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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전통사찰 69] 사명대사(四溟大師)의 충혼 기리기 위해 국가에서 명명한 '표충사'
  • 박광준 기자
  • 등록 2022-12-01 16:54:39
  • 수정 2024-04-02 04:0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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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광준 기자] 표충사는 임진왜란 때 공을 세운 사명대사(四溟大師)의 충혼을 기리기 위하여 국가에서 명명한 절이다.


1715년(숙종 41)에 중건한 사실이 있으나 1926년에 응진전(應眞殿)을 제외한 모든 건물이 화재로 소실된 것을 재건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주요 문화재 및 건물로는 국보 제75호인 청동함은향완(靑銅含銀香)을 비롯해 보물 제467호의 삼층석탑이 있고 석등(石燈).표충서원(表忠書院).대광전(大光殿) 등의 지방문화재와 25동의 건물 사명대사의 유물 300여 점이 보존돼 있다.



대한불교조계종 제15교구 본사인 통도사(通度寺)의 말사이다. 임진왜란 때 승병(僧兵)을 일으켜 나라에 큰 공을 세운 사명대사(四溟大師)의 충훈(忠勳)을 추모키 위해 세운 표충사당(表忠祠堂)이 있는 절이다. 원래 이곳에는 원효(元曉)가 창건한 죽림사(竹林寺)를 신라 흥덕왕 때 황면(黃面)이 재건해 영정사(靈井寺)로 개칭한 절이 있었다. 표충사라는 이름은 사명대사를 제향하는 사당을 당시 서원(書院)의 격(格)으로 표충서원(表忠書院)이라 편액하고 일반적으로 표충사로 불렀다. 이 사당을 사찰에서 수호(守護)해 왔으므로 사(祠)가 사(寺)로 바꾸어진 것이다.



원래의 표충사(表忠祠)는 밀양시 영축산에 있던 백하암(白霞庵) 자리에 있었고며, 사명대사의 제사를 모시기 위해 나라에서 사원(祠院)을 세우고 봄.가을로 제사를 지냈다. 그 뒤 병자호란이 일어나 승려들이 흩어지고 폐허가 됐던 것을 1714년(숙종 40)에 밀양 군수 김창석(金昌錫)이 사명대사의 충훈을 알고 퇴폐된 것을 민망스럽게 여겨 지방유지와 승려를 불러 사우를 다시 세울 것을 의논했다.


한편으로 관찰사 조태억(趙泰億)에게 보고해 조정에 계(啓)를 올려 나라에서 제수(祭需)를 내릴 것을 청했다. 그리하여 사당을 다시 세워 사명대사와 그의 스승인 서산대사(西山大師), 임진왜란 때 금산(錦山)싸움에서 전사한 기허당(騎虛堂)의 영정을 모셨다. 그리고 한 전각을 사당 왼쪽에 지어 사명대사가 일본에 갈 때 가지고 간 원불(願佛)을 대구 용연사(龍淵寺)에서 가져 와서 봉안하고, 동서쪽에 요사(寮舍)를 지어 수호하는 승려가 살 수 있도록 했다.그 뒤 남붕(南鵬)이 크게 중창키 위해 1738년(영조 14)에 사명대사의 행적(行蹟)을 갖춰 임금에게 올리니, 임금이 교지를 내려 표충사의 잡역(雜役)을 면제하고, 전답(田畓) 5결(結)을 내리고 경상도 관찰사에게 중수토록 명했다. 



또한, 원불전(願佛殿).노전(爐殿).예제문(禮制門).의중당(義重堂).자하문(紫霞門).명인루(明禋樓)를 세웠다. 사당의 좌우에 선원(禪院)과 교당(敎堂)을 세웠는데, 향교와 서원의 동.서 재실(齋室)과 같은 모양으로 했다. 1742년 동쪽 10리 되는 곳에 사명대사의 비석(密陽表忠祠松雲大師影堂碑銘幷序)을 세우고 비각을 건립했다. 이렇게 모든 사우를 정비해 다시 세웠기 때문에 중흥사(重興寺)라 했다. 그러나 향례(享禮)를 지낼 때마다 바람과 비를 만나게 되고, 산세가 옹색하고 길이 험해 살고 있는 자나 제향에 참여하러 다니는 사람 모두 이를 병폐로 생각해 불편함이 많았다. 


