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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유공자를 찾아서 33] 청산리에서 독립군 최초의 승전을 거둔 '안무'
  • 이승준 기자
  • 등록 2022-12-17 06:4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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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준 기자] 안무 安武, 1883.06.29 ~1924.09.07. 함경북도 종성, 독립장 1980


독립군의 독립전쟁은 승패여부를 떠나, 투쟁 자체로서 깊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 민간 중심의 무장조직으로서 일본 정규군을 상대하여 독립전쟁을 전개하였다는 점에서 한국 독립군의 활동은 그만큼 더욱 값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대첩의 주역으로 활동하다가 1924년 9월 7일 북간도 용정에서 순국한 안무 장군의 빛나는 위업은 무장독립운동사에 길이 빛날 것이다.


# 대한제국 군대가 강제해산 당하자 군복을 벗고 향리로 내려가 독립투쟁을 준비


안무(安武, 1883. 6. 29 ~ 1924. 9. 7) 장군은 1883년 6월 29일 함경북도 경성(鏡城)군 행영(行營)면에서 출생했다. 일명 병호(秉鎬), 호(號)는 청전(靑田)이다.


17세까지 고향에서 성장한 선생은 1899년 대한제국 진위대 병사로 입대해 하사관을 거쳐 서울 교련관 양성소를 졸업한 후 무산 등지에서 교련관으로 근무했다. 교련관은 조선후기 각 군영 소속 군관직의 하나로서 주로 군대의 교련을 맡은 품외직으로 출신(出身), 전함(前銜), 한량(閑良), 항오(行伍, 兵卒)를 막론하고 사법(射法), 병서강(兵書講), 진법(陳法) 등 3기(三技)로써 시험을 치러 선발했다.


1907년 8월 1일 대한제국군이 일제에 의해 강제해산 당하게 되자 시위대 제1연대 1대대, 제2연대 1대대 병사들은 통분함을 이기지 못하여 일군과 전투를 벌였다. 당시 일군과 교전중 전사한 장교가 11명, 사병은 57명, 부상자가 일백여 명, 그리고 피체된 수는 막대였다.


서울에서의 군대 해산과 시위대의 항전은 지방 진위대 병사들에게 알려지고 시위대에 대한 일군의 잔인한 학살 행위는 그들을 격분시켰고 순식간에 한국군의 봉기는 전국적으로 확산됐을 뿐만 아니라 일반 백성 중에서도 의병을 모집해 일군과 싸우는 의병전쟁으로 확대됐던 것이다. 일제하에서 군에 몸담고 있다는 것은 양심상 도리가 아니라고 생각한 선생은 즉시 군복을 벗어 던지고 함북 경성의 함일학교(咸一學校)와 무산의 보성학교(普成學校)의 체육교사로 지내면서 학생들에게 병영식 체조를 가르쳐 장차 독립군으로서 필요한 체력과 담력을 배양시켰다.


# 경술국치 후 만주에서 대한국민회 소속 국민회군을 조직해 사령관에 취임


1910년 8월 29일 경술국치를 당하게 되자 선생은 울분을 더 참을 수가 없어 구국항쟁에 투신키로 결심하고 북간도로 망명했다. 당시 북간도 명동촌에 정착해 항일활동을 전개하던 이동휘와 김약연 등을 만나 1919년 대한국민회를 조직하고 동회 소속부대인 국민회군 3백여명을 편성해 무장시키는 한편, 사령관으로 취임해 무장항일투쟁을 전개했다.


대한국민회는 1919년 3월 13일 용정에서의 만세운동 이후 간민회(墾民會) 출신의 인사들이 주축이 되어 간민회의 한인자치와 독립전쟁의 전통을 계승해 결성한 단체이다. 1919년 3.1운동을 계기로 만주방면에는 여러 개의 독립투쟁을 위한 단체들이 조직됐다. 북간도 지방과 훈춘에서 황병길, 박치환 등의 주도로 건국회(建國會)가 조직되고 화룡현 태랍자에서 충렬대가 조직됐고 연길현 국자가에서는 자위단(自衛團)과 조선국민의사회가 조직됐다. 상해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연길, 왕청, 화룡 3개현의 독립운동단체 대표가 모여 회의를 열고 간도 대한국민회로 통합, 발전시켰던 것이다.


