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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유공자를 찾아서 22] 군대 해산되자 망명지 중국에서 독립운동기지 건설한 '이장녕'
  • 이승준 기자
  • 등록 2022-12-01 01:1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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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준 기자] 이장녕 李章寧, 1881.05.20 ~1932.01.24. 충청남도 천안, 독립장 1963


이장녕 선생은 대한제국 황실친위대에 입대하라는 특명을 거부하고 만주로 건너가 청년들을 군사훈련시키며 독립군의 전투력을 길렀다. 1920년 10월 북로군정서 참모장으로 청산리대첩에 참가해 일본군을 대파하는 혁혁한 공을 세웠다.


# 대한제국 육군부위, 군대 해산되자 망명지 중국에서 독립운동기지 건설


이장녕(李章寧, 1881.5.20 ~ 1932.1.24) 선생은 일명 장영(長榮)이라 했고, 호(號)는 백우(白于)이다. 1881년 5월 20일 충남 천안군 목천면 남화리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결단력이 유달리 강했던 선생은 대한제국의 육군무관학교 3기생으로 졸업해 1903년 육군부위로 승진했다. 선생은 1907년 군대가 강제 해산되자 황실 친위대에 입대하라는 특명을 받았으나 사양하고 가재(家財)를 정리해 가족과 함께 1907년 11월 20일 중국 유하현 삼원보로 망명했다. 그 뒤에 만주로 망명해 온 이상룡(李相龍).김동삼(金東三).이회영(李會榮) 형제 등과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하기 위해 힘썼다.


또 신흥강습소를 창설해 선생은 교관으로서 애국청년들의 군사훈련과 독립정신 고취에 진력했다. 선생은 1919년 국내에서 3.1운동이 일어난 것을 기점으로 서일(徐一)을 중심으로 결성된 군정부(軍政府, 일명 大韓軍政署)의 참모장으로 임명됐다. 그 뒤 선생은 군정부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군사기관으로서 지위를 갖추고,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로 개칭하는데 상당한 노력을 했다.


북로군정서는 무장투쟁을 효율적으로 수행키 위해 총재 서일(徐一), 총사령관 김좌진(金佐鎭), 참모장 이장녕(李章寧) 선생, 사단장 김규식(金奎植), 연대장 정훈(鄭勳), 연성대장 이범석(李範奭) 등으로 군대조직을 편성했다. 편제는 1개 군대가 50명, 2개 소대가 1개 중대로 2개 중대가 1개 대대로 편성됐다.


대한군정서 사관연성소 필업증(1920.09.09).# 북로군정서 참모장으로 체코무기 수입해 전투력 증강. 일본군과 전면전 준비


북로군정서는 북간도지방의 군사 주력부대로서 군인을 모집해 훈련시켰다. 또한 무기를 구입해여 임전태세를 확립하는 한편 곳곳에 경찰사무 기관과 정보연락 기관을 설치했다. 이때 선생은 왕청현에 설립된 사관연성소(士官練成所)의 교관으로 활동하면서, 기간요원의 단기속성 양성에 주력했다. 홍범도의 대한독립군이 봉오동 전투에서 대첩(大捷)을 거두고 있을 무렵 북로군정서는 블라디보스톡에서 체코군으로부터 최신무기를 구입해 전투력을 강화하고 있었다. 1920년 8월 현재 북로군정서의 병력규모는 1,600여 명, 소총 300여 정, 권총 150여 정, 기관총 7문이었다.


이 사실을 탐지한 일본군은 독립군 대토벌작전을 계획하고 중국에 협박을 가하기 시작했다. “중.일 양국은 우호국임에도 불구하고 중국 영토 내에 독립군 대부대가 무장하고 일본에 항전하고 있는 것은 중국당국에서 독립군을 보호하는 결과이므로 일본은 중국을 상대로 무력을 행사할 수밖에 없다”는 내용이 바로 그것이다. 일제의 내정간섭을 불쾌하게 여겼으나 싸울 능력이 없었던 중국은 독립군을 공격하는 척 하면서, 독립군에게 산중(山中) 피신을 권고하기도 했다. 북로군정서군은 좀 더 실력이 증강될 때까지는 일본군과의 전면전(全面戰)을 피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1920년 9월 20일 이범석을 단장으로 이동준비를 서두르던 중 ‘훈춘사건(琿春事件)’이 발생했다.