이에 남붕이 옮기려고 뜻을 세웠으나 실현치 못하다가, 1838년(헌종 4) 사명대사의 8세손인 천유(天有)가 예조에 보고해 부사 심의복(沈宜復)의 도움으로 1839년에 영정사 자리로 옮기게 됐다. 당시 영정사는 이미 승려가 살지 않는 폐사가 돼 있었다. 여기에 사원의 배치를 옛날 체제대로 해 영정사 관음전 자리에 사우를 신축하고 사명대사 원불을 대웅전 대들보 위에 봉안해 예제문 3칸과 자하문 3칸, 명연루 3칸, 정문(正門)을 짓고 의중당 좌우(左右)를 동.서 재실로 이름을 바꾸었고, 명부전(冥府殿) 자리에 영당(影堂)을 건립하였다.


# 대광전 (大光殿)/시도유형문화재 제131호



대광전은 표충사 경내에 있는 절로 대적광전이라고도 하고, 비로자나불을 모시는 법당이다. 앞면 5칸.옆면 3칸으로 지붕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집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해 만든 공포는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식 건물이다. 기둥 간격은 공포 간격을 배려하여 같게 배치한 것으로 보인다.


# 관음전(觀音殿)/박물관에 관음전창건기문현판 소장



관음전은 천수관음보살도를 모셔놓은 법당으로, 아미타불의 좌보처로서 아미타불의 뜻을 빌어 대자대비(大慈大悲) 를 근본 서원으로 삼아 중생을 보살피고, 극락정토(極樂淨土) 에 왕생하는 이들을 인도하는 보살이다. 관음전은 천개의 손과 천개의 눈을 상징하는 42수 관세음보살을 모셨다. 좌우보처로는 남순동자와 해상용왕이 응립해있고, 후불탱화로는 1930년 조성된 천수천안관음세음보살탱화가 모셔져있다.


# 만일루(萬日樓)/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142호



조선 철종 11년(1860)에 월암선사가 세운 만일루는 H자형의 독특한 구조로 아미타불의 48원을 상징하는 48칸과, 108번뇌를 상징하는 108평으로 돼 안쪽에 아미타불을 모시고 있다. 무량수각 또는 서래각이라고도 불리는데 이곳은 중생을 구제키 위해 사부대중이 만일회를 결성했던 곳이다. 나중에는 참선하는 방인 선방으로 사용했고, 대한불교조계종 초대 종정을 지낸 효봉대종사가 만년을 보낸 곳이다.


# 명부전(冥府殿)/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143호



명부전은 유명계의 심판관인 시왕(十王) 을 모시고 있다고 해 시왕전(十王殿) 또는 지장보살을 중심으로 모시고 있다 하여 지장전이라고도 한다. 시왕은 죽은 자들의 죄를 심판하는 10명의 지옥왕으로, 일반인에게 널리 알려져 있는 염라대왕은 이 가운데 다섯 번째 왕이다. 지장보살은 불교 구원의 이상을 상징하는 보살로서, 모든인간이 구원을 받기까지 자신은 부처가 되는 것을 미루면서 천상에서 지옥에 이르는 육도 (六道)이다. 


# 사천왕문(四天王門)



재약산 사자봉 아래 한계암 계곡에서 내려오는 겨울 바람을 맞으면서 고운 자갈이 깔린 넓은 서원 구역을 벗어나면 동쪽 돌계단 위에 표충사 경내로 들어서는 세 번째 관문 천왕문(天王門)이 있다. 계단 아래쪽에는 여름부터 가을까지 분홍빛 꽃을 피우는 커다란 배롱나무 두 그루가 있다. 천왕문 안 에는 사천왕 탱화가 봉안돼 있다. 천왕문은 사천왕문이라고도 하면서 불법을 수호하는 외호신(外護神:불국 정 토의 외곽을 맡아 지키는 신)인 사천왕(四天王)이 안치된 전각이다. 천왕문은 사찰을 지키고 악귀를 내쫓아 청정도량(淸淨道場)을 만들고 사람들의 마음을 엄숙하게 해 사찰이 신성한 곳이라는 생각을 갖게 하기 위해 세워졌다. 가장 큰 의미는 수행자의 마음 속에 깃든 번뇌와 좌절을 없애 한마음으로 정진할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 삼층석탑 (三層石塔)/보물 제467호



