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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유공자를 찾아서 34] 임정의 숙원인 광복군 창설한 '조성환'
  • 이승준 기자
  • 등록 2022-12-17 07:3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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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준 기자] 조성환 曺成煥, 1875.07.09 ~1948.10.07. 서울 서울, 대통령장 1962


단결은 약자의 무기다라는 말은 자명의 진리인 것이다. 그 단결의 길은 일시적 권모술수에 있는 것이 아니고 단지 정대한 정의와 광명뇌락(光明磊落)의 정신을 근거로 한 당적결합에 있는 것으로 믿는다.-<대독립당조직북경촉성회> 선언문 중 일부(1926년 10월 16일 북경에서)


# 육군 무관학교생으로 부정부패 척결하려다 사형선고 받다


조성환(曺成煥, 1875. 7. 9 ~ 1948. 10. 7) 선생은 1875년 7월 9일 서울 낙원동에서 출생했다. 본관은 창녕(昌寧), 호는 청사(晴蓑)이고 이명은 조욱(曺煜<旭>)이다. 25세가 되던 해인 1900년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에 입학했다. 그 당시 일본에서 군사교육을 받고 귀국한 무관들이 군대의 주요 요직을 차지, 일제와 친일 정치인들과 결탁해 권력을 악용, 군부를 부패시키고 있었다. 이에 격분한 선생은 “썩은 군대는 곧 나라를 망치게 합니다. 속히 썩은 자들은 이 땅에서 영원히 추방시켜야 합니다.”라고 외치고 부패한 군부를 숙청하려다 발각돼 사형(死刑)선고를 받았고 그 뒤 무기징역으로 감형된 뒤 3년 만에 칙령으로 특사돼 참위로 임관됐으나 얼마 뒤 군대에 환멸을 느껴 결연히 군을 떠났다.


1907년 9월 안창호, 양기탁 등과 함께 비밀결사인 신민회(新民會)를 조직헤 항일구국운동에 투신했다. 신민회를 창립한 세력은 5개의 국권회복운동계열을 근간으로 해 형성됐는데 무관학교 출신으로서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하고 있던 계열, 양기탁이 중심이 돼 영국인 베델(裵說)과 합작으로 창간한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를 중심으로 구국언론활동을 하던 계열, 전덕기.이회영.이동녕 등을 중심으로 한 상동교회와 그 부설 교육기관인 상동청년학원을 주축으로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하고 있던 계열, 평안도 중심으로 활발하게 성장하고 있던 상인과 실업가 등 민족자본가들의 계열, 미주에서 안창호.이강.정재관 등을 중심으로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하고 있던 공립협회(公立協會) 계열 등이다.


선생은 무장투쟁을 강조해온 30대의 무관학교 출신으로서 이동휘.이갑.유동열.노백린 등과 15명의 최고간부(군인) 중의 1인으로 활동했고 신민회 동지들과 구국방략을 협의하고 일단 북경으로 망명해 그곳을 근거지로 해 간도, 노령 등지를 편력하면서 독립운동의 터전을 다지는데 심혈을 기울였다. 1908년 1월 노우키에프스크(연추)에서 최재형을 만난 후 북경으로 가서 활동했고 그 후 귀국해 서울 이종호의 집에서 노백린.이갑.유동열.안창호.양기탁 등과 회합해 운동방안을 숙의하고 국외기지 건설을 위해 다시 떠나게 되자 이갑 등은 500원을 거출해 군자금으로 조달해 주었다.


# 침략 주범인 일본 총리 처단을 계획하다 체포되어 거제도에 유형. 석방 후 중국으로 망명


1910년 8월 국권 침탈후 민족종교인 대종교에 귀의해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한편 민족운동을 전개했다. 대종교는 나철이 단군숭배사상을 기초로 해 창시한 종교로 원래 명칭은 단군교였으나 국권침탈후 일제의 탄압으로 국내에서의 포교활동이 어려워지자 동삼성 지방으로 그 활동의 중심지를 옮겼다. 당시에 선생은 북경과 만주 등지에서 활동하던 중에 중국인 혁명가 진기미(陣其美)를 알게 돼 한국과 중국이 공동연합전선을 구축해 항일투쟁을 전개할 것을 주장했다.


