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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 구석 구석 107] 선사시대 이후 우수한 민족문화 살펴볼 수 있는 ‘고고미술실(1)’
  • 이승준 기자
  • 등록 2022-12-23 13:04:27
  • 수정 2024-03-14 07:0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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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숭실대학교 한국기독교박물관(3-1), 국보 제141호 ‘청동잔무늬거울’-청동기의 제작과정을 알려주는 국보 제 231호 ‘청동기 거푸집’


[이승준 기자] 우리나라의 선사시대 이후 우수한 민족문화를 살펴볼 수 있는 고고․미술실은 암사동에서 출토된 대형빗살무늬토기, 섬세한 기하학문양이 뛰어난 국보 제141호 청동잔무늬거울과 청동기의 제작과정을 알려주는 국보 제 231호 청동기 거푸집은 숭실대학교한국기독교박물관만의 자랑이기도 하다. 그 외 삼국시대 낙랑 관계 유물, 삼국시대 이후의 공예작품들도 많은 관심을 끌고 있다.


고고.미술실에는 매산(梅山) 김양선(金良善)의 수집유물과 1960년대부터 한국기독교박물관이 수행한 여러 유적조사에서 출토된 유물들을 전시하고 있다. 토기류, 석기류, 금속기류, 유리제품 등 600여점의 유물을 시대별.주제별로 구성, 전시해 선사 및 고대 문화를 중심으로 한국문화의 발전과정을 체계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대표적인 유물로는 암사동유적 출토 대형빗살무늬토기[大形櫛文土器]와 전(傳) 충남 논산출토 청동잔무늬거울[靑銅多 細文鏡, 국보 제141호], 그리고 전남 영암출토 청동기거푸집[靑銅器鎔范, 국보 제231호] 등이 있다. 특히 청동잔무늬거울과 청동기거푸집은 한국 청동기의 정교함과 제작기술의 우수성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외에 장옥(葬玉) 등을 비롯한 중원문화의 색채가 깊이 배어 있는 낙랑(樂浪) 유물 역시 타 박물관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특색있는 유물이다. 


# 신석기문화



신석기시대에는 처음으로 정착생활이 시작되고, 간석기[磨製石器]가 사용되며, 조리와 저장 수단인 토기가 새로이 제작됐다. 한반도의 신석기문화는 토기의 변화양상에 따라 초기(기원전 8000~6000년경), 전기(기원전 6000~3500년경), 중기(기원전 3500~2000년경), 후기(기원전 2000~1000년경)의 4단계로 구분된다. 보통 토기가 출현한 시기부터 금속기가 사용되기 이전까지 전개된 물질문화를 포괄하는 개념으로 사용된다. 신석기시대의 주민들은 강안대지나 해안의 언덕 및 인근도서, 그리고 깊은 내륙지역의 작은 강가 등 대개 물과 식량자원을 쉽게 구할 수 있는 곳에 정착해 마을을 이루면서 생활했다. 



유적으로는 움집자리[竪穴住居址]와 조개무지[貝塚] 등의 생활유적과 움무덤[土葬墓] 등의 매장유적이 있다. 각 유적에서는 신석기시대의 대표적인 유물인 빗살무늬토기[櫛文土器]를 비롯해 낚시바늘 그물추, 갈돌.갈판, 불에 탄 도토리, 돌도끼.돌화살촉 등이 출토되고 있어 물고기잡이, 짐승사냥, 열매채집이 주요 생업수단이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낫.괭이 등 농기구로 추정되는 석기와 조.피 등 탄화된 곡물도 출토되고 있어 일부 잡곡농경이 병행되고 있었음도 알 수 있다.


빗살무늬토기 



빗살무늬토기는 빗모양의 무늬새기개[施文具]로 토기 겉면을 눌러찍거나[押印] 그어새긴[沈線] 각종 기하학적 무늬를 베푼 토기이다. 기본적으로 뾰족바닥[尖底]에 포탄형을 이루나 납작바닥[平底]의 토기에서도 확인되고 있다. 진흙에 운모.활석.석면.흑연.모래 등을 섞은 바탕흙으로 빚어 한데가마[露天窯]에서 구워 내어 흔히 적갈색을 띤다. 빗살무늬토기가 한반도에 처음으로 출현한 것은 기원전 6000-5000년전으로 같은 형태에 비슷한 수법의 무늬가 베풀어져 있는 토기가 시베리아지역에 광범위하게 분포하고 있어 이로부터 일정한 영향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한반도의 빗살무늬토기문화는 그릇의 모양과 새겨진 무늬를 기준으로 동북지역, 서북지역, 중.서부지역, 남부지역의 네 권역으로 나눠 볼 수 있다. 이 가운데 중.서부지역의 빗살무늬토기는 반란형(半卵形) 혹은 포탄형의 몸통에 뾰족한 바닥을 이루고 있어 다른 지역의 토기들과 구별된다. 처음에는 아가리.몸통.바닥의 세 부위에 서로 다른 무늬가 새겨지다가 점차 ‘바닥→몸통→아가리’ 순서로 무늬가 없어지면서 민무늬토기로 바뀐다. 대표적인 유적으로는 서울 암사동유적, 인천 삼목도유적 등이 있다.


