 일어났다고 한다. 


# 상도동의 사적


장승백이 근처에 있는 헌책방국사봉 북쪽 상도 4동 산 65-42, 217-1에는 세종대왕의 맏형인 양녕대군의 사당인 지덕사와 그의 묘소가 자리하고 있다. 원래 지덕사는 남대문 밖 서부 도저동에 있던 것을 일제가 1912년 1월 묘소가 있는 이곳으로 이전시켰다. 


지덕사는 숙종 원년(1675)에 양녕대군의 외손이 되는 우의정 허목이 왕에게 아뢰어 사당을 세우고 자손을 등용토록 하니 숙종이 봉사자를 하문하고 사손을 불러 벼슬을 제수한 후 유사에게 명하여 대군의 사당을 남대문 밖에 세우게 했다. 다음 해 사당집이 이룩돼 지덕사로 명칭하고 허목이 지덕사에 대한 사적을 지어 현판에 써서 걸었다. 


서울특별시는 1972년 8월 30일 사당 건평 9평과 묘소 11,888평의 지덕 부 묘소를 서울특별시유형문화재 제11호로 지정했다. 


지덕사또 지덕사 부 묘소가 위치한 남쪽산을 ’국사봉(國思峰)‘ 또는 국사봉(國師峰)’이라고 일컫었다. 이 산은 관악구 봉천동과 경계를 아루는 산으로 글자 그대로 양녕대군의 이 산에 올라 나라를 생각하고 상감을 걱정했기 때문에 불리어진 이름이다. 그는 형제간에 우애가 지극해 이 산에서 멀리 경복궁을 바라보면서 나라와 세종의 일을 걱정했다고 해서 ’국사봉(國思峰)‘이라 했다. 


한편, ’국사봉(國思峰)‘으로 칭하게 된 연유는 조선왕조 건국 당시 무학대사가 태조의 한양도읍을 도우면서 한양을 돌아보니, 한양 주변 산세 중에 이곳 국사봉이 백호가 돼 한양 외곽으로 빠져나가는 형국임을 알고 그 맥을 잡아 백호가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사자암‘을 짓고, 무학대사를 국사로 보고 ’국사봉(國師峰)’이라 부르게 됐다는 것이다. 


고려 때부터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미륵암은 지금으로부터 500여년전 조선 성종 때 제주고씨 문중의 이조참판.의금부사를 역임한 고한경이 같은 해 10월 7일 사망해 이곳에 장례를 모시려고 광중을 파던 중 금불암이 발견되자 이곳을 피해 약 150m 떨어진 지금의 숭실대학교 운동장에 묻었다고 한다. 


그 후 오랫동안 땅속에서 청기와가 발견돼 오다가 200여년이 흐른 조선 말엽에는 이곳 앞 큰 길이 한양.과천.안양을 통하는 대로가 됐고 그 밑에는 약수터가 있었고 미륵은 버려진 채로 덤불 속에 묻혀 있었다. 


그런데 지금부터 200여년 전에 단씨라는 사람이 포목장사를 하면서 매일 이곳을 지나면서 샘물을 마시고 쉬어가곤 했는데, 어느 날 단씨의 꿈속에 미륵이 나타나 ‘내가 밤마다 이슬을 맞고 있으니 이슬을 맞지 않게 집을 마련해 달라’고 호소했다. 단씨는 이상히 여기고 이튿날 꿈에서 지시하던 약수터에서 10여m 떨어진 곳을 헤치고 보니 나무와 덤불 속에 꿈속에서 나타난 미륵이 발견됐고 그는 이곳에 암자를 짓고 미륵을 모셨다. 


그 뒤 김씨와 강씨라는 사람이 관리를 하다가 일제 때 고명진씨가 다시 법당을 중건했으나 관리소홀로 부실하던 중 속명은 이장수, 호는 해봉, 법명은 진법이라는 이가 마륵암을 인수해 퇴락하던 사찰을 정비하고 약사전을 증축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또한 이 미륵암 사찰 경내에는 보호수로 지정된 200년 묵은 느티나무가 자리잡고 있다. 


사자암은 국사봉 북쪽 산기슭에 있다. 이 절은 조선 태조 5년에 무학대사가 도읍터를 물색하라는 태조의 명을 받고 한양의 지세를 살펴보니, 한양의 외백호인 만리현이 백호의 형상으로 그 세력이 급하고 위대해 분망히 움직이는 기운이 많기 때문에, 백호형인 만리현의 맞은편 관악산 호압사를 지어 백호를 눌렀고, 이곳에 사자암을 지었다. 