1912년 일본 총리 대신 가쓰라 다로(桂太郞)가 중국 동북지방을 시찰하는 기회를 이용해 암살을 기도했으나 사전에 발각돼 뜻을 이루지 못하고 체포됐고 거제도에 1년간 유형(流刑)됐다가 석방되자 1913년 또 다시 중국으로 망명했다. 1916년 9월 신규식.민충식.박은식 등과 체화동락회(棣華同樂會)를 조직해 교민의 단결 및 재외 한인단체와의 연락을 유지하면서 항일운동을 전개하는 한편, 박달학원을 설립해 청소년 교육에 정열을 쏟았다. 한편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인접한 연해주와 흑룡주 일대에는 많은 독립지사들이 성명회, 권업회, 대동회 등을 결성하고 민족의식을 고취하고 계몽활동을 펴고 있었다. 선생은 다시 동삼성으로 건너가 이러한 활동에 적극 참여하면서 여러 단체의 통합에 노력을 경주했다.


그 뒤 길림성 당국과 교섭하여 흑룡강성 오운현(烏雲縣)에 약 5,000호가 거주할 수 있는 농지를 마련하고 항일독립운동 기지와 실전에 배치할 독립군을 양성키 위해 둔전제(屯田制)를 실시하려고 했으나 1917년 러시아 혁명으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러나 러시아 혁명의 영향으로 우리동포들은 언론, 결사의 자유를 얻게 됐고 6월부터는 각 지방의 대표들이 니콜라예프스크에 모여 노령거주 동포들의 조직통일과 새로운 운동방향에 관해 토의했다. 그리하여 같은 해 12월 쌍성(雙城)에서 전로한족회 중앙총회가 결성돼 대부분의 단체가 이에 통합됐다. 중앙총회는 각지에 분회를 설치하고 중앙총회에 다시 지방연합회 상설위원회를 설치해 중앙, 지방간에 긴밀한 연락을 취하면서 사업을 확대시켜 나갔다. 1919년 2월 한인(韓人)의 자치적 성격을 강화키 위해 전로한족회 중앙총회는 대한국민의회로 개칭됐다.


# 민족대표 39인 중 한 사람으로 대한독립선언서를 선포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참여


3.1운동이 일어나기 전인 1918년 말(음력) 만주 길림에서 대한의 완전한 자주독립과 평등복리를 후손들에게 전하기 위해 일제의 학대와 압박을 벗어나 대한민족의 자립을 선명(宣明)한 대한독립선언서가 선포됐는데 선생은 김교헌.김동삼.조소앙.이동녕 등 39명의 한 사람으로 서명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블라디보스톡에 있던 대한국민의회는 이를 경축하고 실질적인 독립운동을 전개하기 위한 임시정부의 수립을 결의한 뒤 독자적인 조각(組閣)을 단행했다. 그런데 각지에서 임시정부 수립을 요구하는 여론이 비등해지자 각 지역 대표들이 1919년 3월 중순 상해에 모여 임시정부 수립을 위한 모임을 가졌는데 선생은 이때 노령대표로 상해로 건너가서 이동녕·이시영·신채호 등과 함께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했다.


# 상해 임정 군무차장으로 일하다 1919년 동만주로 돌아가 무장투쟁 참가


이 모임에서 지역의 대표들을 선출해 임시의정원을 개최했고 이 임시의정원에서 국무위원을 선출했다. 조성환.이동녕 등 29명의 의원들이 4월 11일에 국호 및 관제를 정하고 각료를 투표로 선출한 후 4월 13일 역사적인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출발을 내외에 선포했다. 이때 선생은 임시정부 군무차장으로 임명돼 총장인 이동휘를 보좌하면서 임정 초대 내각을 맡아 활동하는 한편 임시의정원에 노령 대표의원으로 선출돼 입법활동을 했고 그 뒤 차장제가 위원제로 개정할 때 군무부 위원이 됐다. 그리고 국내에서 13도 대표로 구성된 국민대회에서 한성임시정부가 조직되자 평정관으로 피선되기도 했다. 그 후 임시정부 외교위원부에 소속되어 북경주재 요원으로 있다가 1919년 8월 다시 동만주로 돌아가 무장독립운동에 참가했다. 한편 동만주에서는 일찍이 서일을 단장으로 한 중광단이 조직돼 광복운동을 전개하고 있었는데 선생도 여기에 참가해 많은 동포청년들을 단합시키고 민족정신 고취에 중점을 두고 동단을 이끌어 나갔다. 3.1운동 이후에 군사적인 행동을 적극 취하기 위해 당시 동북 만주에 산재해 있는 대종교도(大倧敎徒)를 규합, 정의단(正義團)을 조직해 강령을 배포했고 격문이 이르는 곳마다 청장년이 이에 호응해 그 세력이 확대돼 만주 각지에 5개 분단과 70여 개소의 지단이 설치됐다.