신석기시대의 석기 



신석기시대에는 자갈돌을 알맞게 떼어낸 후 날부위[刃部]와 같은 특정 부분을 갈아 용도에 맞게 제작한 부분간석기[局部磨製石器]가 널리 쓰였고 늦은 시기까지 뗀석기[打製石器]도 많이 사용됐다. 석기의 종류에는 물고기잡이[漁撈]와 관련되는 조합식어구(組合式漁具).그물추[漁網錘], 짐승사냥[狩獵]에 이용되는 돌화살촉[石鏃].돌창[石槍], 일상용으로 사용된 돌도끼[石斧], 농기구로 사용된 돌낫[石鎌].돌삽[石 ] 등이 있었다. 


석기의 석재로는 석기의 쓰임새에 따라 돌도끼 등에는 단단한 돌인 섬록암이, 돌화살촉.돌창끝 등은 쪼개기 쉬운 점판암.편암 등이, 숫돌에는 갈리기 쉬운 사암 등이 선택돼 사용됐다. 간석기는 원석(原石)으로부터 ‘자르기-갈기-구멍뚫기’ 등의 공정을 거쳐 제작되기도 하지만 뗀석기 제작기법을 이용해 모양을 만든 후에 일부 혹은 전부위를 갈아 만드는 방법도 사용됐고, 이러한 제작기술은 청동기시대에 들어와 더욱 발달해 보다 광범위하게 사용됐다.


청동기-철기 초기문화



기원전 10세기경 한반도에서는 청동기와 민무늬토기를 사용하고 농경을 영위하는 주민들의 문화가 전개되기 시작해 청동기시대로 접어든다. 농경은 더욱 발달하고 벼농사와 개 돼지 등의 가축사육도 행해져서 생산력이 크게 늘어났고 이에 따라 인구도 많이 증가한다. 인구의 증가는 각 지역별로 취락(聚落)의 형성과 확대를 더욱 촉진했고, 확대된 취락내에서는 서서히 지배자가 등장하게 된다. 


취락은 대개 평야 혹은 하천과 가까운 야산이나 구릉에 위치하며 그 주위에 경계와 방어를 위한 도랑[環濠]을 파거나 나무울타리[木柵]를 세우기도 했다. 집은 네모꼴이나 긴네모꼴의 움집[竪穴住居]이 많지만 남부지방에서는 특유의 둥근꼴 움집도 많이 발견되고 있다. 무덤으로는 고인돌[支石墓] 돌널무덤[石棺墓] 독무덤[甕棺墓] 등이 있다. 



고인돌은 청동기시대의 대표적인 무덤으로 땅위에 판돌을 세워 주검칸을 만들고 그 위에 크고 편평한 덮개돌을 덮은 탁자식(卓子式), 땅밑에 판돌이나 깬돌로 주검칸을 만들고 굄돌위에 덮개돌을 놓은 바둑판식[碁盤式], 굄돌없이 덮개돌을 덮은 개석식(蓋石式)으로 구분된다. 돌널무덤은 땅속에 판석으로 주검칸을 만들고 널뚜껑을 판자나 판돌로 덮은 것이다. 이러한 무덤에는 붉은간토기.돌검.돌살촉.동검.장식옥 등이 껴묻혀 있다. 한편 금강유역 일대에서는 일상용토기를 널로 사용한 홑독널[單甕棺]이 발견되기도 한다.


초기철기문화와 중국고대화폐 


우리나라의 철기문화는 기원전 4세기말~3세기초 중국의 전국계(戰國系) 철기문화가 요동-서북한지역에 들어오면서 시작된다. 위원 용연동, 영변 세죽리 등이 대표적인 유적으로 주조철부(鑄造鐵斧), 반달쇠칼[半月形鐵刀], 쇠손칼[鐵刀子] 등이 출토되고 이에 명도전(明刀錢)이 추가되기도 한다. 이렇게 유입된 철기문화는 기원전 2세기경에 청천강 이남의 각 지역으로 파급되는데 은율 송산리, 배천 석산리, 함흥 이화동 등의 유적에서 세형동검과 주조철부 등이 출토되고 곧이어 세형동검을 본 따 만든 철제단검이 제작되는 등 철기의 수량이 증가하고 그 종류도 다양해진다. 



한편 이때를 전후해 서남한지역에서는 당진 소소리, 부여 합송리, 장수 남양리 등의 초기 널무덤에서 세형동검과 함께 주조철부, 쇠끌[鐵鑿], 쇠새기개[鐵사] 등의 철제공구류가 출토됐고, 동남한지역에서는 이보다 약간 늦은 시기의 대구 팔달동, 경산 임당동 초기 널무덤에서 한국식의 청동기와 이를 모방한 철기가 출토됐다. 이로 볼 때 낙랑문화(樂浪文化)가 들어오기 전에 이미 남한지역에 철기문화가 전해졌음을 알 수 있다.