# 구춘선 등과 함께 중국 측과 긴밀히 협조해 독립군 양성에 힘쓰다


대한국민회의 기관 및 역원(役員)(1920년 12월 20일)국민회는 3개현을 5개 구회로 나누고 그 밑에 52지회를 두어 기구를 정비하는 한편 임시정부 산하에 속하게 하고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그 후 훈춘 대한인국민회의 모든 회원을 합쳐 80여 개 소의 지휘로 확대시켰고 이들 지회를 통해 거주동포들의 자치생활에 치중하는 한편, 군자금 모집과 무기를 구입해 독립군 부대를 양성했다. 그 중에도 국민회의 지도자 김영학(金永學).김약연(金躍淵).김내범.구춘선.마진.유찬희(類瓚熙).강백규(姜百奎).신학봉(申學奉).정재면(鄭載冕) 등 인사들은 현지의 중국 관헌과 긴밀한 협조로 중국 관민들의 깊은 이해와 협조를 얻어 당시 중.일간에 분쟁이 됐던 무기 반입과 독립군 훈련 등을 순조롭게 추진할 수 있었다. 이때 장군은 국민회의 국민군 300여 명의 훈련을 직접 담당해 정예부대로 키워 나갔고, 장정을 모집해 2개월간 군사훈련을 시키고 무기는 니콜리스크에서 구입하는 한편, 사관양성을 위해 명월구에 무관학교를 세우는 등 본격적인 무장역량 강화에 힘을 쏟았다. 그리하여 전력면에서 가장 막강한 부대로 육성했다.


# 명월구에 무관학교를 세워 사관양성과 전투력 배양에 힘쓰다


대한국민회는 본부 회장 구춘선 지휘 아래 본부 및 지회를 중심으로 한 민정조직과 군사조직으로 나눴는데 군사조직은 다시 홍범도의 대한독립군과 안무의 국민회군으로 나누어 대한독립군은 대한국민회의 산하 단체로서 국내 진입작전을 담당했다. 국민회군은 안무를 사령관으로 하는 대한국민회의 직속 군사조직으로서 대한국민회 관할구역 내의 북간도 지역을 순회, 주둔하면서 경찰군의 역할을 담당했다. 봉오동 전투가 개시되기 직전인 1920년 5월 28일에는 대한독립군과 국민회군 및 군무도독부가 연합해 대한군북로독군부(大韓軍北路督軍府)를 조직하고 군무도독부의 병영인 봉오동에 병력을 집결시켜 강력한 국내 진입작전을 계획했다. 이 무렵 대한독립군의 병력은 최진동의 군무도독부 계가 약 670명, 홍범도와 안무의 국민회 계가 약 550명으로 총 1천 2백여 명이었고, 무기는 기관총 2문, 장총 약 900정, 권총 약 2백정, 폭탄(수류탄) 약 1백 개 탄환 군총 1정당 150발 망원경 7개를 보유하고 있었다.


# 봉오동 전투에 대비해 전력을 강화시키다


연합독립군의 편성은 사령관에 최진동, 연대장에 홍범도, 제1중대장 이천오(李千五), 제2중대장에 강상모(姜尙模), 제3중대장에 강시범(姜時範), 제4중대장에 조권식(曺權植)을 임명했고 이때 선생은 최진동 사령관의 부관에 임명됐다. 1920년 4월 20일 연길현 화전사(延吉縣 樺田社)에서 국민회와 군무도독부, 군정서의 중진 약 4백 명이 모여 군자금 모집, 장정의 소집 및 훈련, 무기증강 등 전략 강화책을 협의했고 각 부대의 전력증강과 독립전쟁 성공을 위한 사업이 착착 진행됐다. 따라서 두만강 건너 북쪽 국경지대인 연길, 화룡, 왕청, 훈춘 일대에서는 독립군 부대의 활동이 점점 활발해졌고 그 중에도 강 건너 맞은편 봉오동, 걸만동(傑滿洞), 토문자(土門子), 나자구(羅子溝), 백초구(百草溝) 등지에는 독립군 여러 단체가 주둔해 군사 훈련으로 성황을 이뤘다. 두만강 대안지방에서는 독립군의 움직임이 활발함과 함께 국내 진입도 빈번했다.


