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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 구석 구석 142] 대방동 접경의 새로 생긴 마을 ‘신대방동’
  • 박광준 기자
  • 등록 2022-12-24 20:03:12
  • 수정 2024-04-10 10:3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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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라매공원 둘레길 코스 5분만에 둘러보기/영상출처-동작구


[박광준 기자] 신대방동 동명의 유래는 대방동 접경의 새로 생긴 마을이라 붙여진 이름이다. 

보라매공원/사진-박광준 기자

신대방동의 연혁을 살펴보면, 조선시대에는 경기도 시흥군 하북면 번대방리로 불리다가 1914년 3월 1일 조선총독부령 제11호에 의해 경기도 시흥군 북면 번대방리로 개편됐다. 


이후 1936년 4월 1일 조선총부령 제8호에 의거 이 번대방리에 중 상도천 우안지역이 먼저 경성부에 편입돼 나갔고 상도동 좌안지역은 경성부 편입에서 제외되어 시흥군 동명 번대로 남아 있었다. 


그런데 1949년 8월 13일 대통령령 제159호에 따라 서울의 행정구역이 또 확장됐다. 이때 경기도 시흥군 번대방리가 구로리.도림리와 서울시에 편입됐고, 이어 1950년 3월 15일 구 조례 제 10호로 신대방동 등의 이름으로 바뀌어 오늘에 이른다. 


# 신대방동의 자연부락 명칭과 자연지명


신대방동 우성아파트 1970년대 민주노조운동의 상징 원풍모방 노조가 있던 자리에는 1985년 우성아파트가 들어섰다.현 신대방동 471-474번지 일대에 있던 ‘쪽박골’은 옛날 이 마을에 우물이 있었는데, 늘 쪽박으로 물을 떠먹었다고 붙여진 이름으로, 일명 ‘세모골’이라고도 불렀고, ‘비선거리’는 옛날 이 곳에 비석이 많았다 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전 원풍모방 앞 삼거리 즉, 신대방동 584.586번지 일대이다. 


사진-1970년대 민주노조운동의 상징 원풍모방 노조가 있던 자리에는 1985년 우성아파트가 들어섰다.


‘안말’은 마을 안쪽에 있는 마을이라 해 붙여진 이름으로 현 문창초등학교이고, ‘모자원’은 6.25동란 후 당시 이승만 대통령이 미망인과 그 자녀를 위해 64가구의 주택을 마련해 이곳에 살게했다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일명 ‘과부촌’이라고도 불렀다. 


사진/모자원고갯길 (사진-박광준 기자)‘중국촌’은 현 신대방동 338번지 일대로 광복 직후 5-6년간 중국인 4가구가 이 곳에 농사를 지으면서 살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우와피’ 또는 ‘쇠내피’라고 하는 지명은 소가 누워 있는 지형이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고, 옛날에는 현재의 도림천이 넓고 수심이 깊어 도림천을 강변이라 불렀다. 특히 물이 맑아 지금의 신림 4동 파출소 부근을 옥수라 불렀다. 


현재 문창초등학교 정문 앞 강속에 높이 10m나 되는 큰 바위가 있었는데, 이 바위에는 직경 2자 가량의 크기로 글씨(?)가 새겨져 있었는데, 당시 마을 사람들 사이에 “이 방위가 땅속으로 완전히 묻히면 천지가 개벽한다”라는 말이 전해진다. 그 뒤 6.25동란을 전.후에 하상이 높아져 점차 바위는 도림천 땅 속으로 묻히기 시작했고, 전철역이 생기면서 자취를 감췄다고 한다.


사진-문창초등학교 전경 ‘거북고개’는 옛날 대방초등학교 자리에 연령군 신도비가 세워져 있었는데, 이 신도비의 받침인 거북을 당시 관악에서 조각해 운반할 때 수백필의 소가 넘었던 고개라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현재 삼육재활원이 있는 신대방2동에서 신림동으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참고로, 숙종왕자 연령군 신도비는 경기도 금천현 번당리(樊塘里) 지금의 신길동 대방초등학교 교정 자리에는 조선조 숙종(肅宗)의 아들인 연령군(延齡君)의 묘가 있었는데 1940년도에 실시된 경성부 구지정리(區地整理)로 인해 묘역은 충남 예산군 덕산(德山)으로 옮겨지고 신도비(神道碑)만 남아 있다가 1967년 8월 3일 육군사관학교(노원구 공릉동) 교정으로 이전됐다.


