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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전통사찰 52] 참나를 찾아가는 소중한 경험이 기다리는 '부산 '범어사(1)
  • 박광준 기자
  • 등록 2022-11-11 06:36:24
  • 수정 2024-02-18 20:3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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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선찰대본산 금정총림 범어사...의상대사 창건.영남의 3대사찰

[박광준 기자] 범어사는 부산광역시 금정구 범어사로(구 청룡동) 금정산 동쪽 기슭에 위치한 사찰로 대한불교 조계종 제14교구 본사이다. 합천 해인사, 양산 통도사와 함께 영남의 3대 사찰로 불리운다. 2012년 11월 사부대중의 수행정진과 화합을 바탕으로 지유대종사를 초대 방장으로 모시고 총림으로 지정됐다.


신라 문무왕 18년(678년), 의상대사가 해동의 화엄십찰(華嚴十刹) 중 하나로 창건했다. 전국 사찰중에서 유일하게 국보 '삼국유사(三國遺事)'를 소장하고 있고, 가장 오래된 판본 중 하나로 권4의 5편에 들어 있는 '의상전교(義湘傳敎)'에는 의상대사가 열 곳의 절에 교를 전하게 해 화엄십찰을 창건하는 내용이 나오고, 이 가운데 '금정지범어(金井之梵魚)' 즉 금정산 범어사가 들어있음이 언급돼 있다. 또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금빛 나는 물고기가 하늘에서 내려와 우물에서 놀았다고 해서 산 이름이 금정산(金井山)이고 그곳에 사찰을 지어 범어사(梵魚寺)를 건립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범어사 전경, 부산 범어사부산광역시 금정구 청룡동 소재. 화엄종(華嚴宗) 10찰(刹)의 하나/사진출처-금정구청화엄경의 이상향인 맑고 청정하여 서로 돕고 이해하고 행복이 충만한 아름다운 삶을 지상에 실현키 위해 설립된 사찰로 범어사는 역사적으로 많은 고승대덕을 길러내고 선승을 배출한 수행사찰로 오랜 전통과 많은 문화재가 있는 곳이다. 의상대사를 비롯해 원효대사.표훈대덕.낭백선사.명학스님과 그 대에 경허선사.용성선사.성월선사.만해 한용운선사.동산선사 등 고승들이 수행 정진해 명실상부한 한국의 명찰로서 그 역사적 의미를 지닌다.


1950년대 동산스님이 불교정화운동을 주도했고, 이후 한국근대불교를 이끌었고, 총림지정 이후 조사스님들의 뜻을 받들어 수행공간을 지속적으로 확충했다. 특히 2019년 범어사의 오랜 숙원사업인 선문화교육관과 2021년 전국사찰 최대 규모의 범어사 성보박물관의 대작불사를 완료하고 크고 작은 불사들을 진행 중이다.


부산 범어사 전경, 일제강점기에 촬영한 부산 금정산에 위치한 범어사의 모습/사진출처-국립중앙박물관방장 지유스님은 출가이후 눕지 않고 좌선하는 ‘장좌불와(長坐不臥)’와 하루한끼 점심공양만 하며면서 수행하는 ‘일종식’ 등 수행자로서 모범을 보였고, 깨달음의 지혜를 구하고 아래로는 중생을 구한다는 ‘상구보리 하화중생(上求菩提 下化衆生)’을 강조했다. 이로써 부산과 영남지역은 물론 우리나라 불교의 중심 ‘선찰대본산 금정총림’으로 자리매김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선찰대본산(禪刹大本山)은 마음의 근원을 구하는 수행도량이라는 뜻으로 참선을 통해서 마음속에 일어나는 갖가지 잡념과 망상을 쉬게 하고, 자신의 내면세계의 참다운 불성을 깨닫도록 하는데 그 의미가 있다. 


부산 범어사 비로전 정측면, 부산 금정산에 위치한 범어사 건물 중 비로전의 정측면 모습. 일제강점기 촬영/사진출처-국립중앙박물관범어사의 창건유래에 대해 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동래현 북쪽 20리에 있는 금정산 산마루에는 금빛을 띤 우물이 항상 가득차 있고 가뭄에도 마르지 않는다고 한다. 


