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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유공자를 찾아서 19] 일군의 40만 병력과 최후결전...장렬히 전사한 '윤세주'
  • 이승준 기자
  • 등록 2022-11-27 16:17:44
  • 수정 2022-11-28 06:2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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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준 기자] 윤세주 尹世胄, 1901.06.24 ~1942.06.03. 경상남도 밀양, 독립장 1982


선생은 조선의열단 창설에 참가하고, 무장항일투쟁에 나섰으며, 조선의용대 지대를 이끌고 태행산 근거지에 도착, 1942년 5월 일군 40만 명과 결전하다 숨졌다.


# 동화중학교 교장에 감화 받아 연무단을 조직하다


윤세주(尹世冑, 1901. 6. 24 ~ 1942. 6. 3) 선생은 1901년 6월 24일 경남 밀양군 부북면 감천리에서 부친 윤희규(尹熺奎) 선생과 모친 김경이(金卿伊) 여사 사이에서 태어났다. 겸손했으나 일본 식민지 통치에 대해서는 온 생애를 통해 저주할 만큼 애국심이 깊었다. 열사는 경술국치소식을 듣고 대성통곡하기도 하고 국민학교 때 일왕(日王) 출생 기념일에 받은 일장기를 화장실에 버릴 만큼 일본을 증오했다. 


선생은 경남 밀양의 사립 동화(同和) 중학에 입학하면서 항일 인사였던 김홍표(金鴻杓) 교장의 영향으로 항일정신을 키워갔다. 선생은 김교장의 애국사상에 감화돼 학교 내 비밀결사인 연무단(練武團)을 조직했다. 연무단은 당시 금지됐던 개천절 기념행사를 갖고 시위를 벌였다. 이 사건으로 동화중학은 폐쇄됐다. 그러나 선생의 가슴에 반일·배일 사상은 영원히 남게 됐다.


# 서울 만세운동(萬歲運動) 참가 후 고향으로 내려가 독립선언서 낭독


1919년 3월 1일 서울에서 만세운동에 참가한 그는 만세운동을 확산시키기 위해 고향에 내려가 동지들을 규합했다. 13일 하오 1시경 수천 명이 모인 고향 장터에서 선생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자 동지들은 일제히 독립만세를 외쳤다. 그를 그냥 둘 리 없는 일제는 그를 당장 잡아들이라는 명령을 내렸다. 일본 경찰의 수배를 피해 그는 중국 동삼성으로 망명길에 올랐다. 일본은 그 해 4월 14일 부산지방법원 밀양지청에서 궐석재판으로 선생에게 징역 1년 6월을 선고했다. 선생은 만주로 망명해 요녕성 유하현에 있는 신흥무관학교에 들어갔다.



신흥무관학교는 당시 국내의 독립운동 비밀단체인 신민회의 결의에 따라 이회영(李會榮) 형제가 세운 독립군양성 무관학교로 선생은 이곳에서 정식으로 군사훈련을 받았다.


# 중국 길림에서 김원봉 등과 의열단(義烈團)을 창립하다


선생은 11월 9일 죽마고우 김원봉(金元鳳) 등 13명과 함께 조선의열단을 결성했다. 구체적인 항일방법을 모색키 위해서였다. 조선의열단에서는 조선총독부 등 일제 침략기관의 파괴와 원흉들을 처단키 위한 계획을 세우고 폭탄 투척자를 물색하게 됐다. 19세의 선생은 신철휴(申喆休).윤치형(尹致衡) 등과 함께 국내에 들어왔다. 그 후 선생의 일행은 계획의 실천을 위해 공작하던 중 정보가 누설돼 국내 동지 50여 명과 함께 체포됐다. 


5년 4개월의 감옥생활을 하고 1927년 출옥한 그는 중외일보 기자.경남주식회사 사장으로 위장해, 독립운동에서 손을 뗀 양 조용히 지내다가 1932년 여름 다시 중국 남경으로 망명했다. 독립운동에 대한 방법도 세련돼 갔다. 선생은 과거에는 열정과 용기만을 갖고 싸웠으나 앞으로는 혁명적 인생관과 과학적 혁명 이론으로 재무장해여 정확한 혁명운동을 하겠다고 다짐했다.


