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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전통사찰 55] 세 신하의 충절이 서려있는 삼인대가 있는 순창 ‘강천사’
  • 박광준 기자
  • 등록 2022-11-14 12:42:22
  • 수정 2024-02-18 20:3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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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광준 기자] 대한불교조계종 제24교구 본사인 선운사의 말사(末寺)로, 887년(진성여왕 1) 도선국사가 창건했다. 혹은 1482년(성종 13)에 작성된 ‘강천사모연문’에 의하면 신령(信靈)이 광덕산(廣德山) 가운데서 명승지를 골라 초암을 짓고 지낸 것에서부터 유래한다고 나와 있다.


고려시대인 1316년(충숙왕 3) 덕현이 오층석탑과 12개 암자를 창건해 사세(寺勢)를 확장했고, 조선시대 1482년(성종 13)에는 신말주(申末舟)의 부인 설(薛)씨의 시주를 얻어 중창했다.



1760년(영조 36)에 편찬된 ‘옥천군지’에는 명적암(明寂庵), 용대암(龍臺庵), 연대암(連臺庵), 왕주암(王住庵), 적지암(積智庵) 등 5개의 부속 암자가 남아 있다고 적혀 있다. 그 중 왕주암은 후삼국의 분쟁이 한창이던 때에 왕건이 이 암자에서 유숙했던 것에서 유래한 이름이라고 한다.



그뒤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1604년 태능(太能)이 중창했다. 다시 1855년(철종 6) 금용당이 재건했으나 6.25전쟁으로 보광전(普光殿).첨성각(瞻星閣).칠성각의 당우들이 불타버렸다. 6.25전쟁으로 칠성각, 첨성각, 보광전의 당우가 불탔다. 그뒤 주지 김장엽이 1959년에 첨성각, 1977년에 관음전을 신축한 뒤 비구니의 도량으로 전승되고 있다.



역사적으로 이 절에는 비구승보다 비구니들이 많이 머물렀는데, 그 까닭은 창건자 도선이 “머리카락과 수염이 없는 사람이 있어야 빈찰(貧刹)이 부찰(富刹)로 바뀌고 도량이 정화된다.”고 한 예언에 따라 절을 유지해 왔기 때문이다.



현존하는 문화재로는 대웅전 앞에 있는 1979년 전라북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된 강천사 오층석탑과 금강문(金剛門), 1973년 전라북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된 순창 삼인대 등이 있고, 오층석탑은 1316년(충숙왕 3)덕현이 중창할 때 건립한 탑이다. 이 탑 북쪽 약 1m 지점에는 중대석(中臺石)과 보주(寶珠)만이 남아 있는 석등이다.



금강문은 1316년덕현이 절 주위의 풍치가 금강산과 비슷하다 하여 붙인 이름이라 전한다. 자연암석으로 된 사각문으로 높이 8m, 너비 4m이다.


자연암석으로 된 사각문인 금강문은 1316년 덕현이 절 주위의 경치가 금강산과 비슷하다 해 붙인 이름이라고 한다. 삼인대는 세 사람의 관인을 소나무에 걸었던 곳이라 해 붙은 이름이고, 또한 이 절에는 천년을 살아 온 지네가 인간으로 변신하려다가 법당에서 피우는 향내음이 너무 독해서 인간이 되지 못했기 때문에, 그 앙갚음으로 요괴가 돼 매일 밤 승려 한 사람씩을 죽였다는 전설과 거지·승려 그리고 돈에 얽힌 전설 등이 전해지고 있다.


# 삼인대 



조선 연산군 12년(1506) 훈구세력인 성희안과 박원종이 임사홍, 신수근 등과 결합해 포악한 정치를 거듭하던 연산군을 왕위에서 몰아내고 진성대군을 왕으로 추대하는 중종반정이 일어났다. 중종반정이 성공하자 공신들은 중종의 부인인 신씨를 역적의 딸이라 해 왕비 자리에서 물러나게 하고 장경왕후 윤씨를 왕비로 맞았다.



이러한 소식이 전해지자 당시 군수인 김정과 담양부사 박상, 문안현감 유옥 등이 결의해 왕비의 자리에서 쫓겨난 단경왕후 신씨를 다시 왕비로 모시자는 상소를 올렸다. 이들은 관직에서 쫓겨날 것과 죽음을 각오하고 관직을 표시하는 도장(職印:직인)을 소나무가지에 걸었다. 그 후 이곳에 비각을 세워 삼인대라 했다.