그 속에 금빛 나는 물고기가 오색 구름을 타고 하늘에서 내려와 놀았다고 하여 '금샘'이라고 하였다. 하늘에서 내려온 금빛고기와 황금우물 그리고 산 이름을 따서 금정산 범어사라고 절 이름을 지었다.고 기록돼 있다. 


부산 범어사 관음전 정측면, 부산 금정산에 위치한 범어사 건물 중 관음전의 정측면 모습.일제강점기 촬영/사진출처-국립중앙박물관범어사는 창건 이후 고려와 조선 중엽에 이르기까지 그 면모를 유지해 오다가, 조선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의 병화을 만나 모두 소실돼 10여년 동안 거의 폐허나 다름이 없었다. 선조 35년(1602년)에 관(觀) 선사가 중건했으나 얼마있지 않아 또 다시 화재로 소실되고 말았다. 그 후 광해군 5년(1613)에 묘전(妙全) 스님 등이 대웅전, 용화전, 관음전, 나한전, 일주문, 심검당(현 원주실)을 건립했다. 


또한 1684년에는 해민(海敏) 화상이 비로전을, 1700년에는 명학 화상이 팔상전, 종루, 불이문, 보제루, 천왕문을 건립했다. 이후에도 사세의 확장에 따라 크고 작은 개수 및 중수를 거듭해 오늘에 이르렀다.


부산 범어사 보제루 정측면, 부산 금정산에 위치한 범어사 건물 중 보제루의 정측면 모습. 일제강점기 촬영/사진출처-국립중앙박물관근세의 고승인 경허 스님은 1900년에 범어사에 선원을 개설했다. 그의 영향을 받은 범어사 주지 성월 스님은 1899년 범어사 금강암에 선원을 창설하고 다음해에는 안양암에, 1902년 4월에는 계명암에, 1906년 6월에는 원효암에, 1909년 1월에는 안심료에, 1910년 10월 대성암에 선원과 선회를 창설하여해 선풍을 크게 진작시켰다. 1966년 2월 28일에는 대웅전 건물이 보물 제434호로 지정됐고, 1969년에는 대웅전의 일부 목부가 교체되고 마루는 고쳐졌다.


범어사의 설화


# 낙안 스님


낙안 스님은 흔히 낭백수좌(浪伯首座) 혹은 만행수좌(萬行首座)라고 불린다. 일찍이 범어사에 출가해 부지런히 수행했다. 특히 보시행을 발원해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다 남을 위해 이바지했다. 그리고 스님에게 특기할 만한 일은 커다란 원력을 세워서 생을 거듭하면서까지 그 원력을 이룩한 사실이다. 이런 이야기가 전해 지고 있다.


이 나라에 고려가 멸망하고 조선이 건국되면서 융성하던 불교가 쇠망하기 시작한다. 조선시대의 배불숭유(排佛崇儒) 정책이 빚은 불교의 폐해는 필설로 이루 다 형언할 수 없다. 조선 중엽에 이르러 불교의 박해는 그 극에 달했다. 승려들을 핍박하기 위하여 일개 사찰에 부여된 부역의 수가 무려 30종에서 40종에 이르렀다고 하는 기록이 전한다. 종이, 붓, 노끈, 짚신, 새끼, 지게 등 그리고 특수 곡물 등 온갖 농작물에 이르기까지 범어사에 철마다 부여된 부역의 수만도 36종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 무렵의 승려들은 자신들의 공부는 전혀 돌아볼 겨를도 없이 오로지 일생을 나라에서 부과된 부역에 종사하기도 바쁜 나날이었다.


낭백 스님은 이러한 당시의 사정을 뼈아프게 개탄하시고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이 부역만은 면하고 살아야겠다고 결심하기에 이르렀다. 설사 금생에 안되면 내생에라도 부역을 면하고 마음껏 공부할 수 있게 하리라 마음먹고 원력을 세웠다.


