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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유공자를 찾아서 20] 남자현 "독립은 정신에 있다"
  • 이승준 기자
  • 등록 2022-11-29 16:17:47
  • 수정 2022-11-29 16:18: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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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준 기자] 남자현 南慈賢, 1872.12.07 ~1933.08.22. 경상북도 영양, 대통령장 1962


“만일 너의 생전에 독립을 보지 못하면 너의 자손에게 똑같은 유언을 하여 내가 남긴 돈을 독립축하금으로 바치도록 하라.”-효부, 열녀, 열사 등 지조와 도덕·예지와 의용이 만인의 귀감이 될만한 여사. 인격 등 모든 분야에서 뛰어나며 일평생을 오로지 조국의 자주독립과 민족의 존영을 위해 싸우다 옥고로 순국한 남자현(南慈賢 1872년 12월 7일 ~ 1933년 8월 22일) 여사의 유언이다.


# 망부(亡夫)의 설원(雪寃) 위해 독립군의 어머니로


1872년 12월 7일 경북 안동군 일직면 일직동에서 영남의 석학인 부친 남정한(南珽漢)의 3남매중 막내딸로 태어나 어릴 때부터 품성이 단정하고 총명했고 7세 때에 국문에 능통했고 부친의 가르침을 받아 소학(小學)과 대학(大學)을 통달했다.


19세에 경북 영양군 석보면 지경동에 사는 의성 김씨(義成 金氏) 김영주(金永周)에게 시집 가 단란한 생활을 꾸렸으나 일제의 만행이 점차 극성을 부리자 남편 김씨는 1896년 여사에게 “나라가 망해 가는데 어찌 집에 홀로 있을 것인가. 지하에서 다시 보자며 결사보국(決死報國)을 결심하고 영양의병장(英陽義兵將) 김도현(金道鉉) 의진에서 왜군과 전투중 전사했다 한다.



남편의 전사소식을 들은 여사는 복수심에 밤잠을 이루지 못했지만 3대 독자 유복자인 아들과 시부모를 봉양하지 않을 수 없어 양잠(養蠶)을 하면서 손수 명주를 짜 내다 팔아 가계를 이어 나갔다.


여사의 나이 46세에 3.1운동이 일어나자 항일 구국하는 길만이 남편의 원수를 갚는 길임을 깨닫고 3월 9일에 아들과 함께 압록강을 건너 중국 요녕성 통화현(通化縣)으로 이주해 서로군정서에 가입, 군사들의 뒷바라지를 하기 시작했다. 한편 북만주 일대에 농촌을 누비면서 12개의 교회를 건립했고 여성계몽에도 힘써 10여 개의 여자교육회를 설립해 여권신장과 자질향상에 주력했다.


# 사이토 마코토 총독을 주살하려 했으나 실패



망명생활 6년을 맞은 1925년에 사이토 마코토(재등실) 총독을 주살키 위해 채찬(蔡燦) 등과 함께 국내에 잠입, 거사를 추진했으나 삼엄한 경계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본거지로 되돌아가야 했다. 마침 인근 의성단장(義成團長) 편강렬(片康烈).양기탁(梁起鐸) 등이 각 독립운동단체의 통합을 추진하고 있음을 알고 독립운동단체들을 찾아 다니며 통합을 독려, 상당한 성과를 거두기도 하였다.


1927년 봄 상해 임시정부요인인 안창호 선생이 길림 조양문(吉林朝陽門) 밖에서 정의부(正義府) 중앙간부와 각 운동단체 간부, 지방유지 5백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나석주(羅錫疇) 의사 추도회 겸 민족장래에 대한 강연회를 성황리에 개최하자 일제는 중국 헌병사령관을 협박해 안창호.김동삼 선생 등 3백 명을 체포하게 하고 주요 간부급 50인을 신병인도토록 했다. 당시 여사는 투옥중인 안창호 선생 등 많은 애국지사들이 석방될 때까지 정성껏 옥바라지를 했고 중국은 우리의 항의에 따라 일본의 요구를 무시하고 체포한 인사들을 보석으로 석방했다.


