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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 구석 구석 136] 노량진동, ‘노들나루’로 불리운 도선장으로 인해 형성되기 시작한 '도진촌락'
  • 박광준 기자
  • 등록 2022-12-16 09:49:52
  • 수정 2024-04-10 10:2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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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광준 기자] 노량진동은 예부터 수양버들이 울창해 ‘노들나루’라고도 불리운 도선장으로 인해 형성되기 시작한 도진촌락으로, 노량진동 하면 노량진을 연상한다는 것은 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특히 상류의 한강진, 하류의 양하진과 함께 서울로 통하는 한강나루터 중에서도 중요한 길목이다. 


한강나루터는 본래 행인들의 왕래가 많았지만 노량진은 조선초기에 이르러 관에서 이를 관리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개인 소유의 나룻배가 10척이 있어서 도선료를 받고 행인을 건너주었는데, 태종 4년(141) 광진과 함께 이곳의 관리자로서 별감을 처음으로 파견하고 관선 15척을 비치해 진에 소속된 진부들로 하여금 선가를 받지 않고 건네 주게 했다.


노들나루 남쪽 언덕에는 노량원이란 여관이 있어서 도성을 오가는 사람들은 이곳에서 쉬어가기도 했다. 그리고 나루 강변에는 넓은 백사장이 있었다. 바로 새남터로 일찍부터 사형장으로 이용됐다. 이 곳에서 세조 즉위에 반대한 사육신이 처형됐고, 근세에는 천주교도들이 순교했다. 


노들나루는 조선초기에는 주로 민간인들이 왕래했지만 조선후기에는 국왕의 행차가 빈번해 그 도강방법이 모색됐다. 특히 정조는 사도세자의 묘소를 수원에 마련하고 수시로 능행길에 올랐는데, 그 통로에 위치한 것이 노들나루였다. 


화성능행도병풍-한강주교환어도 사진 상단이 용양봉저정(노량행궁)이고, 그 좌측 백성들이 모여 구경하는 곳 산자락이 지금의 용봉정공원이다. 사진 하단 모래사장이 지금의 노들섬으로 추정하는 곳이다. 총 38척의 교배선이 사용되었다. 홍살문 3개와 오색깃발, 단청한 난간 등이 장관인 "한강주교"의 화려함을 보여준다. 말 5필이나 혹은 성인 장정 10여명이 횡으로 늘어 설 만큼 넓은 배다리다./국립고궁박물관그리하여 노들나루에도 한강나루.삼전도에서와 같이 배다리가 놓이게 됐고 정조는 이를 위해 주교사라는 전담 관청을 설치하고 주교사절목을 마련했다. 


정조는 사도세자의 능인 현륭원에 행행키 위해 주교절목을 마련하고 그에 의거해 주교를 설치, 이용했는데 이는 작지 않은 공사로, 그 이후에는 실제 주교의 설치는 거의 없었고 한강의 도강은 전선을 이용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노량진은 동작진과 함께 남쪽으로 나가는 나루터로서뿐만 아니라 부근의 경치도 매우 아름다워 강남안에서 아담한 봉만을 등지고 발 아래로 강물을 내려다 보는 석벽을 따라 보기 드문 강변의 절경을 이뤘다. 


따라서 뜻있는 명사.문인들이 이 강변 승경을 따라 누정을 짓고 강상풍월을 사랑했고 많은 명사들이 이곳 승경을 찾아 산책과 소창을 일삼았다. 


한편, 오늘까지도 널리 애창되고 있는 신민요 ‘노들강변’은 옛날 나루터에서 불리운 민요로, 이 노래만으로도 노들강변의 가지를 늘어뜨린 수양버들과 강의 푸른 물이 얼마나 아름다웠던가를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노량진의 모습도 시대의 변천에 따라 차츰 달라졌다. 수원지가 생기고 인도교가 가설돼 우똑 동작나루를 통해 배로 서울을 출입하던 행인들까지 행인들까지 도보 또는 차편으로 왕래할 수 있게 되면서 강상 풍경도 크게 달라졌다.



# 노량진동의 자연부락 명칭과 자연지명


‘높은절이(高寺里)’는 현재 노량진동과 대방동, 그리고 상도동들과의 경계가 되는 노량진동 산 10번지의 지대가 높은 곳에 청련암이란 절이 있어서 붙여진 이름으로 고려때 노 정승의 사때지라고 하는데, 이에 따라 고사리회가 있기도 하다. 


'장승배기'는 옛날 이정표시를 하던 장승이 섰던 마을로 상도동과의 경계인 노량진 파출소 앞에 있다. 최근에 서울시에서 이곳에 표석을 세워 놓았다. 