민무늬토기 


민무늬토기는 굵은 모래나 석영.장석 혹은 활석.운모가루 등을 섞은 진흙으로 빚어 한데가마[露天窯]에서 구운 납작바닥[平底]토기로 대개 갈색을 띠는 것이 보통이다. 바리[鉢]와 항아리[壺] 모양이 기본적인 형태이며 제작기법이나 형식적 특징에 따라 다양하게 표현된다. 요동지방 토기의 영향으로 북한지역에서 점진적인 이행과정을 거쳐 등장하고, 남한지역에서는 북한지역의 민무늬토기가 전해져 복합되면서 다양한 토기가 사용됐다. 


남한지역의 민무늬토기문화는 보통 구멍무늬토기.붉은간토기.송국리형토기 등으로 대표되는 전기와 그것이 덧띠토기와 검은간토기로 대체되는 후기로 양분할 수 있다. 동북지역에서는 주로 구멍무늬토기[孔列土器].골아가리무늬토기[ 脣刻目土器].붉은간토기[赤色磨硏土器, 紅陶] 등이 출토되고, 서북지역에서는 겹아가리토기[二重口緣土器].미송리형토기(美松里形土器).공귀리형토기(孔貴里形土器)·팽이형토기[角形土器] 등이 중심 분포지역을 달리하며 출토된다. 



남한지역에서는 북한지역의 토기나 그것들이 결합된 형식의 토기가 출토되고 금강유역에서 새로이 송국리형토기(松菊里形土器)가 출현하나 남부지방에서 한정돼 사용된다. 이후 요동지방에서 전해진 덧띠토기[粘土帶土器]와 검은간토기[黑色磨硏土器, 黑陶]가 송국리형토기를 대신하게 돼 초기철기시대에 들어와 많이 사용됐다.

청동기시대의 석기 


청동기시대에는 석기가 더욱 발달해 여러 가지 간석기[磨製石器]가 일상도구로 많이 사용됐다. 농경이 본격화되고 청동기가 한정적으로 만들어지므로 석기는 매우 다양하게 만들어졌는데, 얇은 판돌에 작은 홈을 내어 적당한 크기로 자른 후에 가공하는 찰절법(擦切法)이 널리 유행하게 된다. 농구로는 돌칼[石刀], 돌낫[石鎌], 돌괭이, 돌보습 등이 사용됐고. 목재가공구로는 돌도끼[石斧], 돌자귀[手斧], 돌끌[石鑿] 등이 이용됐다. 또 곡물가공에는 갈돌[石棒]과 갈판[ 石]이, 옥석가공에는 숫돌[砥石)이, 옷감제작에는 가락바퀴[紡錘車]가 사용됐고, 짐승사냥과 물고기잡이, 그리고 전쟁에는 돌화살촉[石鏃], 돌창[石槍], 간돌검[石劍] 등이 이용됐다. 그밖에 달도끼[環狀石斧, 바퀴날도끼]나 별도끼[星形石斧, 톱니날도끼]와 같은 특수한 신분을 나타내는 석기도 사용됐다.


청동기


청동기-초기철기시대의 청동기 한반도에서 출토되는 청동유물은 요령지역에서 유래된 비파형동검(琵琶形銅劍)을 표지로 하는 비파형동검문화기(전기)와 세형동검(細形銅劍)을 비롯한 한국적인 청동기의 특징이 확립되고 철기가 유입된 세형동검문화기(후기)로 나누어 살펴 볼 수 있다. 



비파형동검문화기에 청동유물의 출토예는 많지 않은 편이다. 집터에서의 출토예는 거의 없고, 고인돌을 비롯한 무덤에서 주로 출토되고, 제사유적에서도 발견되고 있다. 비파형동검(琵琶形銅劍).부채날도끼[扇形銅斧].거친무늬거울[多뉴粗紋鏡] 등이 있으나, 남한지역에서는 주로 비파형동검이 출토되고 있다. 


세형동검문화기에는 청동기의 제작이 증가하고 다양해지며 재질은 백동질(白銅質)인 점이 특징이다. 고인돌에서의 출토사례는 거의 없고, 깊은 움에 나무널을 안치하고 돌을 채운 형태의 무덤[積石木棺墓]에서 주로 출토된다. 세형동검(細形銅劍).꺾창[銅戈].투겁창[銅모] 등의 무기류, 도끼[長方形銅斧].자귀[有肩銅斧]·끌[銅鑿].새기개[銅사] 등의 공구류, 잔무늬거울[多뉴細文鏡], 그리고 방울[銅鈴] 등의 의기류가 있다. 이외에도 곱돌[滑石]로 만든 거푸집[鎔范]도 확인되고 철기문화가 수용된 이후에는 무기류가 장식화, 의기화하는 경향을 보이기도 한다.