사진 출처 - 영등포구청 포토갤러리, 대방초등학교 담장에 새겨놓은 ‘숙종왕자연령군헌묘비지’(肅宗王子延齡君昍墓碑趾)현재는 주민들이 이를 아쉬워헤 대방초등학교 담장에 새겨놓은 ‘숙종왕자연령군헌묘비지’(肅宗王子延齡君昍墓碑趾)라는 글만이 이곳이 옛 왕자의 묘역 터임을 밝히고 있다. 2002년말 경에는 이 연련군신도비를 원 위치로 환원키 위한 구민 서명운동도 전개했으나 1967년 8월 당시에는 문화재로 지정되지 않아 개인소장품으로서 육군사관학교에 기증됐 이후 1980년 6월 11일 서울시유형문화재 43호로 지정돼 관계기관이 입장 및 법률적 검토로서 반환이 불가함이 통보돼 이 지역을 사랑하고 아끼는 모든 구민들의 아쉬움으로 남게 됐다.


사진-연령군 신도비(육군사관학교)이전할 당시 신도비(神道碑)가 놓여있던 자리에 연령군(延齡君)의 것으로 추정되는 검(劍)이 발견되기도 했다. 현재 일명 안국동(安國洞) 별관비(別館碑). 거북비라 불리기도 했고, 거북비 앞에는 커다란 연못이 있어 그곳에 연꽃이 만발했고 또한 묘(墓)를 관리하면서 제를 지내던 커다란 기와집 2동이 있었다고 전하는데 인근 주민들은 이 사당을 궁집이라 했다. 아마도 지금의 대방동(大方洞) 옛 지명인 번당리(樊塘里)는 못당(塘)자를 사용하고 있어 여기서 연유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장백에 웅덩이’는 현재 보라매공원 운동 자리로 광복 이전부터 이곳에 만여평 정도 되는 늪이 있어, 메기.가물치.붕어. 등이 서식해  주민들은 사철로 이 늪에서 고기잡이를 했으나 공군사관학교이 자리에 들어서면서 운동장이 됐다고 한다. 


신대방동은 조선시대에는 농업과 어업으로 생계를 유지해 온 서민층의 마을로 자연부락을 형성해왔다. 6.25동란 뒤 국군의 새로운 편성과 함께 1958년부터 공군사관학교가 이 마을에 들어왔고 해군본부, 그리고 공군본부가 자리잡아 신대방동이라 하면서 군사마을로 이름이 있었다.


또 이 마을이 저지대의 마을이고 도림천이 있어 수원이 좋은 관계로 원풍모방을 비롯해 태평양화학.중외재약 등 공장이 들어섰다. 그리고 공군사관학교는 다른 지방으로 이전하고 지금은 그 자리에 시민의 휴식공간으로 보라매공원이 자리하고 있다. 


성무대, 공군을 상징하는 탑/사진-박광준 기자

보라매공원은 이 마을 395번지 일대에 위치하고 있는 대규모 공원으로, 면적은 410,008m2(124,000평)이고, 건물부지 154,578m2에 독서실 5동, 청소년수련장 4동이고, 구민회관 1동, 교육장 3동, 교양시설과 체육관 1동, 잔디공장.수영장 1개, 정구장 2게, 그밖에 장애자 정신박약자 복지돤 등의 시설이 갖춰져 있다.


원래 이 곳은 1958년부터 1985년 12월 10일까지 공군사관학교가 자리잡고 있었던 곳으로, 이 학교가 이전하고 시민들의 휴식공간으로 활용되면서 공군을 기념하기 위해 이름을 보라매공원이라 했다.


정문에 들어서면 정방향으로 성무대라는 공군을 상징하는 탑이 하늘을 찌를 듯 솟아 있는데, 이 탑은 1962년 당시 사관생도들의 성금으로 세워졌다고 한다. 또 후문방향에 세워진 탑은 공군을 상징하는 공군을 상징하는 보라매가 앉아 그 위용을 과시하고 있고 탑 상단에는 ‘충효’ 그리고 그 아래 ‘호국비천’이라 새겨져 있고 뒤편에 헌시가 있다. 


공군사관학교는 1985년 이전하기 전까지 이곳에서 34기를 배출했다. 


신대방동의 교육기관은 중등학교로 대방여자중하교와 문창중학교가 있고, 초등학교로는 문창초등학교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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