# 북로군정서 군사부장을 맡아, 군사훈련에 주력하여 청산리 대첩의 원동력을 만들다


조성환이 안창호에게 보낸 편지(1912)1919년 7월에는 군정부를 조직하고 인재모집과 군대훈련에 주력했고 10월에는 군정부를 확대 강화했다. 군정부의 본영은 왕청현 서대파에 뒀고 중심 인물로 선생을 비롯해 서일.이범석.김좌진 등이 있었다. 같은 해 12월에 임정의 지시에 따라 군정부가 북로군정서로 개편되자 선생은 군사 부장에 취임, 군사훈련에 전력투구한 결과 청산리 전투를 승리로 이끄는 원동력이 됐다. 1920년 왕청현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에서 패배한 일본군이 만주전역에서 잔인한 참살 보복전을 전개하자 각지에 산재해 있던 독립군은 소(蘇).만(滿)의 국경지대인 밀산에 집결했다. 이들 독립군 부대들은 북로군정서, 대한독립단, 간도국민회, 대한신민회, 의군부, 혈성단, 광복단, 도독부, 야단, 대한정의군정사/ 등 10개 단체였고 이들은 각 단체 대표자 회의를 열어 수 차례에 걸친 타협과 격론 끝에 대한독립군단을 조직했다. 주요간부는 총재에 서일, 부총재에 조성환.김좌진.홍범도, 총사령에 김규식, 참모총장에 이장녕, 여단장에 지청천이 취임해 무장투쟁을 계속할 것을 결의했다. 병력 3,500여 명의 대한독립군단은 같은 해 12월 흑룡강을 건너 노령 자유시일대에 주둔하게 됐다. 그곳에 거주하고 있던 50만 교포와 소련 정부의 원조로 전력을 재정비 강화하고 무관학교를 설립해 강력한 군대를 양성할 계획이었다.


# 이르쿠츠크에 군관학교를 설립해 독립군 간부 양성에 진력하다


선생은 노령 이만에서 지청천·최진동·오하묵·홍범도·안무·김규식 등과 함께 고려의용대를 조직하고 이르쿠츠크에 고려혁명군학교를 설립, 독립군 간부를 양성 배출했고 백계 러시아군 토벌전에 참가하기도 했다. 그러나 1921년 6월 일본의 압력과 공산주의자들의 배반으로 소련이 독립군에게 무장해제를 요구하게 됐고 이에 반대하는 독립군을 습격하는 이른바 흑하사변(일명 자유시 참변)이 발생해 수많은 독립군이 희생당하는 비운을 겪었다. 이 지역에서 더 이상 활동이 곤란하게 된 남은 독립군은 북만주 방면으로 이동하지 않으면 안됐다. 이때 노령방면에서 이동한 독립군 부대들이 다시 모이게 되자 북만주에서의 독립군세력은 다시 강화됐다.


# 흑하사변으로 흩어진 독립군을 재통합해 재건사업에 힘쓰다


또 1922년 8월에는 기존의 군사조직이었던 군정서, 의군부, 혈성단, 독립단, 광복단, 국민회, 신민단, 대진단, 의민단 등 9개 단체의 일부 대표인사들이 이전의 대한독립군단의 재조직을 결의하고 이범윤을 임시 단장으로 추대하는 동시에 통합취지서를 발표했다. 이러한 통합계획이 계속 추진돼 1923년 9월에는 이범윤.김좌진.김규식 등이 각 단체의 통합을 위한 군사연합회의 준비회의를 열었다. 이때 선생은 신변의 위협을 무릅쓰고 각 단체의 연락관계를 맡아 통합에 온 힘을 기울였다. 선생은 김규식과 함께 1924년 3월에 각지에서 개별적으로 활동하던 북로군정서의 간부진을 모아 군정서의 진영을 새롭게 정비했다. 그 간부진을 보면 총재에 현천묵, 군사부장 겸 참모에 선생이 임명됐고 김규식은 참모가 됐다. 같은 해 4월에 영고탑에 있는 대종교 회당에서 군정서연합회(軍政署聯合會) 총회를 열고 세부계획을 결의해 대일전쟁을 준비했다. 이 계획에 따라 5월부터 모연대(募捐隊)를 하얼빈, 동녕현 및 북간도 방면으로 보내어 무기구입을 위한 군자금을 모집하고 오운현에 사관학교 설립계획을 추진하는 등 군정서 간부진을 설득해 재건사업에 힘썼다.