# 일본 정규군을 봉오동 골짜기로 유인, 섬멸해 독립군 최초의 승전을 거두다


1920년 5월 28일과 6월 4일 두 차례에 걸쳐 무장 독립군이 회령과 강양동에 있던 일제의 경비초소를 습격한 후 기지로 돌아왔다. 강양동 초소를 습격 당한 일군은 곧 남양(南陽)수비대장 신미이랑(新美二郞)에게 명하여 강을 건너 삼둔자를 공격해 복수전을 감행하도록 했다. 이 소식을 들은 사령관 최진동은 1개 소대를 삼둔자 서남방에 미리 잠복시켜 일군을 기습 격멸했다. 참패소식을 접한 나남(羅南)주둔 19사단은 삼둔자에서의 패배를 설욕하고 독립군을 토벌할 목적으로 안천이랑(安川二郞) 소좌의 지휘로 19사단의 보병대대 및 기관총대 1개 대대로 월강추격대대를 편성해 두만강을 건너 중국령까지 진입해 독립군을 공격했다.


홍범도는 진입해 오는 일군이 봉오골(현 봉오동)에 도달하기 전에 마을 주민들을 전부 산중으로 대피시켰다. 독립신문 제88호(1920. 12. 25)는 전투전 피아의 형세를 아래와 같이 보도했다.


제1연대 병력을 봉오동 상촌(上村) 부근 연병장에 집합하고 작전명령을 내렸다. 제1중대장 이천오(李千五)는 부하 중대를 인솔하고 봉오동 상촌 서북단에, 제2중대장 강상모는 동산에, 제3중대장 강시범은 북산에, 제4중대장 조권식은 서산 남단에, 연대장 홍범도는 2개 중대를 인솔하고 서산 중북단에 점위하고 각기 엄밀한 전비(戰備)를 했다가 적이 내도할 때에 그 전위(前衛)를 동구(洞口)에 통과케 한 후 적의 본대가 아군이 잠복한 포위 중에 입할 제에 호령에 의해 사격케 하고 연대 증원장교 이원(李園)은 본부급 잔여중대를 영솔하고 서북산간에 점위해 병원증원(兵員增援)과 탄약보충, 양향급양(糧餉給養)에 임케하고 특히 제2중대 3소대 1분대장 이화일로 그 부하 1분대를 인솔하고 고려령(高麗嶺) 북편 약 1천 2백 미터 되는 고지와 그 동북편 촌락 전단(前端)에 약간 병원(兵員)을 분(分)해 잠복했다가 적이 내도 하거든 전진을 지체케 하다가 봉오동 방면으로 양패퇴각(佯敗退却)케 하고 사령관 최진동, 부관 안무는 동북산서간 최고봉 독립수하(樹下)에 재하여 지휘케 했다.


안무 장군이 이끌던 국민회군의 주둔지 터(중국 연길)봉오동의 독립군 본영을 일거에 격멸하려던 일군의 추격대는 4시간에 걸친 격전 끝에 동남쪽의 비파동을 거쳐 유원진으로 패퇴하고 말았다. 당시 상해 임시정부 군무부에서는 다음과 같이 발표했다.


적군(日軍)의 사자(死者) 157명, 중상자 2백여 명, 경상자 1백 여명이오, 아군(독립군)의 사자(死者) 장교 1인 병원 3인, 중상자 2인이며, 적의 유기물은 다유(多有)하나 아군의 치중예비태마(輜重豫備駄馬)가 무하고 또 전투를 목적한 계획전이 아니오 불우전(不虞戰)이 되므로 차(此)를 획취(獲取)키 위해 력(力)을 비(費)할 여지가 무하므로 보병총 약간 정(挺)만 수취(收取)하다.