"금생에는 복을 많이 지어서 내생에는 나라의 고급관리가 되리라. 그리고 그 관리의 특권으로 범어사 스님들의 부역을 혁파하리라." 하고 그 날부터 힘이 닿는 대로 복을 짓기 시작했다. 지금의 기찰 부근 그러니까 동래를 들어가고 나가는 길목 큰 소나무 밑에 샘물을 파서 행인들의 식수를 제공하고, 넓은 밭을 개간해 참외, 오이, 수박 등을 심어서 지나가는 행인에게 무한정 보시했고, 그런 여가에 짚신을 삼아서 모든 인연 있는 사람들에게 신을 보시하는 등 온갖 일로써 많은 사람을 구제하시다가 마지막 늙은 몸뚱이까지도 보시하고자 돌아가실 때에는 범어사 뒷산 밀림 속에서 삼일동안 헤매다가 굶주린 호랑이에게 먹히는 바 됐고 한다.


낙안선사/범어사 홈페이지 캡처스님은 돌아가시기 전에 스스로 숙명통(宿命通)을 못하였했으므로 세 가지의 증명할 일을 남겨 놓기로 했다. 나라의 고급관리가 되어 올 때에는 모든 관리가 다 일주문 앞에서 말에서 내리는데 자신은 어산교 앞에서 내리고, 자신이 쓰던 방을 봉해 두었다가 스님 스스로가 열 것이며, 사찰의 어려움을 물어서 해결할 것을 약속하리라 라는 것이었다.


스님이 돌아가시고 비슷한 연배의 스님들도 다 돌아가시고, 그 제자되는 스님들도 이미 늙었으나 낭백 스님의 그 눈물겨운 원력이 성취될 날만을 기다리고 기다리던 어느 날, 중앙의 순상국(巡相國)이라는 높은 벼슬을 지내는 관리가 온다는 전갈을 받고 범어사 스님들은 언제나 지방관리가 와도 그러했듯이 주지스님 이하 모든 대중들은 어산교까지 나가서 행렬을 지어 부복하고 기다렸던 것이다. 그런데 이 관리는 반드시 일주문까지 말을 타고 올라가는 상례를 깨고 어산교 앞에서 말에서 내리는 것이다. 그리고 사찰을 자세히 돌아본 뒤 수 십 년 동안 봉해둔 낭백 스님의 방 앞에 와서는 기어이 문을 열라해 봉함을 뜯고 열어보니, 개문자시폐문인(開門者是閉門人)이란 스님의 친필유묵이 몇 십년의 세월 속에 얼룩져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주지 스님의 차대접을 받으면서 사찰의 어려움을 묻고 36종의 부역을 혁파해 줄 것을 약속하고 돌아가서 그 즉시 동래부사에게 명해 시행하게 했다고 전한다. 그 증거로써 지금 어산교에서 500∼600m 정도를 아래로 내려가면 옛날에 사용하던 길옆에 몇 개의 비석이 있는데 그 중에서 '순상국조공엄혁거사폐영세불망단(巡相國趙公嚴革祛寺弊永世不忘壇)'이라는 비가 그것이다.


순상국 조공은 스스로 낭백 스님의 후신이라고 한 일은 없다. 그러나 그 분은 낭백 스님의 원력을 성취시킨 사람이므로 낭백 스님의 환생임에 틀림없다.


# 영원 조사


영원 조사는 경상남도 함양 사람이고 성은 이씨다. 열 살 때 범어사 명학동지(明學同知)라는 스님을 스승으로 해 출가했다. 4∼5년 동안 은사 스님을 모시고 여러 가지 사중 일에 열심히 종사하다가 15살 되던 해에 분연히 도를 배우려는 뜻을 세우고 스승에게 나아가 "세속적인 욕망을 버리고 발심수도(發心修道)하여 생사를 해탈하고자 한다."고 간청했다. 그러나 일에만 전념하고 재물을 모으기에 여념이 없었던 스승은 끝내 그 뜻을 받아주지 않았다. 그는 어쩔 수 없이 몰래 금강산 영원동으로 가서 세상을 영원히 끊고 오직 한마음으로 정진해 크게 깨달았다. 그 후 그는 흰구름 떠가는 푸른 하늘과 흐르는 시냇물에 마음을 두고 유유자적하게 세월을 보냈다.