이후 군정서는 1925년 김좌진.김혁.나중소 등을 중심으로 한 신민부(新民府)로 발전했다. 신민부의 조직체 중심은 중앙집행위원회로써 위원제를 채택했는데 군사행동은 모두 김좌진에게 위임해 530명의 군인을 군사 훈련시키도록 했다. 본부의 관할구역은 중동선(中東線)을 중심으로 하여 종단으로는 장춘에서 구참(九站)까지이며 횡단으로는 백두산에서 흑룡강까지였다. 신민부는 45만 한족 교민의 토대 위에 서 있는 하나의 행정부였다. 그리하여 자치구역내에 군구제(軍區制)를 실시헤 만 17세 이상 40세 이하의 남자를 군적에 등재하고 민병 12개 지대를 설정했다. 또한 자치구역 밖의 한족(韓族)촌락에도 행정구를 설치하고 세금을 징수했고 문맹퇴치 등의 계몽활동을 펴는 한편 민족 반역자 징계, 일제기관 파괴활동을 했다.


# 신민부를 조직하여 외교부 위원장으로 일하며 성동사관학교에서 사관 양성에 진력하다


조성환 명함김좌진은 혁명원로들을 중앙집행위원으로 삼고 같은 해 3월 영안현에서 중앙집행위원회를 열고 위원단을 선임했는데 이때 선생은 외교부 위원장에 임명됐고 신민부가 직할 무장군인 양성 사관학교로 성동사관학교[(城東士官學校, 교장 : 김혁(金爀), 부교장 : 김좌진)]를 설립하자 이 학교의 고문으로서 독립군 양성에 전력을 경주했다. 그 후 선생은 외교부 위원장의 직책상 대중국 관계개선을 위하여 북경에 주재하게 돼 유일독립당 조직운동에 참가하는 기회를 갖기도 했다.


1925년 7월 상해 임시정부 의정원의 헌법개정에 따라 이상룡이 국무령에 선임되자 선생은 이탁.김동삼.오동진.김좌진 등과 같이 국무원에 임명됐으나 이들은 무장활동의 본거지인 동삼성을 떠날 수 없다 해 취임하지 않았다. 이로 인해 새로 임명됐던 국무원들은 다음해(1926) 2월 18일 일괄 해임됐으나 선생은 동년 10월 12일 다시 국무위원에 임명되기도 했다. 1924년 11월 중국 길림에서 대한군정서, 길림주민회, 대한광정단, 의성단 등 8개 단체 대표 25명이 모여 김동삼을 의장으로 통합회의가 열려 정의부를 조직할 때 선생은 이장녕, 김철 등과 함께 군사 분과위원으로 활동했다. 자치정부의 성격을 띤 정의부는 재만한인의 군사력 증강을 위하여 주요지역에 청년훈련소를 설치 운영하였으며 농촌마다 군사보급회를 설치해 청년장교들로 하여금 순회 파견단을 조직하여 청.장년 및 군사 경험자들을 대상으로 군사교육을 실시했다.


# 한국독립유일당촉성회를 조직, 선포하고 촉성보를 발행하여 대동단결을 호소하다


1926년 8, 9월경 북경의 독립운동계에서는 분열돼 있던 독립운동단체들을 대동단결 시키기 위한 새로운 방략이 모색됐다. 안창호가 중심이 돼 원세훈과 함께 대 독립당을 결성키 위해 시도한 끝에 동년 10월 북경에서 <한국독립유일당촉성회(韓國獨立唯一黨促成會)>를 조직하였으며 이때 선생은 이런 내용의 선언서를 발표했다.


“단결은 약자의 무기다, 라는 말은 자명의 진리인 것이다. 그 단결의 길은 일시적인 권모술수에 있는 것이 아니고 단지 정대한 정의와 광명뇌락의 정신을 근거로 한 당적 결합에 있는 것으로 믿는다. (중략) 이 결합을 하루 바삐 실현하기 위한 노력을 하기 위하여 <한국독립유일당촉성회>를 조직한다.”


선생은 동시에 촉성보(促成報)를 간행해 단체의 단결과 단일투쟁을 호소했다. 선생의 이런 노력이 기폭제가 돼 1927년 4월에는 홍진(洪震)과 홍남표(洪南杓) 등을 중심으로 한국유일독립당 상해촉성회가 조직되고 이어서 광동, 남경, 무한 등지에도 파급됐다. 1927년 11월에는 각지 촉성회가 연합해 상해에서 <한국독립당촉성회 대표연합회>가 개최될 때 북경대표로 참가해 한국독립당관내촉성회 연합회를 조직했고 각지의 촉성회를 연결해 <유일당 조직주비회>를 결성하는 것이 동 조직의 목적이라고 밝혔다. 민족진영은 이와 같은 유일당 결성을 통하여 독립운동계의 통일을 도모하고자 했으나 코민테른의 12월 테제에 의해 좌익세력이 1929년 11월에 상해촉성회의 해체선언을 발표함으로써 유일독립당 운동은 실효를 거두지 못했다.


