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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 구석 구석 104] 높은절과 번댕이 두 마을로 이뤄진 ‘대방동’
  • 박광준 기자
  • 등록 2022-12-22 08:40:24
  • 수정 2024-03-14 06:5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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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공군사관학교 시절 모습/사진 하단에 연못이 보인다./자료사진  [박광준 기자] 대방동 동명의 유래는, 이곳은 지금으로부터 약 350년 전인 조선시대에는 높은 절과 번댕이라는 두 마을로 이루진 곳으로, 일제 때 번대방리라 일컫다가 광복후 대방동으로 명명됐다. 


# 대뱡동의 자연부락 명칭과 자연지명 


청련암 터 ‘높은절이’는 청련암 아래에 있는 마을로 높은 절 아래에 있는 마을이라 해 붙여진 이름이고, ‘번댕이’는 예부터 낙천군,연령군의 묘를 모신 계동궁 연못이 있었던 곳이라 해 붙여진 이름이고, ‘안말’은 대방동 안쪽의 마을이라 해 붙여진 이름이다.


‘서낭동고개’는 옛날 서낭당이 있었던 고개로 성남중고등학교 후문에서 공군본부 의무실 방향으로 넘어가는 고개를 말하고, ‘덕굴고개’는 대방동에 있는 고개 이름이다. 


성남고등학교 운동장 한편에 있는 우물 현재 성남중고등학교 운동장에 있는 용마우물은 용마가 났다는 우물로 예부터 물맛이 좋다고 한다. 또 ‘용마산’이라 하는데 용마우물에서 용이 나와 그곳으로 올라갔다해 붙여진 이름이다. 


‘법덕온천’은 지금부터 약 100여년 전 일본인이 물이 좋다는 것을 알고 지금의 공군본부 자리에 샘을 팠는데 보통 우물은 약 100자 정도였으나 이곳은 700여자로 깊이 파인 우물로 목욕탕을 만들어 널리 이용했다고 한다. 


대방동은 조선시대에는 농업과 한강을 중심으로 한 어업과 상업에도 일부 종사하는 서민층들이 사는 순박한 마을이었고, 일제 때는 공장이 이 마을에 들어서기도 했다. 1970년대부터 강남지역이 신흥도시로 개발되고 인구가 급격히 늘어났으나 대방동은 사당동과 함께 강남지역치고는 뒤늦게 개발돼 신흥주택지역이긴 하나 강남의 다른 지역에 비해 뒤떨어지는 편이다. 


현재 사무실만 남아있는 유한양행

또 공업으로는 유한양행 등이 있어 공업지대로 떠오르긴 했으나 1979년 경기도 안양시로 옮기고 현재는 영업활동만하는 사무실만 남아 있다. 공업지대로서는 인근 구로구나 영등포구에 뒤지는 편으로, 주민들은 대부분 상공업에 종사하거나 회사원이며, 생활은 소시민으로 평범하고 소박한 생활을 영위하고 있는 편이다. 


# '실미도 사건'의 현장 유한양행 앞


유한양행빌딩 앞 인도에는 이곳이 '실미도 사건 현장'이었다는 사실을 알리는 동판이 설치돼 있다. 실미도 사건은 우리나라 최초로 1천만 관객을 돌파한 영화 '실미도'(2003)로 잘 알려져 있지만, 실미도 사건(1971. 8. 23)의 마지막 격전지가 대방동 유한양행 앞이었다는 사실은 의외로 많이 알려져 있지 않다.


실미도부대(684부대)는 1968년 북한의 특수부대가 청와대를 습격하려고 침투한 '1.21 사건'이 발단이 되어 같은 해 4월 실미도에서 창설된 특수부대였다. 형식적으로는 공군 소속이었지만, 사실은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중앙정보부가 만들고 지원한 부대로, 북한의 124부대원 31명이 청와대 500m 지점까지 침투한 '1.21 사건'은 28명이 사살되고 1명이 생포되는 것으로 마무리됐다(2명은 북으로 탈주). 하지만 우리 측에서도 30명의 사망자와 50명의 부상자가 발생하는 등 피해가 만만치 않았다.