영원조사/범어사 홈페이지 캡처영원 스님이 30세가 되던 해 어느 날 선정에 들어 스스로 법열을 즐기고 있던 중, 저 명부의 세계 시왕동(十王洞)에서 범어사의 옛 스승 명학동지의 죄를 묻는 고통의 소리가 높이 들려왔다. 이에 그는 삼매에서 나와 스승을 구하려고 신통력으로 명부에 이르러 그 원인을 알아보았다. 그것은 스승인 명학동지가 생전에 탐욕심으로 재물을 모으고 선한 일이라고는 조금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죽은 뒤 구렁이의 과보를 받은 것이었다. 이에 그는 소연히 놀라 돌아와서 스승의 대상(大喪)이 되는 날에 신통력으로 스승의 업신인 구렁이를 동반하고 범어사로 돌아와 보니 많은 스님들이 재를 크게 베풀고 자못 번잡했다. 그는 스승의 업신을 생전에 아끼던 금고에 넣은 뒤 부처님 앞에 예배하고 다시 그 금고에 이르러 스승의 옛 이름을 세 번 불렀다. 이 소리를 듣고 큰 구렁이가 나오거늘 그는 그 구렁이에게 "이러한 업신을 얻게 된 것은 전생에 탐심으로 재산을 모은 까닭이니 지금부터는 모든 인연을 버리고 몸과 마음을 놓아 버려라."고 하면서 두 번 세 번 말했다. 이에 그 구렁이가 스스로 머리를 들어 땅에 세 번 곤두박고 업신을 벗어버렸다


그 후 10여 년이 지나 그 옛 스승이 이 세상에 다시 태어나 입산수도하여 수많은 착한 일을 하고 불법을 바르게 깨달으니 이 분이 곧 우운조사(雨雲祖師)라고 한다.


이렇게 스승을 제도한 영원 조사는 다시 금강산 영원동(靈源洞)에 들어가서 열심히 수도하시다가 만년에는 지리산으로 옮겨 영원사(靈源寺)라고 하는 절을 짓고 살았다고 한다.


# 매학 스님


매학 스님의 이야기는 영원 조사가 그의 스승을 제도한 이야기와 근본적으로 그 맥은 같으나 약간 다른 형태로 전해지는 것이 있어서 한국의 전설에 실려 있는 것을 그대로 기록해 둔다.


임진왜란 때 동래 범어사에 매학이라는 스님이 있었다. 그런데 매학 스님은 원래 욕심이 많아 신도들의 재물을 탐내어 수단을 가리지 않고 재산을 쌓기에만 눈이 어두웠다.


어느 날 매학 스님이 당시 조선 병사들이 진을 치고 있던 소산이라는 마을 앞을 지나다가 조그마한 집에 서기가 돌고 잇는 것을 발견하였다. 옷깃을 여미고 그 집에 들어서니 웅장한 소리를 내며 옥동자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매학 스님은 산모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 아이는 불가에 인연이 깊은 동자입니다.


그러니 잘 길러 주시면 몇 년 후에 내가 와서 동자를 데려가겠습니다."

"불가에 인연이 깊은 아이라면 당연히 부처님 앞으로 가야지요."

산모는 매학 스님의 말에 순순히 응낙하였다.

그 후 십 년이 지나 매학 스님은 이 동자를 범어사로 데리고 와서 상좌로 삼았다.