# 일송 김동삼 선생의 구출작전을 펴다


1931년 9월 일제는 소위 만주사변을 일으켜 요녕성 뿐만 아니라 길림성에까지 침략의 손길을 뻗치자, 여사를 후원하던 일송(一松) 김동삼(金東三) 선생은 길림성을 떠나 하얼빈으로 이동해 그곳에서 정인호(鄭寅浩)의 집에 묵고 있다가 일경에게 붙잡혀 투옥됐다. 아무도 김동삼 선생과 접촉을 하지 못하고 있을 때 여사는 그의 친척으로 위장, 면회를 허가 받고 연락책 역할을 거뜬히 해냈다. 김동삼 선생의 지시내용을 동지들에게 전달하는 동시에 그가 국내에 호송될 때 구출키 위해 치밀한 계획을 세웠으나 동지들의 행동지연으로 인해 실패했다. 여성다움을 잃지 않았던 여사는 항일운동 중 병들고 상처받아 고생하는 애국청년들에게 항상 ‘어머니’와 같은 자애로운 손길로 간호하면서 위로를 아끼지 않았다.


# 국제연맹조사단에 혈서로 한국의 독립 호소



1932년 9월 국제연맹조사단(단장 리턴경)이 침략진상을 파악키 위해 하얼빈에 파견된다는 소식을 접하고 일제의 만행을 조사단에게 직접 호소키 위해 왼손 무명지 2절을 잘라 흰천에다 ‘조선독립원(朝鮮獨立願)/한국독립원(韓國獨立願)’이라는 혈서를 쓴 뒤 잘린 손가락마디와 함께 조사단에 전달했다. 민족의 강인한 독립정신을 인식시키면서 일인(日人)들에게 속지 말도록 호소했던 것이다.


1933년 초 여사는 동지 이춘기(李春基) 등과 소위 만주국 건국일인 3월 1일 행사에 참석할 예정인 주만주국 일본전권대사 무등신의(武藤信義)를 제거키로 하고 2월 29일 거지로 변장, 권총 1정과 탄환, 폭탄 등을 몸에 숨기고 하얼빈에게 장춘(당시 新京)으로 가기 위해 떠났다. 그러나 하얼빈 교외 정양가(正陽街)를 지나던 중, 미행하던 일본영사관 소속 형사에게 붙잡힌다. 일편단심으로 14년간 동분서주하던 여사는 끝내 소원을 이루지 못하고 일본영사관 유치장에 감금됐다.


# “독립은 정신에 있다”라는 유언을 남기고 단식으로 순국


故南慈賢墓 立石式여사는 1933년 8월 마침내 죽기로 결심하고 옥중에서 15일 동안의 단식투쟁을 벌였으나 6개월간의 혹독한 고문과 옥중 생활로 사경에 이르게 됐다. 사태가 이에 이르자 일경은 보석으로 석방, 적십자병원에 입원하였다가 다시 하얼빈에 있는 조모 씨(趙某氏) 여관으로 옮겼으나 임종이 다가오고 있음을 스스로 깨달았다.


여사는 유복자인 독자 영달(英達)에게 중국화폐 248원을 내놓은 뒤 우리나라가 독립이 되면 독립축하금으로 이 돈을 희사하라고 했다(이 유언에 따라 유족들은 1946년 3월 1일 서울운동장에서 거행된 3․1절 기념식전에서 김구.이승만 선생에게 이를 전달했다고 함). “사람이 죽고 사는 것이 먹는 데 있는 것이 아니고 정신에 있다. 독립은 정신으로 이루어지느니라”라는 최후의 유언을 남기고 1933년 8월 22일 향년 60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당시 하얼빈의 사회유지, 부인회, 중국인 지사들은 여사를 ‘독립군의 어머니’라고 존경하고 하얼빈 남강외인(南崗外人)묘지에 안장해 입비식(立碑式)을 갖고 생전의 공로를 되새겼다. 여성으로서 평생을 바쳐 독립운동의 정화(精華)가 돼 찬란한 빛을 남긴 여사의 영전에 동지들은 깊은 애도를 표했다./사진출처-국가보훈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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