다뉴경


다뉴경의 변천 우리나라 청동기시대의 거울은 가장자리 쪽으로 치우쳐 2~3개의 꼭지가 있는 다뉴(多뉴)이고 평면 또는 오목거울이면서 각종 기하무늬[幾何文]가 베풀어져 있는 점이 특징이다. 보통 다뉴경(多뉴鏡)이라 부르고 중국 동북지방, 한반도, 일본에 이르는 광범위한 지역에 분포하고 있다. 



백동질(白銅質)이 대부분이며 시기에 따라 주조기술과 시문기법이 발달하면서 거친무늬거울[多뉴粗文鏡]에서 잔무늬거울[多뉴細文鏡]로 변화한다. 거친무늬거울[多뉴粗文鏡]은 요령지역에서 많이 출토되며, 번개무늬[雷文] 사이를 집선(集線)으로 채운 형태에서 점차 문양대가 구분되면서 대칭형의 별무늬가 채워진 형태로 변화한다. 


잔무늬거울[多뉴細文鏡]은 거친무늬거울의 별무늬가 발전해 햇빛무늬 혹은 햇살무늬로 표현되는 매우 정밀하고 고운 집선으로 채워져 있다. 문양대가 동심원에 의해 세부분으로 구분되는 것이 많고, 사선이 채워진 삼각무늬를 주된 시문 단위로 하며, 그 바깥으로 이를 방사선으로 배치하는 것이 특징이다.


청동기 거푸집



청동기의 제작과 거푸집 청동기 거푸집[鎔范]의 출토는 현지에서 직접 주조(鑄造)가 이뤄졌다는 가장 확실한 자료가 된다. 한반도에서 발견되고 있는 거푸집은 대부분 곱돌[滑石]로 만든 것인데, 거푸집이 대부분 곱돌로 만들어진 것은 무른 질감때문에 모양을 새기기가 쉽고, 주조시에 잘 터지지 않아 반영구적이며, 표면이 매끄러워 제작된 청동기의 질을 높일 수 있기 때문이다. 


거푸집은 1매의 한쪽면에만 모양을 새기고 다른 쪽은 그대로 편평하게 한 단합범(單合范)도 있으나 대부분 같은 형태를 가진 2매를 합해 사용한 쌍합범(雙合范)이 많다. 합범으로 사용되는 거푸집의 옆면에는 눈금이 새겨져 있어 전후좌우로 어긋나지 않고 정확하게 합쳐질 수 있도록 고안돼 있다. 영암출토 청동기거푸집에는 이러한 특징이 잘 나타나고 있다.


지배자의 착장품 



지배자의 등장과 착장품 청동기시대의 가장 큰 사회변화는 농경.목축 등에 의한 생산력의 증가로 사유재산의 편중이 심화되고, 사회구성원간 혹은 집단간에 우열의 차이가 점차 뚜렷해진다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은 청동기의 제작.사용으로 더욱 가속화돼 결국 일반구성원보다 우월한 사회적 지위를 가진 우두머리, 즉 지배자[首長]가 등장하고 이들을 중심으로 점차 정치체[Polity]가 형성돼 갔다. 


청동기는 제작의 어려움과 재료의 희귀성으로 인해 일상에서의 실용품보다는 유력자들만이 지닐 수 있는 일종의 위세품(威勢品)으로 이용됐다. 특히 동검(銅劍)이나 다뉴경(多뉴鏡) 등은 지배자의 정치적.종교적 권위를 상징하며 이를 부장한 부장묘(副葬墓)의 존재는 지배자와 그가 속한 집단의 세력 규모를 나타내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고인돌 축조기에 이미 지배자가 등장하며, 이후 초기 널무덤[積石木棺墓] 단계에 이르면 유력한 지배자가 속해 있는 집단을 중심으로 각지에서 정치체가 형성되게 된다. 이때의 지배자는 제사장(祭司長) 혹은 사제왕(司祭王)적인 성격을 지닌 존재로 이해되기도 한다.


# 원삼국문화


기원전 1세기 무렵부터 남한지역에는 마한(馬韓) 진한(辰韓) 변한(弁韓)의 삼한(三韓)이 형성되고 있었다. 마한은 충청.전라지방에, 진변한은 영남지방에 각각 자리잡고 점차 자신들의 문화를 발전시켜갔다. 이러한 지역적 차이는 묘제에도 반영돼 마한지역에서는 무덤 주위에 도랑[周溝]을 돌린 움무덤[土壙墓]이, 진변한지역에서는 널무덤[木棺墓]과 덧널무덤[木槨墓]이 차례로 유행했다. 이때의 주요한 문화적 변화는 철기 보급이 가속화돼 널리 사용되고 서북한지역을 거쳐 두드림무늬토기[打捺文土器]의 제작기술이 남한지역으로 파급된다는 점이다. 철제농기구의 사용으로 농업생산력이 증대되고. 철제무기의 사용으로 정복전쟁이 빈번해져 정치체간, 지역간의 통합이 가속화됐다. 


