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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 구석 구석 125] 목숨은 가볍게 의리는 중하게 여긴 '하위지(河緯地)'
  • 박광준 기자
  • 등록 2022-11-27 00:08:31
  • 수정 2024-04-10 10:1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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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광준 기자] 하위지는 조선전기 집현전부제학, 예조참판, 세자우부빈객 등을 역임한 문신이다.


단종을 위해 사절(死節)한 사육신 중 한 명으로,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천장(天章)·중장(仲章), 호는 단계(丹溪).적촌(赤村). 선산 출신. 하윤(河胤)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문하평리(門下評理)하지백(河之伯)이고, 아버지는 군수 하담(河澹)이고, 어머니는 유면(兪勉)의 딸이다.


어릴 때부터 남들이 얼굴을 모를 정도로 형 강지(綱地)와 함께 학문에 정진햇다. 1435년(세종 17) 생원시에 합격하고, 1438년 식년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한 뒤, 집현전부수찬에 임명됐다. 


다음 해 병으로 사직하자 세종이 약을 내려 고향에 가서 치료하게 하고, 또 경상감사에게도 그를 구료토록 전지(傳旨)를 내렸다. 1444년 집현전부교리가 돼 '오례의주(五禮儀註)'의 상정(詳定)에 참여했다. 


1446년 동복현감으로 있던 형 강지가 무함을 당해 전라감옥에 갇혀 병이 깊자 관직을 사임하고 전라도로 내려가서 형을 간호했다. 1448년 집현전교리로 복직된 뒤 이듬 해 춘추관의 사관(史官)으로 '고려사'의 개찬에 참여했다.


1450년(문종 즉위년) 세종 때부터 왕을 보좌해 훌륭한 치적을 쌓은 관계로 장령에 임명됐다. 그는 품성이 강직해 대사간의 직분으로 권세에 굴하지 않고 직언을 서슴지 않았다. 한때, 대신들의 실정을 적극적으로 공격하다가 왕과 대신들로부터 반격을 받았으나 승지 정이한(鄭而漢)과 정창손(鄭昌孫) 등의 비호로 무사하기도 했다. 문종이 승하하자 벼슬을 그만두고 낙향했다. 


영월 창절사(彰節祠)그 뒤 1453년(단종 1) 장령에서 집의로 승진했다. 그 해 '역대병요(歷代兵要)'와 병서(兵書)의 편찬에 참여했던 집현전학사의 품계를 수양대군(首陽大君)이 앞장서서 올리려 했으나, 그는 서적의 편찬 사업은 집현전 본래의 업무이므로 품계를 올려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음을 들어 자신의 품계를 올리는 것에 반대했다. 


또한, 이 일을 수양대군이 나서서 처리하는 데 대해서도 반대했다. 즉, 관직을 내리고 상을 주는 것은 국가의 공기(公器)이므로 경솔히 시행할 수가 없고, 그리고 종신(宗臣)의 신분으로 사은(私恩)을 베풀려는 수양대군의 처사는 매우 부당하다는 것이다. 


선산 월암서원(月巖書院) 그 결과 그는 자신의 직책이 의리상 불가하다고 청해 집현전직제학에 전보됐다. 그러자 사직을 한 뒤 신병을 치료하기 위해 경상도 영산(靈山)의 온정(溫井)으로 내려갔다. 1454년 집현전부제학으로 복직되자 대궐 옆에 있는 불당(佛堂)이 왕실에 이롭지 못함을 들어 이를 훼철할 것을 주장했다. 


