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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 구석 구석 138] 동작구의 나루들...
  • 박광준 기자
  • 등록 2022-12-22 23:39:05
  • 수정 2024-04-10 10:3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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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노들나루-동작나루-흑석나루

동작전/정선[박광준 기자] #노들나루


한강 남안에 위치했던 나루터로 현재의 서울특별시 동작구 노량진동에 속한다. 옛부터 수양버들이 울창해 ‘노들나루’라고 불렀고, 노량진.노도진.노량진도라고도 했다. 


이 나루는 서울과 과천.시흥을 연결해주는 구실을 했다. 조선시대 간선로 중에서 충청도 전라도 방면으로 향하는 6.7.8호 간선로의 길목으로, 특히 상류의 한강과 함께 서울로 통하는 한강나루터 중에서도 중요한 길목이므로 조선시대에는 군대가 유진 하는 진을 설치했다. 


처음에는 개인 소유의 나룻배가 10척이 있어서 도선료를 받고 행인을 건네주다가 태종 4년(1414) 광진과 함께 이 곳에 관리자로 별감을 파견해 관에서 관리했다. 이 때는 관선 15척을 배치해 진에 소속된 진부들로 하여금 도선료를 받지 않고 건네주게 했다.


노들나루터(현재)

나루 남쪽 언덕에는 노량원이 있었고, 세금을 거두는 관내는 과천의 신촌리, 사촌리, 곽계, 형제정계, 마포강이었다. 


노들나루 남쪽 언덕에는 노량원이란 여관이 있어서 도성을 오가는 사람들은 이곳에서 쉬어가기도 했다. 그리고 나루 북쪽 강변에는 넓은 백사장이 있었다. 바로 새남터로 일찍부터 사형장으로 이용됐다. 이는 나루를 오가는 많은 사람들에게 처형과정을 보임으로써 경계심을 갖도록한 조치로, 일찍이 세조 즉위에 반대한 사육신이 여기에서 처형됐고, 근세에는 많은 천주교들이 이 곳에서 순교했다. 


한강대교

노들나루는 조선 초기에는 주로 민간인들이 왕래했지만, 조선 후기에는 국왕의 행차가 빈번해 도강 방법이 모색됐다. 특히 정조는 사도세자의 수원에다 마련하고 수시로 능행길에 올랐는데 그 통로에 위치한 것이 노들나루였다. 그리하여 노들나루에도 한강나루, 삼전도에서와 같은 배다리가 놓이게 됐다. 정조는 이를 위해 주교사라는 전담관청을 설치하고 ‘주교사절목’(1793)을 마련했다. 


참고로, '노들강변'은 신불출 작사, 문호월 작곡, 박부용 노래로 1934년 오케레코드사에서 ‘창립 1주년 기념 특별호’라는 타이틀의 음반으로 발매돼 널리 알려진 경기민요 양식의 신민요이다. 현재까지 경기민요의 한 종목으로 애창되고 있다.


1. 노들강변 봄버들 휘 늘어진 가지에다/ 무정세월 한허리를 칭칭 동여 매어볼까/ 에헤요 봄버들도 못 믿을 이로다/ 푸르른 저기 저 물만 흘러 흘러가노라

2. 노들강변 백사장白沙場 모래마다 밟은 자국/ 만고풍상萬古風霜 비바람에 몇 번이라 지어 갔나/ 에헤요 백사장도 못 믿을 이로다/ 푸르른 저기 저 물만 흘러 흘러가노라

3. 노들강변 푸른 물, 네가 무삼 망령妄靈으로/ 재자가인才子佳人 아까운 몸 몇몇이나 데려갔나/ 에헤요 네가 진정 마음을 돌려서/ 이 세상 쌓인 한이나 두둥 싣고서 가거라

-한국가창대계


노들강변 악보/국립국악원 

노랫말의 내용은, 세월이 감을 아쉬워하고 권력의 탄압으로 많은 사람들이 어려움을 겪거나 목숨을 빼앗겼다는 것은 은근히 암시하고 있다. 일제 식민지 시기 암울한 시대 상황을 반영한 노랫말이다.