하루는 산에 나무하러 갔던 상좌가 빈 지게로 돌아왔다. 그래서 매학 스님은 노기를 띠고 상좌를 크게 꾸짖었다. 그랬더니 상좌는 "스님 그저 놀다가 온 것이 아니옵니다. 제가 수풀을 헤치고 나뭇가지를 낫으로 베었더니 그 나뭇가지에서 시뻘건 피가 줄줄 흘러내리기에 무서워서 도저히 나무를 벨 수가 없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상좌의 말에 스님은 노발대발하여, "고약한 놈 같으니라고, 어디서 그따위 거짓말을 배웠느냐, 나뭇가지에서 어떻게 피가 흐른단 말이냐. 나를 속이려거든 내 앞에서 당장 나가거라."하고 호통을 쳤다.


상좌는 그 길로 범어사를 떠나 금강산에 들어가서 열심히 수도를 했다. 상좌가 금강산으로 들어간지 삼 년 되던 해에 매학 스님은 범어사에서 병으로 죽었는데 이 때부터 범어사 고방에 큰 구렁이가 도사리고 있었다. 절의 스님들은 불안하기 짝이 없었다. 그런데 그 구렁이는 이상하게도 팥죽을 잘 먹기 때문에 절에서는 구렁이에게 팥죽 대접을 극진히 했다.


매학스님 부도/범어사 홈페이지 캡처금강산에서 매학 스님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상좌는 범어사로 돌아왔다. 상좌는 여장을 풀기가 바쁘게 즉시 고방으로 달려가서 문을 열고 구렁이를 향해 정중하게 절을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서 상좌는 얼마동안 불경을 외우다가 "스님 이 일이 왠일입니까? 어서 해탈하시와 승천하시옵소서."라고 말하며 천천히 밖으로 나왔다. 그러자 구렁이도 꿈틀거리며 따라 나오는 것이었다. 구렁이가 시냇가에 이르렀을 때도 상좌의 독경소리는 그치지 않았다. 구렁이는 냇가의 바위에다 머리를 한참동안 처박고 있더니 마침내 길게 뻗고 말았다. 몸을 벗고 죽은 것이었다. 바로 이 때 구렁이의 몸에서 한 마리의 새가 나와서 상좌의 품에 안기는 것이었다.


이튿날 상좌는 새를 안고 다시 금강산으로 향하는 길에 올랐다. 가는 도중에 이 새는 짐승들이 교미하는 곳마다 날아가려고 퍼득거리기 때문에 상좌는 이를 막느라고 무진 애를 썼다. 어느 날 날이 어두워 인가를 찾다가 젊은 부부가 살고 있는 집에서 묵게 되었다. 상좌는 새를 주인에게 맡기면서, "열 달 후에 당신들 내외가 아들을 낳을 터이니 잘 길러 주기 바랍니다. 그 아이는 불가에 깊은 인연이 있는 동자이므로 십 년 후에는 내가 다시 와서 데려 가겠소이다."라 하고, 이튿날 상좌는 혼자 떠났다.(그 새는 중음신으로 상징되며, 또한 바로 중음신이라고 전해지기도 한다.)


그 후 상좌는 다시 이 집을 찾아와서 동자를 절로 데려갔다. 상좌는 동자에게 열심히 불도를 닦게 해서 차츰 고승의 풍모를 갖추게 되었다. 하루는 상좌가 동자 앞에 무릎을 꿇고, "스님 저를 모르시겠습니까?" 하고 물었다. "아니 그게 무슨 말씀이옵니까? 어서 일어나시옵소서.""동자는 영문을 몰라서 어리둥절했다. "스님, 스님은 매학 스님의 화신이옵니다. 정신을 차려 똑똑히 보시옵소서. 본래 저는 스님의 제자였습니다."하고 목메인 소리로 말했다.    이렇게 해서 금강산의 상좌는 다시 제자가 되고 범어사의 스님이었던 매학 동자는 상좌의 스승이 되었다고 전한다.


이 전설에 나타나는 상좌는 앞에서 말한 영원 조사일 것이다. 그리고 매학 스님은 영원 조사의 스승 명학동지일 것이다. 앞의 영원 조사에 대한 이야기나 뒤의 매학 스님에 대한 이야기는 아마도 같은 이야기로써 조금씩 달리 구전됐다고 생각된다./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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