기단 (基壇)은 모서리와 가운데에 기둥 모양을 본떠 새겼고, 각 면을 둘로 나눠 놓았다. 탑신부(塔身部)는 층마다 몸돌과 지붕돌이 각각 한 돌로 돼 있다. 1층 몸돌은 기단에 비해 지나치게 높은 형태로, 균형면에서 특이한 형태를 하고 있다. 표면 모서리에는 매우 넓은 기둥이 새겨져 있고 다른 장식은 없다. 2층 몸돌은 1층에 비하여 높이가 급격히 줄었고 3층도 체감돼 있다. 또한 2.3층의 몸돌 모서리에도 기둥모양이 새겨져 있으나 너비는 전체가 축소됨에 따라 좁아졌다. 지붕돌은 밑에 4단의 받침이 있고 처마는 수평을 이뤘고, 지붕은 아름다운 곡선으로 흘러내리다가 네 귀퉁이에서 경쾌하게 치켜올려져 있다. 꼭대기에는 탑의 머리장식이 얹혀져 있으나 정돈되지는 못하고, 그 위에 1m 가량의 끝이 뾰족한 쇠막대를 세웠다. 탑신부 1층의 몸돌이 지나치게 커다란 단점이 있으나, 기단이 1단으로 구성된 신라석탑양식을 따른 아담한 탑이다. 탑의 머리장식도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어서 주목을 받고 있는 작품이다.


# 설법전(說法殿)



넓은 마당을 가운데 두고 표충사 사당과 마주고 있으며, 가운데 무설전을 중심으로 왼쪽에 중의당, 오른쪽에 대흥불법도량이 걸려있고 설법전이란 현판은 뒤쪽에 위치해 있다.


# 수충루(酬忠樓)



표충사로 들어서는 두번째 해탈의 관문인 수충루(酬忠樓)는 충혼을 상징 하고 표충사당으로 들어서는 문이다. 표충사 편액이 걸려있는 수충루를 지 나면 사명대사 유물관을 비롯한 표충사당 표충서원 설법전 등이 한눈에 들어온다.


# 영각(影閣)



표충사의 고승(高僧)의 초상(肖像)을 모시는 곳이다.


# 응진전(應眞殿)



표충사에서 석가모니(석조석가모니불좌상)를 중심으로 좌 미륵보살좌상과 우 제화갈라보살좌상을 협시로 모시고, 그 주위에 다수나한성과 양끝에 범천(梵天)과 제석천(帝釋天)을 함께 봉안을 해놓은 곳이다. 19세기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면서, 후불탱인 영산회상도는 1942년 조성됐다.


# 칠성전(七星殿)



일반적으로 삼성각에 같이 모셔지는 산신, 독성, 칠성중에서 칠성을 별도의 전각에 모셨다. 칠성각(七星閣)이라고도 하는데 북두칠성을 모신 전각으로 칠성을 부처님들로 화한 경우가 보통이다. 치성광여래(熾星光如來)를 주불로 모신다. 특히 우리 나라에서 가장 성행한 전각이다.


# 팔상전(八相殿)/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141호



팔상전은 부처님의 생애를 여덟 가지 모습으로 나눠어 그린 탱화를 모시고 있는 곳이다. 이곳은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신 뜻을 기리기 위해 지은 건물이다.


# 표충사당(表忠祠堂)



임진왜란 때 승병(僧兵)을 일으켜 나라에 큰 공을 세운 사명대사(四溟大師)의 충훈(忠勳)을 추모키 위해 세운 사당이다. 


# 표충서원(表忠書院)/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52호



임진왜란 때 승병으로서 나라를 구하는데 큰 공을 세운 서산대사.사명대사.기허당 3대사의 충열을 기리기 위해 세운 서원이다. 원래는 사당이었던 것을 조선 헌종 5년(1839) 지금의 위치인 영정사 안으로 옮겨 표충서원이라 이름짓고 절의 이름 또한 표충사로 고쳤다. 고종 8년(1871)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없어졌다가, 1927년 절을 다시 지을 때 표충서원 건물도 함께 복원했다. 그러나 일부 승려들이 절 안에는 서원이 있을 수 없고 부처님과 3대사의 영정이 함께 있는 것은 더욱 안되는 일이라며 반대했다. 결국 1971년에 표충서원을 절의 서쪽에 위치한 팔상전으로 옮기고 서원건물을 팔상전으로 대체했다. 현재의 건물 구성 및 배치는 원래의 서원형태를 찾아볼 수 없고, 일반적인 서원의 구성 및 배치와는 다른 형태를 하고 있다./사진-윤정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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