노량, 노들나루는 노량진의 순 우리말. 신불출은 일제강점기 최고의 만담가였다고 한다. ‘노들강변’은 작사자와 작곡자가 확실하게 밝혀져 있는 아주 드문 경기 민요이다. 신불출은 일제의 탄압에도 해학적으로 대처했다. 그는 일제말기에 창씨개명을 강요받자, 강원야원(江原野原)이라 개명했다. 일본어 발음은 ‘에하라 노하라’. 이 이름은 ‘맘대로 될 대로 되라’는 뜻으로 당시 장안에 화제가 됐다고 한다. 그의 예명인 ‘불출(不出)’도 ‘이렇게 일본 세상인 줄 알았더라면 차라리 세상에 나지 말았어야 했다’는 뜻에서 지었다고 한다. - 네이버 지식백과, 노들강변 (창악집성, 2011. 07. 04., 하응백)’


만담(재담)에 능했던 월북 연극인 신불출이 작사를 했고, 바이올린을 잘 다뤘던 문호월이 작곡했고, 권번 출신의 기생 가수였던 박부용이 불렀다. 노래 제목의 ‘노들’은 ‘노돌老乭’에서 유래된 말이고, 서울의 노량진 일대를 가리킨다고 한다. 전체 3절로 이뤄진 가사는 매 절의 처음이 ‘노들강변’으로 시작해 전통음악의 성악곡에 곡명을 붙이는 방식을 따라 '노들강변'이라는 이름이 붙은 것으로 보인다. 또한 매절의 셋째 줄 첫 단어로 “에헤요”를 삽입하면서 마치 후렴구처럼 사용하고 있다.


한강의 새벽나루터노량진은 동작진과 함께 도성에서 남쪽으로 나가는 나룻터로서 뿐만 아니라, 부근의 경치도 매우 아름다워 강남안에서 아담한 봉만을 등지고 발아래로 강류를 내려다 보는 석벽을 따라 경계가 됐기 때문에 드문 강변의 절경을 이뤘다. 


따라서 뜻있는 명사, 문인들이 이 강변 승경을 따라 누정을 짓고 강상풍월을 사랑했고, 많은 명사들이 이 곳 승경을 찾아 산책과 소창을 일삼았다. 또 이곳은 서울과 과천 땅의 경계가 됐기 때문에 옛날부터 많은 사람들이 이 노량진에서 석별의 술잔을 나누고 서울 출입의 서울 출입의 감회를 읊기도 했다. 


남쪽 지역에서 서울로 찾아 들어오는 사람들이 노량진에서 강 건너 서울을 바라보는 마음 또한 서울에서 남쪽으로 나가는 사람들의 감회 못지 않게 다정다감했다. 한말의 지사 해학 이기는 광무 7년(1903) 초가을, 기울어가는 조국의 앞날을 근심하면서 서울을 찾아오다가 노량진 남안에 있는 박주사기준의 강정에 올라, 


‘노량강상의 출렁이는 물결 새로 가을을 맞이한 것이 

정자와 여관들 어디 가도 하루를 놀만하구나

마을 길 따라 산 아지랑이 엉기고

언덕 위 누대엔 불빛이 어른 거린다.


모랫찬 가 없이 넓은데 사람은 다들 어디로 갔나

지는 해 바라보며 객의 수심 절로 난다

노어회 좋다 해도 나라 위한 일 아닌 것이

장한의 청아한 운치를 그대여 마르지 마소.’