이장녕 선생 활동 보도 기사‘훈춘사건’은 일본군의 조종을 받은 마적떼 4백여 명이 훈춘성을 공격하면서 일본영사관을 습격하고, 일경 간부 가족 부녀자 9명을 살해한 사건이다. 일제는 이 자작극을 구실삼아 중국 당국의 양해도 받지 않고 연대병력을 전격적으로 출동시켜, 한인 촌락을 모조리 습격해서 방화.살인.약탈을 자행했다. 일본군은 북로군정서군을 전멸시키기 위해 협공작전을 펼쳤다. 북로군정서군이 이를 사전에 간파해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와 합류했고. 백두산지역에 새 독립군기지를 건설키 위해 안도현(安圖縣)으로 이동했다. 그러나 일군의 집요한 작전으로 일전(一戰)을 불사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에 이르렀다.


# 청산리대첩에서 일본군 궤멸시켜. 두 달 후 대한독립군단의 참모총장이 되다


북로군정서군은 1제대장 김좌진 장군과 2제대장 이범석 장군의 지휘로 요충지에 군사를 매복시키는 등 전투준비를 완료했다. 1920년 10월 20일 오전 9시 안천(安川) 소좌가 이끄는 일본군이 지형정찰도 하지 않고, 청산리 계곡의 좁은 길을 따라 이범석 부대의 매복지점에 들어섰다. 이때 독립군은 일본군을 향해 일제사격을 가해 일거에 격멸시켰다. 일본군 본대까지 달려와 치열한 총격전을 벌였으나 유리한 지형을 이용해, 포진하고 있는 독립군에게는 상대가 되지 않았다.


10월 20일부터 25일까지 10여 차례에 걸쳐 치열하게 전개된 이 전투가 독립운동사에 가장 빛나는 ‘청산리대첩’이다. 일본군은 연대장을 포함, 1천 2백여 명이 사살됐으나 독립군은 불과 1백여 명만이 전사했을 뿐이다. 1920년 12월 북로군정서군의 주도아래 대한독립군·대한국민회·대한정의군정사 등 10개 독립군 단체는 밀산(密山)에서 대한독립군단으로 조직되었다. 대한독립군단의 병력은 3천 5백 여명이었고, 선생은 여기서 참모총장에 임명됐다.


# 자유시 참변으로 다시 중국 동북지방에 돌아와 무장항일투쟁을 계속


신민부 조직대한독립군단은 이후 일본군의 예봉을 피하고 전력을 재정비하기 위해 노령(露領)으로 이동했다. 이때 소련과 캄차카반도연안의 어업협상을 벌이던 일제는 소련측에 “소련영토에 한인혁명단체를 육성하는 것은 양국 우호관계상 적절치 못하다”는 항의를 했다. 이와 함께 대한독립군단은 공산주의자들의 파벌 싸움 때문에 무조건적인 무장해제를 통고 받는다. 그러나 이에 응하지 않자, 1921년 6월 28일 소련군은 유리한 지형을 이용해 장갑차와 기관총으로 독립군을 일제히 공격하기 시작했다. 독립군은 이 싸움에서 3백여 명이 전사하고 2백 50여 명이 행방불명이 되는 등 큰 피해를 입었다. ‘자유시참변(自由市慘變)’으로 불리는 이 사건이 일어난 뒤 선생은 중국 동북지방으로 피신했다.


# 1932년 1월 일제의 사주를 받은 토비에게 피살돼 순국


대한독립군단의 재편으로 1924년 3월 대한독립군정서군이 조직되자 선생은 다시 적극 참여했다. 선생은 7월 길림에서 전만통일회의주비회(全滿統一會議籌備會)를 열어 독립단체가 통합되려 할 때 윤각(尹覺)과 함께 참가하여 회의의 주비회장으로 추대됐고, 신민부가 조직됐을 때 참의원에 선임됐다.


1930년 7월에는 홍진이 한국독립당을 조직하자 선생은 감찰위원장에 선임돼 활동했다. 일제의 압제는 1931년 만주사변을 계기로 더욱 가혹해졌고 선생이 있던 중국 동북지역도 예외가 아니었다. 활동의 폭도 날이 갈수록 좁아지고, 평생 조국 광복을 위해 같이 싸웠던 김좌진이 공산당원에게 살해당하자, 선생은 독립운동무대를 상해로 옮기려고 했다. 1932년 1월 24일 선생은 일제의 사주를 받은 중국 마적에게 가족과 함께 피살됨으로써, 조국독립을 보지 못하고 이역에서 생애를 마치게 됐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사진출처-국가보훈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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