영화 실미도 포스터더군다나 생포된 김신조가 "박정희의 목을 따러 왔다"라고 말해 세상을 놀라게 하기도 했다. 이에 대한 보복을 목적으로 한 실미도부대는 그래서 북한의 124부대와 똑같이 31명으로 구성됐다.


1971년 8월 23일 발생한 실미도 사건을 영화화한 영화 '실미도'는 다음 해 미국의 베트남전 군사개입 회피 구상 등이 담긴 닉슨독트린이 발표되고 미국과 중국의 핑퐁외교가 시작되면서 실미도부대에 위기가 닥쳐온다. 졸지에 박정희 군사정권의 골칫거리로 전락한 것이다. 이 와중에 부대원들에게 지급돼야 할 부식비마저 중간에 누군가 떼어먹는 일까지 발생하고, '국가기밀을 염려해 처단될 것'이라는 소문마저 돈다.


결국 부대원 24명(31명 중 7명은 여러 사건.사고로 이미 사망한 상황)은 기간병 14명을 사살하고 폭동을 일으킨다. 이들은 "청와대로 가서 대통령에게 따지자!"라면서 인천을 거쳐 버스를 탈취해 서울로 향하다 대방동로타리를 지나면서 군경과 마지막 격전을 치른다. 이때 운전병 김종철이 복부 관통상을 당하면서 유한양행 앞 가로수를 들이받는데, 이때 수류탄이 터지면서 6명을 제외한 전원이 사망한다. 살아남은 2명도 병원에서 곧 사망하고, 4명은 군사재판을 통해 총살형에 처해진다.


'실미도 사건 현장' 동판 서울시는 인권의 역사에서 기억해야할 상징적인 장소에 이를 알리는 동판을 설치했다. 그런데 '실미도사건 현장'을 알리는 동판은 당시의 유한양행 건물(현 유한양행 빌딩 건물 서편 2층 짜리 건물) 앞이 아니라 현 유한양행 빌딩 앞 인도에 설치돼 있다.


그런데 박정희 정권은 '실미도 사건'이 터지자 처음에는 북한의 '무장공비 침투 사건'이라고 거짓 발표한다. 버스승객의 증언을 통해 곧 북한의 무장공비가 아니라 한국군이라는 사실이 알려지자 이번에는 '군 특수범의 난동'이라고 또다시 거짓 발표한다. 


미군이 주도한 켈로(kelo)부대로 시작된 북파공작원의 역사는 1972년 7.4남북공동성명이 발표되기 전까지 무려 1만1000명을 넘어섰고, 이 중 7726명은 돌아오지 못했다고 한다. 남이나 북이나 분단 상황에서 정권안보를 위해 애꿎은 시민들이 이렇게 희생되고 있었던 것이다.


교육기관으로는 서울공업고등학교가 있다. 이 학교는 1899년 5월 5일 고종의 칙령에 의해 당시 농.상공부대신이던 권중현이 설립했다. 설립 당시는 염직.도기.금공.목공.응용화학. 토목 등 6학급으로 시작됐고, 초대교장은 일본인이었다. 1906년 농.상공학교에서 공업전습소로 바뀌었다. 1950년 6.25동란 때 본관은 소실됐고, 학교는 부산으로 피난해 동래 초량동에서 개교 했다. 


서울공업고등학교 본관 전경 반면 서울의 본교는 미군 야전병원으로 이용됐고, 1951년 학제 변경에 따라 서울공업고등학교와 영등포중학교로 분리됐고, 1978년 3월 정부의 공고 특성화정책에 따라 서울기계공업고등학교로 개편됐다가 1994년 1월 5일 다시 서울공업고등학교로 개칭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중.고등학교로는 영등포중.고등학교, 성남중.고등학교, 강남중학교가 있고, 초등학교로는 영화초등학고, 신길초등학교, 대림초등학교가 있다./사진-박광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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