약수암은 삼진아파트 옆에 있다. 주민들이 부르는 약수터는 약수암 안에 있다. 이 절은 20여년전 당시 지덕사 이사장이 지덕사 소유자 소유의 땅을 승려에게 임대하면서, 이곳에 절을 지었다. 


서울 시민들 중에는 상도동의 위치는 몰라도 장승배기라고 하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그 명성이 널리 알려졌다. 


장승지금은 사라져가는 것들 중의 하나이지만 예전에는 동네 어귀나 사찰 입구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것이 장승이다. 장승은 경계의 표시이기도 했지만 이수를 적어 10리나 15리마다 세워둠으로써 이정표 역할을 했다. 특히 악귀를 막는 수호신의 기능을 하기도 했다. 


지금은 현대식 건물과 주택들이 서 있지만 당시의 장승백이 일대는 인가가 없고 낮에도 맹수가 나타날 것만 같은 울창한 나무숲이었다. 정조가 1777년 왕위에 오르자 아버지 사도세자를 한시도 잊지 못해 화산에 있는 아버지의 묘소인 현륭원에 자주 전배를 했다. 현륭원으로 가는 정조의 어가는 이곳에서 한 번쯤 쉬어가야 했으나 아름드리 나무숲이 우거진 이 지점에서 쉴만한 곳이 없었다. 


이에 정조는 “이곳에 장승을 만들어 세워라. 하나는 장사모양을 한 남상장승을 세워 천하대장군이라 이름을 붙이고 또 하나는 여상을 한 지하여장군으로 하여라”고 명했다. 어명으로 장승백이에는 곧 두 개의 장승에 세워지게 됐다. 그래서 이때부터 이곳은 ‘장승백이’란 지명이 붙게 됐고, 정조는 아버지의 묘소를 참배하러 가는 길에 이 장승 앞에 어가를 멈추고 쉬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1930년대에 일본인들이 미신과 무속을 타파한다면서 장승을 없애버리고 그 언저리에 아카시아 몇 그루만 남아있다. 그러다가 근래에 주민들의 노력에 의해 다시 세워졌다. 


상도동의 교육기관으로는 숭실대학교가 있다. 이 학교는 1971년 1월 대전대학을 통합해 숭전대학으로 교명을 고쳤으나 1983년 3월에 대전대학을 분리시킴으로써 1986년 11월 25일부터 옛 이름인 숭실대학교로 됐다. 


숭실대학교 전경숭실대학교의 효시는 당시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로 한국에 파견된 배위량 박사가 1897년 10월 10일 평양에서 그의 사랑방에서 중학과정을 가르치면서 ‘숭실학당’이라고 부른데서 비롯됐가. 그 뒤 1906년 선교본부로부터 대학부 설치인가를 받아 대학교육을 실시했고, 1908년 숭실대학 최초의 졸업생 2명을 배출한다. 그 당시 숭실대학의 운영은 한국에 파견된 선교부 전체의 합의에 의한 연합교육기관의 성격을 띠었다. 


숭실대학교는 국권의 회복, 을 최우선 과제로 심고 독립운동에 앞장섰고 105인사건을 위시해 국민회사건에 깊이 관여했고, 3.1독립운동.광주학생운동에 참여해 선도적 역할을 했다. 1938년 숭실대학은 일제의 신사참배에 단호히 반대해 같은 해 3월 4일 최후의 졸업식을 끝으로 대학과정을 시작한 지 39년만에 폐교하게 된다. 


광복 후 서울에서 숭실대학 재건 운동을 시작했으나 6.25동란으로 뜻을 이루지 못한다. 숭실대학 재건운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휴전으로 서울환도가 이뤄진 이후의 일이다. 1954년 4월 15일 설립인가를 얻어 초대학장으로 한경직 목사가 취임했다. 재건 후 임시교사로 사용하던 영락교회 부속건물에서 현재의 ‘상도동 캠퍼스’로 이전해 1957년 6월 본격적인 발전의 기틀을 다지게 됐다. 


한편, 중학교로는 국사봉중학교, 장승중학교, 강남여자중학교, 상도여자중학교가 있고, 초등학교로는 강남초등학교, 상도초등학고, 신상도초등학교가 있다. 

0
  • 목록 바로가기
  • 인쇄


 한국의 전통사찰더보기
 박정기의 공연산책더보기
 조선왕릉 이어보기더보기
 한국의 서원더보기
 전시더보기
 한국의 향교더보기
 궁궐이야기더보기
 문화재단소식더보기
리스트페이지_004
모바일 버전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