중국 전국시대(戰國時代)의 타날문 회도(灰陶)에서 유래된 두드림무늬토기 제작기술은 낙랑군(樂浪郡) 설치를 전후해 남한 각지로 파급돼 원삼국토기 생산체제를 성립시켰다. 한편 삼한지역에는 낙랑 등 한군현(漢郡縣)을 통해 대륙문화와 접하면서 중국 및 북방 계통의 여러 외래문물이 전해졌다. 철 또는 철기는 교역의 매개 수단이자 주요한 수출품목이기도 했고, 삼한지역으로 유입된 외래유물들은 지배층의 권위를 상징하는 물품으로 수장묘(首長墓)나 조개무지[貝塚] 등에서 종종 출토되고 있다.


원삼국시대의 토기



원삼국토기 원삼국시대의 토기는 선사시대의 토기와는 달리 정선된 바탕흙[胎土]의 사용, 두드림기법[打捺技法]에 의한 표면 조정, 물레(회전판)에 의한 성형(成形), 밀폐가마[登窯]에서의 소성(燒成) 등 새로운 제작기술을 사용해 만들어졌다. 이 가운데 두드림기법의 사용과 밀폐가능한 가마의 사용이 핵심적인 기술이라 할 수 있는데, 두드림기법은 두드림판과 받침모루[內拍子] 등의 도구를 이용해 토기 외벽을 두드려 바탕흙의 결합력을 높이고 여러 무늬를 표현할 수 있는 새로운 토기제작 기법이었고, 밀폐가마에서는 가마의 개폐를 통해 내부의 온도나 공기의 흐름을 조절할 수 있어 고화도(高火度) 소성이 가능해져 선사시대의 적갈색토기보다 단단한 회색토기를 만들 수 있었다. 이때의 토기는 크게 중도식민무늬토기[中島式無文土器]와 두드림무늬토기[打捺文土器]로 나눌 수 있다. 


중도식민무늬토기는 재래의 민무늬토기 전통 위에 새로이 전국계(戰國系) 두드림무늬토기 제작기술이 가미돼 출현한 것으로, ‘풍납리식민무늬토기[風納里式無文土器]’ 혹은 ‘경질민무늬토기[硬質無文土器]’라고 불리기도 한다. 보통 아가리가 밖으로 급하게 꺽여 목부위가 뚜렷하지 않은 형태를 지니고, 종류로는 깊은바리[深鉢]·항아리[壺].뚜껑[蓋] 등이 있다. 



두드림무늬토기는 토기를 단단하고 고르게 하기 위해 두드림도구를 이용해 겉면에 노끈무늬[繩席文]나 창살무늬[格子文] 등을 베풀어 놓은 토기를 말한다. 중국 전국시대(戰國時代)의 회도(灰陶)에서 비롯됐고 원삼국시대에 들어와 대표적인 토기로 자리잡게 됐다. 보통 적갈색연질, 회색연질, 회청색경질의 세가지 유형으로 구분하고 무늬의 종류와 생긴 모양에 따라 다양하게 표현되나 가장 많이 출토되는 것은 노끈무늬나 창살무늬가 베풀어진 깊은바리[深鉢]와 짧은목항아리[短頸壺]라 할 수 있다. 


지역에 따라 그릇의 모양이나 질감이 서로 달라 구별되는데 한강유역의 경우 중도식(中島式)의 민무늬토기[深鉢]와 두드림무늬가 베풀어진 짧은목항아리[短頸壺]가 많이 사용됐다. 초기에는 중도식의 민무늬토기의 비중이 높지만 후기에는 연질(軟質)과 경질(硬質)의 두드림무늬토기로 대체된다. 하남 미사리, 수원 서둔동 등 주로 집자리유적에서 출토되고 있다.


# 삼국문화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신라가 기원전 57년, 고구려가 기원전 37년, 백제가 기원전 18년에 각각 건국돼 주변세력들을 통합하고 고대국가로 발전돼 간 것으로 기록돼 있다. 그러나 성곽과 대형 고분의 출현, 특정 토기양식의 일정한 분포 등 고대국가의 성립을 드러내는 고고학자료는 이와 다르게 나타난다. 