원풍산업 뒷편에는 '빨래골'이 있었다. 이는 관악산 줄기에서 흘러내려오는 맑은 물을 이용해서 아낙네들이 빨래를 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꽃말'은 현재 여성개발원 별관(前 부녀직업전도소)이 위치한 서쪽 노량진 1동 50-54번지 일대로, 일제 때 일본인 후까이가 이곳에 꽃밭을 만들어 서울시내 꽃도매상들에게 판매했다고 한다. 특히 이 꽃밭에서는 꽃가지를 잘라 파는 것이 아니라 뿌리채로 판다는 것이 특징이었다고 한다. 



'새말'은 짐금의 노량진 2동 292번지 현 명보한의원 부근의 마을 이름으로, 전일에 신씨네 4-5가구가 살았다고 한다. 


'독막(동이정)'은 노량진 2동 45-46번지 일대로 지금의 동작구청 자리의 마을 이름이다. 옛날 옹기를 굽던 곳으로 가마가 2군데 있었다고 한다. 떡시루.독등을 제작해 노량나루를 이용해서 시내로 반입됐고 지금의 강남일대 주민들과 과천사람들이 많이 이용했다고 한다. 1950년대 말까지 있었으나, 그 이후 자취를 감추었다. 


'송학대'는 현재 삼거리 못미처 장승배기길 좌우편, 노량진 2동 311-315번지 일대의 마을이름으로 전일에는 수백년 묵은 소나무가 많았다. 이 소나무에는 학이 서식해 붙여진 이름이다. 자금도 몇 그루의 소나무가 남아있고 , 일제 때는 일본인 고관들이 이 지역의 경관에 반해 많이 살았고, 한국인의 출입을 철저히 통제했다고 한다. 현재 이 지명을 딴 송학대교회가 부근에 있다. 


'솔모텡이'는 지금의 노량진 2동 301, 302번지 일대의 마을이름으로, 옛날 소나무가 울창해 사람들의 출입이 곤란할 정도였다고 하는데 이곳 모퉁이에 위치했다 해 붙여졌다. 이곳은 지금의 노량진 제2동주민센터와 송학대교회가 위치한 지역으로 옛날 이곳에 큰 엄나무가 있었다고 한다. 


한강의 뗏목'안굴'은 노량진 2동 249번지 일대의 마을이름으로 처음에는 10여가구의 주민이 논과 밭농사를 해 살았다고 한다. 일명 안산이라고도 불렸다. 


노량진동 남쪽지역은 산을 끼고 있으므로 고개가 적지 않다. 고개이름을 보면 먼저 사육신 마루터기의 '아차고개'라는 고개가 있었다. 이 고개는 조선 세조 대 영등포 이남에 살던 어떤 선비가 육신을 처형함이 부당함을 간하기 위해 도성을 향해 말을 달려오다가 이 고개에 이르렀을 대 육신이 이미새남터에서 처형됐다는 소식을 듣고 '아차! 늦었구나!'하고 탄식하던 고개라 해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또 다른 유래로는 조선 명종 때 이름난 복술가인 홍계관의 잘못된 죽음과 관련해 왕이 '아차'하고 매우 슬퍼해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서낭당고개'는 노량진 2동 225번지와 노량진 1동 경계지점의 송학대교회가 위치한 지역의 고개로서 이 부근의 마을이름을 서낭당이라고 했고, 큰 엄나무가 있었다. 


'장승백이' 고개는 노량진 2동과 상도동 경계지점(지금의 상도2동 364-4 우리은행 앞(당시 상업은행)) 노량진파출소 앞에 장승이 서있으므로 불리어진 고개이름이다. 


노량징 정수장 표지석그밖에 '벽돌막'은 노량진 1동 노량진초등학교 자리에 일제 때 일본인이 지은 붉은 벽돌공장이 있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이곳에서 나온 벽돌로 지금의 서울시청사, 국립중앙박물관을 지었다고 한다. 이 공장은 노량진초등학교(당시 노량진국민학교)가 생기면서 철거됐다.


'노량진시장'은 지금의 상도터널 남쪽 입구 일대에 있던 시장으로, 생활용품 등이 주로 거래됐으나 근대화 물결에 밀려 쇠퇴하다가 상도터널이 생기면서 완전히 사라졌다. 


'콜크공장'은 노량잔1동 주민센터가 위치한 곳에 있었다. 이 공장은 일본인이 태평양전쟁을 치르기 위한 군수용 콜크를 제작했다. 공장규모가 1,000평이었고 직공이 500명에 달하는 가장 큰 공장이었으나 광복이 되면서 문을 닫고 최근까지 건물이 방치돼 있었으나 주민센터가 들어서면서 철거됐다. 