# 새로운 항전기지인 청산리로 이동, 일대 격전을 대비하다


독립군의 봉오동 전첩은 독립군과 일군에 큰 충격을 주었다. 먼저 일제 측은 봉오동 전투의 패전을 겪고 독립군의 능력과 전력을 새롭게 평가하기 시작해 그에 대한 철저한 토벌을 계획해 소위 간도지방불령선인초토계획(間島地方不逞鮮人剿討計劃)을 수립하게 됐고 한편 독립군측에서는 10년 이래 대승으로 독립군의 사기를 크게 진작시키고 각 독립군단의 군사통합과 아울러 병력의 보강 및 군비확충에 총력을 기울이게 됐다. 봉오동 전투 이후 독립군의 투지와 전력에 당황한 일제는 수많은 병력을 투입해 독립군에 대한 소위 토벌작전을 감행하게 되는데, 이에 대비해 안무의 국민회 2백 50여 명은 동년 8월 31일 의란구의 근거지를 떠나 안도현 방면으로 이동해 9월 말 경에 이도구 지역에 이르러 진영을 재정비 했다. 또한 김좌진의 북로군정서와 홍범도의 대한독립군 등은 1920년 9월 하순부터 10월 상순까지 새로운 항일기지를 건설하고자 각각 그들 본영을 떠나 화룡현 이도구와 삼도구 서북지방의 밀림지대로 진군했다. 당시 이곳에 집결한 독립군 병력은 2백 50여 명의 국민회군을 비롯해 2천여 명에 달했다. 이렇게 해서 화룡현 일대의 독립군 병력은 일군과의 일전에 앞서 만반의 채비를 끝내고 있었다. 이때에도 역시 독립군은 화력과 병력의 열세 속에서 유인전과 매복전에 의한 섬멸작전을 세워 놓았으며 우리 독립군사에 길이 빛날 청산리대첩은 이렇게 해서 시작됐다.


# 일본 정규군 2만여 명과 10여 차례에 걸친 혈전 끝에 청사에 빛나는 청산리 대첩을 거두다


청산리 대첩은 1920년 10월 21일부터 밤낮 구별 없이 6일간의 치열한 전투로 치뤄졌다. 김좌진의 북로군정서군, 홍범도의 대한독립군, 그리고 안무의 국민회군 등 독립군 연합부대들이 화룡현 이.삼도구 서북쪽과 어랑촌의 심산 장곡지대에서 2만여 명의 병력과 월등한 화력을 갖춘 일본의 토벌군과 10여 회의 혈전을 결행해 대승을 거뒀던 것이다. 이때 안무의 부대는 홍범도 부대와 연합하여 어랑촌 전투와 완루구 전투, 고동천 전투 등에서 일본군을 섬멸하는 승첩을 거두면서 독립전쟁의 뜻 깊은 역사를 남기게 됐다.


이러한 독립군의 값진 승전은 독립군 지도부의 뛰어난 전술과 용병술, 독립군 병사의 임전무퇴 정신과 동포들의 충심 어린 식량지원 및 정보제공 등이 혼연일체 되어 이뤄낸 것이었다.


전투에서 참패한 일본군은 소위 간도지방불령선인초토계획이라는 명칭 아래 일군 제19사단을 중심으로 대병력을 출동할 수 있도록 준비한 다음, 출병의 적당한 구실을 만들기 위해 10월 초에 중국 마적(두목 장강호(長江好))을 매수해 훈춘사변을 일으킨 후 제19연대는 무순(撫順), 흥경(興京), 통화, 환인, 관전 등지로, 제20연대는 공주령(公主嶺), 산원포(山源浦), 영액성(英額城), 개원(開原) 등지로 출병시켜 무고한 한인들을 무차별 학살하는 온갖 만행을 자행했으니 이것이 곧 경신참변(庚申慘變)이다.


# 경신참변 후 독립군을 이끌고 밀산을 거쳐 자유시에 도착, 부대를 재편하다


청산리 대첩 후 독립군 부대들은 장기적인 항전의 기지를 찾아 밀산(密山)으로 향했고 홍범도의 대한독립군과 국민회군 등 연합부대도 밀산으로 향했다. 이렇게 북정해 독립군의 집결지가 된 밀산은 1910년 전후부터 민족운동자들이 국외 독립운동기지의 하나로 경영하기 시작한 곳이지만 많은 독립군을 장기간 수용하기는 곤란한 지역이었다.


그러므로 1910년 전후부터 국외항일기지로 터전을 닦아오고 20만명이 넘는 한인사회를 형성하고 있던 노령 연해주로 월경키로 했다. 당시 러시아는 볼셰비키 혁명 이후 피압박 약소민족의 해방을 후원하겠다고 크게 선전하던 때였다.