고구려의 발흥지로 오녀산성(五女山城)이 있는 환인(桓因)지방과 국내성(國內城)이 있는 집안(集安)지방에서는 돌무지무덤[積石塚]이 늦어도 기원전 2세기 경부터 축조되고 있었고, 고구려 토기의 성립을 보여주는 노남리형토기는 기원후 1세기에 출현했다. 이로 보아 고구려는 서기 1세경에는 왕국으로 발돋움했음을 알 수 있다. 이후 고구려는 중국 세력과 쟁투를 벌이면서 요동 요서지방으로 진출을 꾀했고, 313년에는 낙랑군을 멸망시켰다. 427년 평양으로 도읍을 옮긴 고구려는 남방진출을 본격화했다. 서울 강남지역에서 성장해가고 있던 백제는 풍납토성(風納土城)과 몽촌토성(夢村土城)의 축조, 봉토분(封土墳)의 등장, 검은간토기를 비롯한 백제토기의 형성으로 보아 3세기 중 후반경에 왕국으로 발전했음을 알 수 있다. 


371년 평양성 전투에서 고구려의 고국원왕을 전사시킬 만큼 강성했던 백제는 이후 고구려의 남진정책에 밀려 475년 웅진(熊津), 523년 사비(泗沘)로 천도했으나, 중국 남조문화를 받아들이면서 세련된 문화를 발전시켜 갔다. 


경주를 중심으로 성장해간 신라는 3세기 후반경 신라식이라고 할 수 있는 덧널무덤[細長方形木槨墓]을 출현시켜 그 정체성을 드러냈고, 월성(月城)이 축조되고 거대한 봉토로 덮인 돌무지덧널무덤[積石木槨墳]과 신라양식토기가 4세기 중엽경에 출현해 고대 왕국으로 발전했음을 보여준다. 6세기에 들어와 고대국가로서의 체제를 일신한 신라는 낙동강 서쪽의 여러 가야세력을 차례로 통합하고, 이어서 6세기 후반에는 소백산맥을 넘어 한강유역으로 진출하면서 삼국 사이의 치열한 경쟁에 휘말리게 되나 결국 통일전쟁의 주도권을 쥐게 됐다.


고구려토기 


고구려토기는 기원전후 압록강중류역의 환인-집안일대에서 등장하는 이른바 ‘노남리형토기(魯南里形土器)’에서 비롯됐고 청동기시대 민무늬토기의 전통위에 한대(漢代) 회도(灰陶)의 영향이 가미돼 특유의 방식으로 제작됐다. 보통 물레나 돌림판을 이용해 성형했고 저화도(低火度) 소성으로 연질(軟質)토기가 많다. 모래가 섞인 거친 바탕흙, 표면 마연수법, 가로띠손잡이[帶狀把手]의 부착 등은 전통적인 제작수법에서 비롯된 것으로 초기부터 많이 보인다. 정선된 고운 바탕흙, 흑갈색.황갈색의 색조, 한대 이후의 도기의 형태나 문양을 모방한 일부 기종, 황유도기(黃釉陶器)의 제작 등은 새로이 유입된 요소로 중기 이후 많이 보이고, 후기에는 새로이 표면을 문질러 그은 암문(暗文)수법도 나타난다. 굽다리[臺脚]를 가진 그릇이 없고 납작한 바닥을 가진 항아리가 대부분으로 실용성이 강하다. 나팔입네귀항아리[廣口長頸四耳壺], 긴몸항아리[長胴壺], 원통모양세발토기[圓筒形三足土器], 시루[甑] 등이 대표적이다.


백제토기 



백제토기는 원삼국시대의 두드림무늬토기[打捺文土器] 제작 전통 위에 새로이 중국 용기문화의 자극으로 한강유역에서 3세기 중엽경에 출현하는 검은간토기항아리[黑色磨硏土器壺]에서 비롯됐다. 제작기술 측면에서 검은간토기를 비롯해 적갈색연질토기와 회색연질토기, 그리고 회청색경질토기로 구분되고, 납작한 바닥을 가진 토기 뿐만 아니라 둥근 바닥을 가진 토기도 많이 사용됐다. 종래의 원삼국토기 형태를 계승한 짧은목항아리[短頸壺], 깊은바리[深鉢形土器], 긴항아리[長卵形土器]와 새로이 등장하는 곧은목항아리[直口短頸壺], 세발토기[三足土器] 등이 대표적이다.


신라-가야토기


신라토기와 가야토기 신라.가야토기는 일반적으로 높은 온도로 소성해 매우 단단한 석기질(석器質, Stoneware)의 회청색경질토기를 일컫지만 비교적 낮은 온도로 소성된 일상용의 적갈색연질토기도 이에 포함되고 있다. 고분에서 출토되는 높은 굽을 가진 토기가 많아 의례적인 성격이 강하고, 두드림기법 외에 새김기법으로 문양을 표현한 것이 많다. 



4세기대의 공통양식에서 5세기대에는 낙동강동안의 신라양식과 낙동강서안의 가야양식으로 분화되고 6세기대에는 신라토기가 낙동강 서안의 가야지역으로 확산되는 과정을 거친다. 이러한 현상은 신라의 가야세력 통합과정을 보여주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신라.가야토기의 종류로는 굽다리접시[高杯], 굽항아리[臺附長頸壺], 긴목항아리[長頸壺], 그릇받침[器臺] 등이 있고, 표면에 새겨진 무늬나 뚫린구멍[透窓]의 배열상태 등을 통하여 시기별.지역별 특징을 파악할 수 있다. 