같은 해 '세종실록'을 편찬하는 데 편수관으로 참여했고, 경연에서 시강관(侍講官)으로 왕에게 경사를 강론했다. 이듬 해 집현전부제학에서 예조참의로 전임됐고, 수양대군이 김종서를 죽이고 영의정이 되자 조복을 던져버리고 선산에 퇴거했다. 수양대군이 왕위에 올라 그를 간곡히 불러 예조참판에 승진됐고, 곧 이어 세자우부빈객(世子右副賓客)을 겸하게 됐다. 세조의 즉위 후 그에게 교서를 내리는 등 잇단 부름을 받아 예조참판에 임명됐 던 것이다.그러나 그의 본뜻은 진실로 단종을 위하는 일에 있었다. 세조의 녹(祿)을 먹는 것을 부끄럽게 여겨 세조가 즉위한 해부터의 봉록은 따로 한 방에 쌓아두고 먹지 않았다. 그리고 세조의 강권정치에 맞서다가 추국의 명을 받기도 하였다.세조는 즉위 후 왕권강화책의 하나로 종전부터 시행하던 의정부 본래의 권한인 서사제(署事制)를 폐지시키고 육조직계제(六曹直啓制)를 시행해 의정부의 권한을 축소시켰다. 


단계 하위지 유허비(경북 유형 문화재 제236호)이러한 세조의 조처에 대해 고대 주나라 제도를 들어 의정부서사제의 부활을 강력히 주장했다. 1456년(세조 2) 사예(司藝) 김질(金礩)의 고변으로 단종복위운동이 탄로나 국문(鞫問)을 받게 됐다. 


세조는 죄인들을 국문하는 자리에 나타나 사적으로 친한 하위지에게 말했다.


“잘못했다고만 하라. 죄의 무겁고 가벼움은 내게 달려 있다.”


그러나 하위지는 끝내 잘못을 인정하지 않았다.


하위지는 국문을 받으면서 세조에게 말하기를 “이미 나에게 반역의 죄명을 씌웠으니 마땅히 주살하면 될 텐데, 다시 무엇을 묻겠단 말이오”라고 했다. 세조는 하위지에게 자신의 편으로 올 것을 요청하였지만 하위지는 거절했다. 세조는 국문 과정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작형(灼刑`불에 달군 쇠로 맨살을 지지는 형벌)을 가했으나 하위지의 재능과 기백을 아껴 그에게는 성삼문(成三問) 등이 당한 작형(灼刑)은 당하지 않았으나, 사육신 등 여러 절신과 함께 거열형(車裂刑)을 당했다. 


사육신/하위지 묘그가 처형되자 선산에 있던 두 아들 하호(河琥)와 하박(河珀)도 연좌(連坐)돼 사형을 받았다. 아직 어린 나이인 작은아들 하박도 죽음 앞에서 조금도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그는 금부도사에게 어머니와 결별하기를 청해 이를 허락하자 어머니에게 “죽는 것은 두렵지 않습니다. 아버님이 이미 살해되셨으니 제가 홀로 살 수는 없습니다. 다만 시집 갈 누이동생은 비록 천비(賤婢)가 되더라도 어머님은 부인의 의를 지켜 한 남편만을 섬겨야 될 줄로 압니다.”고 하직한 뒤 죽음을 받자 세상 사람들은 “그 아버지의 그 아들이라!”고 하면서 감탄했다. 뒤에 남효온(南孝溫)은 '추강집(秋江集)'의 '육신전 六臣傳'에서 하위지의 인품에 대해 다음과 같이 논평했다. 


“그는 사람됨이 침착하고 조용했으며, 말이 적어 하는 말은 버릴 것이 없었다. 그리고 공손하고 예절이 밝아 대궐을 지날 때는 반드시 말에서 내렸고, 비가 와서 길바닥에 비록 물이 고였더라도 그 질펀한 길을 피하기 위해 금지된 길로 다니지 않았다. 또한, 세종이 양성한 인재가 문종 때에 이르러 한창 성했는데, 그 당시의 인물을 논할 때는 그를 높여 우두머리로 삼게 된다.”고 평했다. 뒤에 이조판서에 추증됐다. 묘는 선산부 서쪽 고방산(古方山)에 있다. 노량진의 민절서원(愍節書院), 영월의 창절사(彰節祠), 선산의 월암서원(月巖書院) 등에 제향됐다. 시호는 충렬(忠烈)이다./사진-박광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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