조성환 선생과 부인# 윤봉길 의사의 의거 후 독립운동가들의 연합전선을 구축하여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 결성


민족유일당운동은 조직방법론의 차이와 사상의 대립으로 실패했으나 일제의 대륙침략이 본격화 되고 만주사변과 윤봉길 의사의 의거로 중국에서의 독립운동이 새로운 활기를 띠게 되자 선생은 또 다시 좌우익 연합 전선을 추구했고, 그 결과 1932년 10월 12일 상해에서 한독당, 조선혁명당, 의열단, 한국혁명당 등의 대표가 회합을 갖고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韓國對日戰線統一同盟)>을 결성했다. 이 동맹은 강력한 통일정당을 조직할 필요성을 느끼고 1935년 7월 남경에서 민족 대동단결체로서 민족혁명당으로 개편했으나, 투쟁방법론의 차이로 민족진영 즉 상해 한독당 계열의 인사와 신한독립당 계열인 선생과 홍진 등은 민족혁명당에서 탈퇴하고 말았다. 이러한 상황의 전개에 따라 정당의 이합집산이 성하고 실질적인 대일항전은 쇠약해지는 가운데 임시정부는 매우 어려운 고비를 극복하지 않으면 안됐다.


# 한국독립당 대표로 임시정부 외곽연합단체인 <한국광복진선>을 결성


한편 동삼성 일대에서 활동하고 있던 선생은 1930년대 초반에는 다시 임시정부에 합류해 1931년 12월 24일 제23회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윤기섭.조완구.조소앙 등과 같이 임시의정원의원(경기도 의원)으로 당선돼 활동했고 1933년 2월 재선됐다가 같은 해 12월 25일 사임했다. 1934년 1월 3일 임시정부 국무위원에 선임됐으나 약 1개월 뒤인 2월에 사임하고 말았고 1935년 10월 임시정부 군무장으로 선임돼 임시의정원 의원을 겸임했다. 중일전쟁이 일어나던 1937년에는 주석 이동녕을 도와 군사정책을 강화해 갔고 이동녕.이시영.김구.차리석.엄항섭 등과 함께 한국독립당 대표로 임시정부의 외곽 연합단체인 한국광복진선(韓國光復陣線)을 결성했다.


1938년 군사학 편찬위원회 주임위원으로 임명돼 지청천.유동열.김학규 등과 함께 군사학을 편수 번역했다. 1939년 10월 임시의정원 의원에 중선되고 동월에 임시정부 국무위원에 선임됐고 같은 해 11월 임시정부 군사 특파 단장으로 서안에 파견돼 한국광복군 설립의 기초를 착실히 닦았다. 그러한 가운데서 1939년 임시정부 기강 시대에는 독립운동 3개년 계획을 세우고 조직, 군사, 외교, 선전, 재정을 중심으로 독립운동방략을 수립했고 선생은 군사관계를 담당해 군사특파원으로 섬서성의 서안에 파견되어 공작임무를 수행하고 중국의 화북, 만주 방면에서 선전 초모 활동을 활발하게 전개했다. 1940년 임시정부가 중경으로 옮겨왔을 당시 선생은 민족진영의 정당인 조선혁명당, 한국국민당, 한국독립당을 통합해 새로운 한국독립당을 창설하는데 주도적 역할을 했고 이때 임시정부의 국무위원으로 군무부장직을 수행하면서 당시 임시정부의 최우선 과제인 광복군 창설에 주력해 1940년 9월 17일 마침내 한국광복군이 창설됐다. 1941년 대원수부의 막료로 군무부장에 선임되고 이어 최고 원수부의 판공처장(辦公處長)에 임명됐다.


# 임시정부 군무부장으로 임정의 숙원인 광복군을 창설하다


1942년 10월 25일 다시 임시의정원 의원에 선임됐고 중국측이 광복군의 발목을 묶는 9개 행동준승 폐기에 전력해 이를 폐지하는데 기여했다. 임시정부 군무부장에 임명됐던 선생은 1943년 2월 헌법개정에 의해 다시 국무위원에 선임돼 대일전(對日戰)을 지도했다. 1945년 5월 8일에는 임시의정원 제4과(군무교통) 위원에 피선돼 활동하던 중 8․15광복을 맞았다. 같은 해 12월 임정요인들과 같이 환국, 대한독립촉성회 위원장, 성균관 부총재 등을 역임하다가 1948년 10월 7일 서거, 사회장으로 효창원에 영원한 안식처를 마련했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사진출처-국가보훈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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