신라토기의 굽 투창은 상하 어긋나게 배치되고 다리 선이 직선적으로 처리되는데 비해 가야토기의 굽 투창은 상하 일치되게 배치되고 다리 선이 곡선적으로 처리되는 것이 기본적이 특징이다. 한편 가야토기는 다시 여러 개의 소지역권으로 나뉘어 지역별 특색이 뚜렷해 다소 복잡한 양상을 띠는데 보통 금관가야권(김해양식), 아라가야권(함안양식), 대가야권(고령양식), 소가야권(진주-고성양식) 등으로 나뉘고 있다.


상형토기 


상형토기(像形土器)는 인물이나 동물 및 특정한 사물을 본떠 만든 토기를 말한다. 원삼국시대 후기부터 주로 영남지방의 무덤에서 출토되고 있는데 삼국시대에 들어와 남성.여인 등의 인물상, 오리.말 등의 동물상, 집.신발.수레.배 등의 각종 물상(物像)을 형상화한 토기가 다양하게 제작됐다. 일상용기가 아닌 장례나 제사 등의 의례용으로 사용되는 특수한 용도로 제작된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삼국시대의 기와 



기와는 지붕에 씌워 눈과 빗물의 침수를 차단하고 이를 흘러내리게 해 지붕 재목의 부식을 방지함과 동시에 건물의 경관과 치장을 위해 사용됐다. 기와의 특징이 가장 잘 드러나는 것이 막새기와[瓦當]인데 그 표면에 새겨지는 무늬를 통해 시기별, 지역별 차이를 알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막새기와는 낙랑(樂浪)을 통해 전해진 수막새로부터 비롯됐고 삼국시대에 들어와 본격적으로 제작, 사용됐다. 



불교전래 이전에는 낙랑(樂浪) 수막새의 영향으로 기하무늬[幾何文]나 풀꽃무늬[草花文] 등의 단순한 무늬가 베풀어진 수막새가 유행했으나 불교수용 이후 연꽃무늬수막새[蓮花文圓瓦當]가 등장해 가장 널리 사용됐다. 특히 고구려에서는 귀신얼굴무늬수막새가 새로이 제작되는 등 다양한 막새기와가 사용됐다. 고구려의 연꽃무늬수막새에는 꽃잎이 양감있게 표현되고 꽃잎사이에 사이잎[間瓣]이 배치되는 점이 특징이고, 백제의 연꽃무늬수막새는 꽃잎 끝이 갈라지듯 도드라지게 해 부드럽게 만들고 꽃술을 많이 배치한 것이 전형적인 형태이다. 신라의 연꽃무늬수막새는 고구려, 백제 기와의 영향을 받아 성립하였으나 전체적으로 정제되지 않은 투박함을 보여준다.


장신구


귀금속장신구와 유리옥장신구 삼국시대에는 이전과는 달리 관(冠), 관식(冠飾), 허리띠장식[帶金具], 귀걸이[耳飾], 반지[指環], 팔찌[釧]신발[飾履], 각종 드리개[垂飾] 등의 다양한 금속제 장신구가 발달했다. 이 가운데 금.금동.은 등의 귀금속으로 만든 장신구는 대형고분에서 주로 출토되고 사용계층이 한정된 만큼 출토 예가 그리 많은 편은 아니다. 



하지만 경주의 돌무지덧널무덤[積石木槨墳]에서는 화려하고 다양한 귀금속 장신구가 출토되고 있어 당시 신라사회에서 지배계층의 분화나 지배방식을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옥 혹은 구슬은 선사시대 이래로 신분이나 권위의 상징물로 애용돼 왔고, 삼국시대에는 주로 목걸이[頸飾], 가슴걸이[胸飾], 반지[指環], 팔찌[釧] 등을 구성하는데 많이 사용됐다. 


삼국시대에 들어와서도 곱은옥[曲玉].대롱옥[管玉] 등이 여전히 많이 사용됐고, 그 소재로는 천연석이나 보석류, 유리 등이 쓰였다. 그 가운데 유리가 가장 흔히 쓰인 재료였고 이밖에 벽옥, 연옥, 수정, 경옥, 호박, 마노, 홍옥수, 천하석 등도 많이 사용됐다. 


한편 유리구슬 내에 다른색 유리로 상감무늬를 넣거나[象嵌文玉]이나 줄무늬를 돌린 구슬[練理文玉], 혹은 표면에 점무늬 등을 묘사한 구슬[蜻蛉文玉]의 경우, 또는 유리에 금박이나 은박을 입혀 만들거나[金箔琉璃玉] 때로는 귀금속으로 부속장식을 붙여서 모자를 씌운[金帽] 경우 등 다양한 장식 기법이 동원되기도 한다.