'윗서낭당이'는 노량진 1동 산 8번지에 몇백년 된 느티나무가 있어서 주민들이 매년 한 번씩 대동치성을 지낸 곳이었으나, 1970년대 이 고목 느티나무는  자연사해 넘어져서 자취를 감추고 지금 이곳에는 동성노인정이 세워져 있다. 


노량진수산시장한편, 노량진동은 1일 500여 톤의 수산물이 거래되는 노량진수산시장이 위치한 수산물종합유통지역이다. 1934년 경성부를 대행하는 경성수산물배급주식회사로 서울역 앞에서 발족한 수산시장은 1947년 서울수산시장주식회사가 설립됨에 따라 의주로 2가 16번지에 자리잡았다. 그리하여 어느 항구의 부둣가를 연상케 하듯 짙은 생선비릿내를 풍기면 서울 도심 한복판에서 매일 이른 새벽부터 이색적인 풍경이 펼쳐지곤 했었다.  마치 살아서 뛰는 듯한 착각마저 주는 각종 싱싱한 어물들이 대량으로 들어오고 장사진을 이루는 상인과 소비자들의 활기찬 움직임, 흥정을 붙이는 경매꾼들의 손짓 등 모두가 강한 생동감을 느끼게 하는 정경들을 볼 수 있었다. 반세기에 가깝도록 서울 한복판의 명물로 시민 식생활에 기여해 온 수산시장은 설립 당시에는 화물의 운반수단이 주로 철도에 의존했고, 의주로 일대가 역에 가깝던 연유에서 입지했다. 


그러나 화물운반수단이 철도에서 자동차로 바뀌었고 일대가 도시화되어가고 있는데다 또한 많은 시민들이 통행하는 도로 연변에 있어 시장의 외양이 불량하고, 특히 하절기에 수산물의 부패에서 오는 악취는 심한 공해가 됐디. 따라서 이 곳의 시장을 폐쇄하고 한강 건너 노량진역 뒤에 7천여평 시설 5천평 규모의 구 한국냉장주식회사 농수산물도매시장을 인수해 이전했다. 수산시장이 노량진으로 이전한뒤 의주로 일대는 공원으로 조성돼 시민들의 휴식처로 이용되고 있다. 


# 노량진동의 사적들


노량진동의 사적으로는, 예부터 서울 명승지의 하나로 손꼽아 온 노량진 강가 서남쪽 봉우리에 단종조의 충신 박팽년 등 사육신의 묘가 있고, 그 동편 기슭 아래에는 사육신을 제사드리는 민절서원이 있었고, 또 숙종 조의 정직한 대신  박태보와 경종조의 4충신을 제사드리는 노강서원과 사충서원도 멀지 않은 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이러한 것들은 모두 자연의 명소를 더욱 돋보이게 하는 사적들로 이곳을 오가는 사람들로 하여금 충성 애국의 정을 자아내게 하기도 했다. 


사육신묘의 불이문 

그 중에서 세조의 왕위찬탈에 반대하고 어린 단종을 위해 일편단심 신명을 바쳐 후세의 추앙을 받아온 사육신의 묘소는 노량진동 185번지 2호, 그 아래로 한강이 흐르고 강건너 북쪽으로 멀리 서울의 도심가와 북한산 영봉이 한눈에 바라다 보이는 나지막한 동산 위에 자리하고 있디. 


사육신묘는 조선조 제6대 단종의 복위를 위해 목숨을 바친 충신 6인, 곧 성삼문.박팽년.이개.유응부.하위지.류성원을 모신 묘소로, 이들 충신은 1445년 수양대군이 조카 단종의 왕위를 빼앗고 세조가 되자 그 그릇된 세조에 굴하지 않고 대의명분을 세우면서 충성심을 변치 않다가 세조 원년(1456)에 사형을 당했다. 


그 후 200년이 지나 숙종 8년(1682)에 이르러 동작진에 육충신을 위한 육충사가 세워졌고, 숙종 17년(1691) 9월 왕이 처음으로 친히 노량진 한강을 건너서 육신묘에 제를 지냈고 이어 12월 충신들의 관작이 다시 내려졌다. 이때 시호도 내리는 한편, 서원을 묘소 산마루에 옮기고 민절서원이란 편액을 하사했다. 이 민절사원은 지금 남아있지 않고 사육신묘의 뒤쪽에 그 주춧돌만 남아 있다. 그리고 정조 때에는 신도비를 세웠다. 


1995년 서울시에서 서원 구기에 육각의 사육신지묘비를 세웠다. 이 비에는 면마다 육충신의 시조 혹은 시가 소전 손재형의 글씨로 새겨져 있다. 이 비는 1972년 5월 25일 서울특별시유형문화재 제8호로 지정됐다. 