안무 장군의 전사를 전하는 기사월경하기 전에 여러 독립군단의 대표들은 회의를 개최해 장기항전(抗戰)할 것을 다짐하고 대한독립군단을 조직했다. 총재에 서일, 부총재에 홍범도.김좌진.조성환, 총사령에 김규식, 참모총장에 이장녕, 여단장에 지청천, 중대장에 김창환.조동식.윤경천.오광선 등을 선임했다.


밀산에 집결했던 지청천.최진동.홍범도.김규식 등과 함께 선생은 노령 이만을 거쳐 1921년 6월에 자유시에 도착했다. 그곳에 도착한 독립군은 새로운 전술전략을 습득했고 당시 러시아 한인군 지휘관의 한 사람인 오하묵(吳夏黙)의 주선으로 그곳 치타정부와 군사협정을 체결해 러시아 측의 독립군에 대한 원조는 순조로운 듯했다. 따라서 한국독립군은 일제의 지원을 받는 러시아 백군과의 계속되는 전투에서 많은 전공을 세우게 됐다. 그러나 이 무렵 북경에서 일본 주중 공사 방택(芳澤)과 러시아 정부 대표 카라한 사이에 캄차카 반도 어업권에 대한 교섭이 진행되고 있었는데 방택은 “러시아 영토 안에서 일본에 방해되는 한국인 무장단체를 육성하는 것은 양국우호관계에 큰 지장이 된다”고 항의하면서 그 해산을 요구하자 러시아에서는 국내외적으로 정치적 기반이 취약한 시기에 일본과 불화를 가져 오는 것이 불리하다고 판단하여 독립군과의 약속을 저버리고 일제의 요구를 받아들이게 됐다.


# 러시아의 적군과 백군의 내전에 휘말려 수많은 독립군이 무참히 희생되다


더군다나 1921년 6월 오하묵의 자유대대와 박일리아(일명 : 朴允文)의 사할린 의용대 간의 이념과 이해의 갈등이 발생하자 러시아 적군은 흑하변 스랍스크촌에 주둔하고 있는 사할린 의용대에 대해 무장해제를 요구하고 장갑차까지 동원해 총격을 감행해 왔다. 러시아 적군의 전면적인 공격 앞에서 수많은 한인 무장대원들은 무참히 희생 당하고 말았다.(자유시 참변)


이때의 피해상황에 대하여 간도지방 한국 독립단에서 발표된 <자유시 사변에 대한 성토문(聲討文)>에 의하면 기원(紀元) 4254년 6월 28일 노령 흑룡주 자유시에서 대한의용군이 노군(露軍)과 싸운 결과 사자 272명, 익사자 31명, 행방불명 250여 명, 포로 917명의 대참변을 당하게 됐다. 대한의용군에 참가한 단체는 사할린 군대, 청룡(靑龍)군대, 이만군대, 광복단, 군정서, 의군부, 도독부, 혈성단 등으로서 자유시 참변에서의 한인무장대의 희생은 실로 엄청난 것임을 알 수 있다.


당시 선생의 군대는 제야강 건너편에 주둔하고 있었다. 그러나 사할린 의용대(상해파)와 자유대대(이르쿠츠크파)간의 알력이 심화되는 상황하에서 선생의 국민회군은 양파간의 소용돌이에 휘말리지 않고 무사히 북간도 지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 자유시 참변 이후 북간도로 이동, 독립군 재기를 위해 노력하던 중 일경과 교전 끝에 순국


북간도로 돌아온 선생은 구춘선 등과 함께 왕청현 나자구 일대에서 독립군 재기를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경신참변 이후 초토화된 북간도 지역에서 와해된 독립군을 재건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던 중 독립운동 진영의 민족 대단결을 꾀하기 위해 상해에서 국민대표회의가 열리자 선생은 국민위원 중 1인으로 선출되기도 했다.


1924년 용정을 중심으로 북간도 일대에서 활동하던 선생은 동년 9월 6일 용정 영사관에 탐지됐다. 선생은 일경의 습격을 받고 모아산 부근에서 교전하던 중 총상을 입고 피체됐다. 중상으로 용정에 있는 자혜(慈惠) 병원에서 치료했으나 다음날(9. 7) 42세를 일기로 장렬하게 순국했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려 1980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사진출처-국가보훈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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