이 시에서 해학은 중국 진나라 때 청류로 자처하던 장한의 고사를 들어 나무랐다. 즉 장한이 낙양에서 벼슬을 하다가 가을 바람이 일어나니, 고향인 오지방의 노어회 생각이 나서 벼슬을 버리고 수레를 몰아 고향으로 돌아간 일이 이야기거리로 전해온다. 그러나 이 때 해학은 국사를 근심해, 고향에서 서울로 돌아오는 길이니 그 생각하는 바와 행동이 장한의 혼자만의 청흥과 향수에 끌려 유연자적하던 행동과는 그 궤를 달리한다. 


철교가 건설되기 이전에는 이 지역에 설치된 노량진역이 서울로 들어오는 관문으로서의 구실을 수행했고, 철교가 세워진 뒤에는 경부선 및 전철 제1호선 등이 지나고 있다. 또한 한강의 남북을 연결하는 최초의 다리인 한강인도교가 설치돼 1번 국도가 지니고 있다. 주변에 강변도로. 88올림픽올림픽고속도로 등이 지나 교통요지로서의 구실은 현재에도 지속되고 있다. 


# 동작나루


동재기 나루터 표지석/현재 반포아파트 서편 이수천 입구에 해당하는 곳으로 표지석은 동작역 내에 있다. 서울특별시 동작구 동작동 근처 한강 남안에 위치했던 나루터로 일명 동작진 또는 동작도,동재기나루라 했다. ‘동재기’라는 이름은 흑석동에서 현 국립묘지로 넘어오는 강변일대에 검붉은 구릿빛 색을 띤 돌들이 많이 분포돼 있는 것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신증동여지승람’ 권8과 과천현 잔도조에 보면 과천현 북쪽 18리에 있었다고 했는데, 현재 반포아파트 서편 이수천 입구에 해당하는 곳이다. 진선이 5척 배치돼 있었고, 이 나루터 부근에는 수심이 깊은 모노리탄과 기도가 있었다. 


이곳은 인근 노량진 관할하에 있었는데 호남.호서지방의 과객과 사대부의 왕래가 빈번한 곳이었으나, 사선 몇 척이 운용돼 교통이 불편했다. 


동작노을카페에서 바라본 동작대교와 남산타워영조 4년(1728) 이인좌의 난을 계기로 나루의 관리를 철저히 하기 위해 별장이 파견됐고, 영조 22년(1746)에는 노량진의 나룻배 3척을 이관하므로써 나루터로서의 면모를 갖췄다. 


한편 도성에서 과천에 이르는 길목으로서의 동작진은 ‘춘향전’의 내용 중에 이도령이 춘향이를 찾아갈 때의 다음과 같은 구절 속에 보인다. 


‘역졸을 거느리고 가만히 숭례문을 내달아 칠패 팔패 돌모루백사장을 지나고 동작강 얼른 건너 남태령 뛰어 넘어 과천에 이르니...’


또 1857년 철종은 이곳에 주교를 만들어 인릉을 찾기도 했다. 


# 흑석나루


흑석동 강변(현재 원불교 서울회관부근)에 있었던 흑석나루터

조선시대 관천현 북쪽, 즉 현재의 동작구 흑석동 강변(현재 원불교 서울회관부근)에 있었던 나루로, 도성에서 수원이나 과천 방향으로 왕래하려면 노량진이나 한강도를 이용해야 하는데, 통행량이 많고 기찰이 심해 민간인들은 사선으로 운행되는 이곳을 이용하기도 했다. 


조선 초기에 주로 이용됐는데, 태조 4년(1395)에는 용산에서 충주에 이르는 사이에 7개소의 수참을 설치해 세곡운송의 편의를 도모하면서 이곳에도 수참을 설치해 참선의 정박소로 했다. ‘세종실록지리지’에 의하면 참선 15척이 비치돼 있었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 이르러 수참이 폐지되고 또한 인근에 동작진이 개설되면서 기능을 잃어갔다. 광복 이후 한때 이곳은 조정경기훈련장으로 돼 몇 척의 카누가 멋지게 물살을 가르고 오가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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