이곳은 1978년 이후 성역화됐다. 묘역에는 흥전문이 있고 그 안에 좌우로 정조 6년(1782)에 세운 신도비가 비각 안에 있고, 1955년 세운 사육신묘비가 있고, 다시 불이문에 들어서면 전면 5칸, 측면 2칸의 사당 의절사가 있다. 



의절사 뒤에는 일곱 개의 봉분이 있다. 1978년 이곳을 성역화 할 때 선산에 있던 하위지묘를 옮기고 류성원의 묘도 새로 꾸미면서 당시의 공조판서와 도진무의 중책을 맡고 단종복위운동을 주도했다는 김문기의 가묘가 이곳에 추가로 꾸며졌다. 지금 의절사 사당에는 6인이 아닌 7인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또한 전일 노량진 동사무소가 있던 노량진동 156년 묘 입구 동산에 는 ‘사충서원’이 있었다. 이 서원은 영조 원년(1725)에 건립된 것으로, 경종 원년(1721)에 신축사화로 희생당한 노론 4대신인 김창집.이건명.조태채.이이명을 배향하던 곳이다.  


이 서원은 고종 8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 때에도 남아있다가 1927년 용산구 보광 28번지로 옮겼으나, 일제 때 철폐됐고 지금은 신축사화의 내력을 새긴 묘정비만 보광에 남아 있다. 


지금의 수산시장 남쪽의 노량진 1동 15번지에 위하고 있는 ‘월파정’은 광복 초기에 수도경찰청장을 지내고 후에 국회의원.국무총리를 역임한 장택상의 별장이었다. 이 별장은 1776년 정조가 노들강 기슭에다 세운 것이라고 전해지며 그 훨씬 전 세종 때의 영의정 김종서 터를 잡고 살았다 한다. 일제 때는 ‘아라이’라는 일본의 재벌이 소유했다. 이 별장은 광복 후 1951년 정부에서 불하해 장택상의 소유가 됐다. 현재 별장은 매각돼 개인 소유가 됐다. 


학원가현재 노량진역 앞에는 대성학원을 비롯해 각종 많은 학원들이 들어서 사설학원가가 형성돼 있고, 조선말 철도의 시발지였던 노량진역은 이제 전철의 주요역으로 자리잡음으로써 이 지역의 교통 소통에 큰 역할을 하고 있다. 


노량진역은 우리나라 철도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의의를 갖고 있다. 여기서 우리나라의 철도가 부설된 내력을 살펴보면, 철도문제가 처음으로 논의되기는 1889년이었다. 당시 주미대리공사였던 이하영이 귀국길에 세밀한 철도모형도를 들고 들어와 정부요로와 시민들에게 철도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그러나 아무런 반응을 얻어내지 못하자 고종황제를 설득, 미국상인 ‘모어스’를 초청, 모든 정부요인들의 반대에 부딪혀 뜻을 이루지 못한 채 귀국했다. 그러나 그 뒤에도 계속해서 일본인들이 번갈아 이 철도부설문제로 왕래가 잦던 끝에 결국 우리 정부가 철도부설권을 모어스에게 특허한 것은 아관파천 때 국가의 주요 이권이 구미열강에 허여되고 있던 1896년 3월 29일있다. 



이렇게 해서 1897년 3월 22일 우리나라 철도의 역사가 시작되는 경인선철도가 착공된다. 그러나 일제의 집요한 매수공작에 의해 2개월 후 모어스는 일본에게 철도부설권을 양도했고 일제는 1899년 4월 23일 증기기관차 4대, 객차 6량, 화차 26량의 보잘 것 없는 시설로 우리나라 철도는 그 막을 올렸다. 


이후 1905년 우리나라 중심부를 관통하는 경부선.경의선, 1914년에는 호남선, 1941년 경경선, 1955년 영암선, 1957년 함백선이 각각 개통됐다. 


우리나라 철도의 시발점이 바로 노량진이다. 그래서 철도시발지 비석 앞면에는 시인 서정주가 짓고 1975년 9월 18일 김종필 국무총리가 휘호해서 “1899년 9월 18일 철도역사의 장이 열리고 경인간 33.2Km의 철도가 뚫린 그날로부터 76주년 철마라 불리우던 증기시대를 거쳐 디젤기관이 철길을 누비더니 이제 전철의 막이 휘날리며 철도가 반석 위에 오른 오늘을 못내 그날의 감격을 함께 되새기며 유서깊은 철도 효시의 요람지 여기 한강마루에 이 기념비를 세워 길이 새 모습의 철도를 기리리라”라고 쓰여져 있다. /다음호에 계속, 사진-박광준 기자,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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