무기


고리자루칼삼국시대의 무기(고리자루칼) 칼손잡이의 머리부분이 고리모양을 이루는 고리자루칼[環頭刀]은 삼국시대의 대표적인 전투용 및 의장용 무기이다. 처음에는 착장자의 권위를 나타내는 위세품(威勢品)적인 성격이 강했으나 삼국간의 정복전쟁이 격화되는 5세기 이래로 실전용으로도 많이 사용됐다. 보통 고리안의 장식무늬를 가지고 그 종류가 구분된다. 고리 안에 아무런 장식이 없는 민고리자루칼[素環頭刀], 고리 안에 잎사귀 3개를 장식한 세잎무늬고리자루칼[三葉文環頭刀], 반원형(C자형) 고리 3개를 연결시킨 세겹고리자루칼[三累環頭刀], 용이나 봉황 무늬를 하나 혹은 한쌍으로 장식한 용무늬고리자루칼[龍文環頭刀], 봉황무늬고리자루칼[鳳凰文環頭刀], 그리고 용과 봉황 무늬를 함께 장식한 용봉무늬고리자루칼[龍鳳文環頭刀] 등으로 나뉘어진다. 


이러한 고리자루칼은 ‘민무늬고리자루칼→세잎무늬고리자루칼→세겹고리자루칼→봉황무늬고리자루칼·용무늬고리자루칼’의 서열이 있었던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고리자루큰칼은 실전용 뿐만 아니라 사회적 신분을 나타내는 상징적 위엄구, 혹은 정치적 결속의 사여물로 이용되기도 했다. 특히 고리자루큰칼의 재질과 자루끝에 투조(透彫)된 다양한 무늬는 사용 계층이나 지역적인 차이를 반영하고 있어 당시 사회의 구조를 파악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삼국시대의 마구 



우리나라에서 마구(馬具)가 한반도 전역에서 성행하게 된 것은 삼국시대에 들어와 선비(鮮卑)등 북방계 마구의 영향으로 새로이 고삐이음쇠가 채용되고 기승용(騎乘用) 전마구(戰馬具)가 보급되면서 부터였다. 이러한 변화는 4세기 무렵 선비(鮮卑) 등의 기승문화(騎乘文化)가 한반도로 전해져서 비롯된 변화로 이해되고 있다. 


마구는 그 기능과 사용목적에 따라 구분된다. 제어용에는 재갈[銜, 轡], 재갈멈치[銜留, 鏡板], 고삐이음쇠[引手], 고삐[手網] 등이 있고, 안정용에는 발걸이[鐙子], 안장[鞍], 가슴걸이[靷, 胸繫], 후걸이[鞦] 등이 있고, 장식용에는 말띠드리개[杏葉], 말띠꾸미개[雲珠], 말방울[馬鈴, 馬鐸] 등이 있다. 이 밖에 전투시 말을 보호하기 위한 말투구[馬冑]·말갑옷[馬甲] 등의 전마구가 있다.


영산강유역의 독널무덤



독널[甕棺]은 사람의 시신이나 뼈를 토기에 안치해 널의 역할을 하게 한 것을 말한다. 우리나라에서 독널무덤[甕棺墓]은 신석기-청동기시대에 일상용의 토기 하나만을 바로 세워 묻는 외독널[單甕棺]이 사용되기도 했으나, 초기철기시대에 두개의 항아리 아가리를 맞대어 뉘어 놓은 이음독널[合口式甕棺]이 등장하면서 점차 널리 쓰이게 됐다. 


원삼국시대에도 독널무덤은 널무덤이나 덧널무덤과 함께 널리 쓰이지만 집단적으로 군집해 조성되는 경우는 거의 없고 부수적인 무덤으로 쓰이는 경우가 많았다. 이러한 현상은 삼국시대에 들어와서도 지속됐는데 특이하게 영산강유역에서만 무덤이 대형화되면서 군집을 이루는 이른바 ‘옹관고분(甕棺古墳)’으로 발전하게 된다. 


‘옹관고분’은 주로 평지에 입지하고, 커다란 분구안에 여러 개의 독널이 매장됐고, 분구 주변에 묘역(墓域)을 나타내는 도랑[周溝]이 돌려지는 특징이 있다. 또한 매장용으로 특별히 만들어진 전용독널이 사용되고, 이를 덮는 분구가 원형이나 방형으로 정형화되면서, 분포지역이 영암 시종면과 나주 반남면 일대로 집중되는 현상이 나타난다. 영산강유역을 중심으로 나타나는 이와 같은 독특한 문화현상은 이 지역을 배경으로 하는 유력한 토착세력의 존재, 곧 마한잔여세력의 성장을 반영하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옹관고분’은 나주 반남지역을 중심으로 전성기를 이루지만 이 지역에 돌방무덤[石室墳]이 수용되면서 차츰 쇠퇴하게 된다./다음호에 계속(사진-박광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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