판결문# 중국 군사위원회 간부 훈련단에 입대하다


1932년 10월 20일 중국 군사위원회 간부 훈련단 제6대(약칭 조선민족혁명간부학교)에 입교, 1933년 4월 21일 제1기로 졸업했다. 이때는 독립운동 전선의 행동통일이 이뤄어지지 않은 때였다. 독립운동단체들은 연합준비위원회를 구성한 뒤 해외독립운동단체들을 참가시켜 그 해 11월 10일 한국대일전선 통일연맹(韓國對日戰線 統一聯盟)을 결성했다.


# 한국대일전선 통일연맹의 중앙집행 상무위원으로 선출


선생은 이 단체에서 송병조(宋秉祚).김두봉(金枓奉).김규식(金奎植).윤기섭(尹琦燮).최동오(崔東旿) 등과 함께 중앙집행위원회 상무위원으로 선출됐다. 이 단체는 1933년 7월 5일 독립운동가들이 소망하던 단일정당인 민족혁명당을 탄생시키는 모체가 됐고 선생은 이 단체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선생은 또 민족혁명당이 일군(日軍)에 무력으로 대항하기 위해 중국과 제휴하여 만든 조선의용대에서도 핵심부서인 편찬위원회 주편(主編)이 돼 선전공작활동을 벌였다.



그러나 독립운동의 효과는 호전되지 않고 일군에 유리하게 전개돼 갔다. 독립운동을 적극 협력해 주던 중국 국민당 정부도 1938년 10월 25일 무한(武漢)이 일군에 함락되면서부터는 중공군과의 내전에만 심혈을 쏟았다.


# 일군의 40만 병력과 최후결전으로 장렬히 전사하다


선생은 직접 조선의용대를 이끌고 중일전투에 참가했다. 1941년 4월에 선생은 수많은 고난을 극복하고 황하를 건너 화북을 향해 북상해 갔다. 마침내 태행산 항일 근거지에 도착, 조선의용대를 조선의용군으로 개칭하고 중공 8로군과 함께 항일 무장활동에 열중했다. 선생은 모든 대원들로부터 가장 신뢰받는 지휘자로 존경을 받았다. 


1942년 2월 일본군은 4만 명의 군대를 동원해 태행산을 공격하기 시작하다가 5월에는 20개 사단 40만 명의 병력으로 대대적인 공격을 해왔다. 이때 조선의용군의 규모는 불과 3000 ~ 4000명 수준이었다. 일본군은 20개 사단 40만 명으로 태행산을 완전 포위한 후 전투기와 전차까지 동원, 본격적인 군사작전을 폈다.


태행산의 윤세주 묘와 기념비 사진5월 29일 항일 연합군사령부에서는 조선의용대에게 탈출로를 확보하고 전군이 탈출토록 지원하라고 명령했다. 일군이 점령하고 있는 양쪽 산봉우리 사이의 탈출로를 확보키기 위해 두 산봉우리를 조선의용군이 공격, 정부대원이 탈출할 때까지 사수하기로 했다. 작전개시 5시간 만에 탈출로를 확보했다. 선생은 이 전투에서 적탄을 맞고 쓰러졌다. 3일 뒤 동지들이 중상을 입고 쓰러져 있는 선생을 발견했으나 이미 중태였다. 6월 3일 선생은 석굴에서 숨을 거뒀다.


“단결해서 적을 사살하기 바란다.”


선생이 동지들에게 남긴 유언이었다. 선생의 나이 41세였다. 선생이 전사한 뒤 1주년이 된 1943년 6월 중경에서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조선민족혁명당, 조선의용군 등이 합동으로 선생의 추도회를 가졌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려 198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사진출처-국가보훈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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