# 강천사오층석탑


강천사오층석탑(剛泉寺五層石塔)은 원래 1316년(충숙왕 3)에 덕현 선사(德玄禪師)가 강천사를 중창할 때 세운 것이었다. 1950년 6.25 전쟁 때 강천사의 전체 건물이 소실되는 화를 입었는데 그때 강천사오층석탑도 화를 입어 무너진 적이 있었다. 그 후 1959년 당시의 강천사 주지 영일(映日) 김장엽(金裝燁)이 다시 보수해 건립했다. 


강천사오층석탑은 높이가 235㎝이고 넓이가 78㎝의 화강 석재 5층 6각으로 돼 있다. 현재 2.3.4층의 옥개석(屋蓋石)이 6.25 전쟁 당시 총탄에 의해 일부가 파손됐다. 1층 기단 위에 5층의 탑신을 올린 모습으로, 화강암으로 정교하게 다듬었다. 초층 탑신에는 우주(隅柱)가 모각됐고 그 위에는 왼쪽 부분이 심하게 파손된 옥개석이 올려져 있다. 옥개석은 밑면에 3단의 층급 받침을 갖추고 있는데, 처마는 수평을 이루다 양끝에서 서서히 올라갔다. 



2층과 3층 탑신도 우주가 모각됐지만 초층 탑신에 비해 급격히 축약된 모습이다. 층급 받침 역시 삼단으로 구성됐지만 1층의 그것보다 더 높다. 옥개석 상부에는 1단의 탑신 받침이 조출(彫出)돼 있다. 


4층 탑신석은 3층 탑신석에 비해 높고 우주가 모각되지 않았다. 또한 왼쪽 부분이 다듬어지지 않은 점에서 후에 보충된 것으로 보인다. 상륜부는 현재 노반이 결실된 채 복발(覆鉢)과 보륜(寶輪)이 1매의 돌로 구성됐다. 주변에는 파손된 석등의 중대석과 보주가 일부 남아 있고 당간 지주 4기와 가공된 석재들이 흩어져 있다. 


강천사오층석탑 주변에 철책을 세워 보호 관리하고 있다. 1979년 12월 27일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92호로 지정됐고,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돼  전라북도 유형문화재로 재지정됐다. 


#금강문


강천산 계곡을 따라 걷다가 금강교를 지나 100m 거리에 이르면 왼쪽 상봉에 투구봉과 금강문, 범바위가 보인다. 3개의 큰 바위가 탑을 이루고 있다 해 탑상골이라고 부른다. 



투구봉은 장군봉이라고도 하고, 범바위는 호랑이가 하늘을 향해 울부짖는 형상이라 해 호두암이라고도 부른다. 금강문은 신의 조화가 아니면 뚫을 수 없고 절대로 부서지지 않는 문이라 하여 금강문이라 했다. 금강문은 통천문으로 부르기도 하는데, 통천문은 사람의 마음이 하늘로 통할 수 있는 관문이고, 그 금강문을 통해서 하늘을 바라보면 잡스런 생각이 없어진다고 믿어왔다. 


강천산 군립 공원 관리소장을 맡았던 장영환의 말에 의하면, 금강문 아래 계곡을 금강 계곡이라 불러왔고, 금강문은 강천사 사찰의 금강문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한다. 강천사 경내에 금강문을 조성하지 않은 것도 강천사 입구에 자연 암석으로 조성된 금강문이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금강 계곡을 따라 100여m를 거슬러 올라가면 산길 좌우에 관음암과 사천왕상 형상의 바위가 있는데, 그곳을 사천왕문으로 불러왔다. 아래쪽에 금강문이 있고 그 위쪽에 사천왕문이 있어 굳이 강천사에 금강문과 사천왕문을 세울 필요가 없었다고 한다. 실제 강천사 경내에는 관음암을 향한 망배단의 기도처가 있다. 


# 모과나무



모과나무는 본래 중국이 원산지이고 우리나라 전역에서 과수 또는 관상용으로 오래 전부터 심어온 나무이다. 꽃은 5월에 연한 홍색으로 피며 열매는 원형 또는 타원형으로 9월에 황색으로 익는데, 향기와 맛이 그윽하다.


강천사 모과나무의 나이는 300년 정도로 추정되고, 높이는 20m, 둘레는 3.1m이다. 이 모과나무는 강천사를 찾는 사람들에게 아름다운 꽃과 열매의 그윽한 향기, 기분 좋은 볼거리를 제공하고 있다.


강천사 모과나무는 오래되고 큰 나무로 주변의 환경과 함께 조화로운 경관의 일부를 구성하고 있고, 생물학적 보존 가치가 높아 기념물로 지정.보호하고 있다./사진-윤정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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