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메일전송
판소리계 소설 '춘향전'의 무대이며 국악의 성지 ‘광한루’
  • 박광준 기자
  • 등록 2022-11-07 23:11:16
  • 수정 2022-11-09 21:39:51

기사수정

[박광준 기자] 광한루원은 우리나라 4대 누각의 하나인 광한루와 함께 하늘의 옥황상제가 살던 궁전 ‘광한청허부’를 지상에 건설한 인간이 신선이 되고픈 이상향으로 월궁의 광한청허부와 같다해 얻어진 이름이다. 우리나라 4대 누각인 광한루원, 부벽루, 촉석루, 영남루 중 광한루가 단연 으뜸.



시인 묵객들은 궁궐에는 경회루가 있고, 지방에는 광한루와 함께 평양의 부벽루, 진주 촉석루, 밀양 영남루와 더불어 우리나라 4대 누각이라 불려지는데 그 중 으뜸은 광한루라 했다.


경회루는 궁궐의 건물로 왕실에서 지은 곳이면서 지방의 누각 중 평양의 부벽루는 애석하게도 아직은 가볼 수 없는 곳이고, 진주 촉석루는 안타깝게도 6.25 때 불에 타 지금의 건물은 1960년 5월경 복원한 것으로 복원 역사가 짧고, 밀양의 영남루 역시 1844년에 지어 복원 역사가 길지 않다.


그러나 광한루는 1419년에 지어 1597년 정유재란 때 불탔으나 1626년에 복원한 건물로 복원 역사 면에서도 단연 으뜸이다.



광한루원은 경복궁 경회루의 지원과 전남 담양군에 있는 양산보가 조성한 소쇄원과 함께 한국의 정원을 대표할 만큼 우수하며 독특한 조경양식이 탄생하는 모체가 되고 있다.


정원의 사상적, 역사적 배경은 자연적 사고방식 즉, 신선사상과 음양오행사상, 풍수지리사상 또는 수심양성의 도로 표현되는 송, 죽, 국, 매의 사절과 유교의 선비사상이다. 그 중에서도 신선사상이 가장 크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신선정원의 양식은 생성시기인 조선시대의 제도적인 원인에 기인해 유교문화가 지방으로 분산되면서 형성됐다.


현재의 누원 모습은 누원 근처 시장이 불타고 옮긴 것을 비롯해 수차례 확장 사업을 하면서 차례로 근처의 부지를 매입해 오늘에 이르게 됐다.



광한루원은 근세 전기에 조영된 대표적인 정원으로 꼽히고 있는데 한국의 독특한 조경양식이 탄생하는데 모체가 되고 있다. 정원을 대표할 수 있을 만큼 질적으로 우수하고 동시대적 문학사에 나타난 정원양식을 표현하고 있어 전통예술을 계승 발전시키는데 중요한 몫을 차지하고 있을 뿐 아니라 문화재적 가치가 있다.


광한루원 앞에는 동서 100m, 남북 59m에 이르는 정방형의 호수와 호수 속의 3개의 섬(삼신산), 그리고 서편에 4개의 홍예로 구성된 오작교로 구성돼 있다. 오작교는 평교지만 교각의 형태가 원형으로 된 홍예교로 누정원을 구성하는 구성물의 일부로 처리돼 있는데 직선적이고 평탄한 노면에 율동감을 주어 경관의 아름다움을 더해주는 요소로서의 가치를 지니고 있고 호수에 직녀가 베를 짤 때 베틀을 고이는 돌인 지기석을 넣고 견우가 은하수를 건널 때 쓰는 배인 상한사를 띄워 칠월 칠석의 전설의 은하수와 오작교를 상징한다.


호수는 현재 상태에서 1:2의 비를 갖는 장방형으로 축조돼 있고 그 안에 3개의 섬이 동서방향으로 거의 같은 간격으로 배치돼 있고 호수 북쪽 광한루 앞에는 돌 자라가 동남방향으로 향해 놓여 있어 신선사상에 입각한 지킴이의 기능을 갖고 있어 전체적으로 광한루원의 구성은 넓은 은하세계, 즉 천체우주를 상징하고 있다.


# 광한루



광한루는 원래 1419년 황희 정승이 남원으로 유배돼 왔을 때 '광통루'란 작은 누각을 지어 산수를 즐기던 곳이다. 이후 세종 26년(1444)에 하동 부원군 정인지가 이곳의 아름다운 경치에 반해 달나라 미인 항아가 사는 월궁속의 '광한청허부'를 본따 '광한루'라 바꿔 부르게 됐다. 광한은 달나라 궁전을 뜻한다. 춘향과 이몽룡도 바로 이곳에서 처음 만나 사랑을 맺게 됐다. (보물 제 281호)


이 건물은 조선조 초기의 재상이었던 1419년 황희(黃喜)가 남원에 유배됐을 때 누각을 짓고 광통루(廣通樓)라 했다. 그 후 당시 충청 전라 경상 삼도 순찰사였던 하동부원군 정인지가 이 누에 올라 경관을 감상하다가 “오호라 호남에서 가장 뛰어난 경관은, 나의 고향의 경승을 감상하게 되면 나의 고향보다 나은 곳이 없고, 더욱이 이곳 광한루보다 나은 곳이 없더라'면서 용성지(龍城誌)'로 했다. 


또 일설에는 ”호남의 승경으로 달나라에 있는 궁전 광한청허지부가 바로 이곳이 아니던가“하고 감탄해 그 후 광한루로 개칭됐다. 하지만 이때의 건물은 1597년 정유재란으로 인해 불타고 현재의 건물은 1626년 당시 남원부사인 신감(申鑑)이 복원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광한루의 앞뒤에는 ‘호남제일루(湖南第一樓), 계관(桂觀), ’광한루(廣寒樓)란 편액이 걸려있다. 호남제일루라는 말 그대로 호남에서 제일가는 누각이라는 뜻이고, 광한과 청허부는 하늘나라 월궁의 옥경에 들어서면 ‘광한 청허지부’가 있다는 신화적 전설을 상징하고, 계관은 달나라의 계수나무 신궁을 상징한다. 


광한루 누각에 걸린 여러 편액중 광한루란 편액은 신익성이 호남제일루와 계관의 편액은 1855년 남원부사 이상억이 누각을 중수하면서 손수 써 걸었다. 이 중 계관의 편액은 동학란 때 없어진 것을 1930년대 광한루를 대대적으로 보수할 때 남원유지 강대형이 다시 써 건 것이다. 또한 현재 광한루에 걸린 광한루란 편액은 전민의원 조정훈이 쓴 글씨라고 하는데 금암봉의 금수정과 용성관의 편액 글씨도 썼다고 전해온다.


1879년 광한루가 차츰 북쪽으로 기울어져 이를 방지키 위해 루의 북쪽에 다락(월랑)을 세워 층층대를 만들어 놓았다. 북쪽의 층층대는 1877년(고종14년)에 부임한 남원부사 이용준이 광한루가 퇴락해 본관 전체가 북쪽으로 기울어져 무너질 우려가 있어 수지면 고평리에 사는 추(秋) 대목의 묘안을 받아들여 북쪽에 누를 오르내리는 계단을 만들되 본관과 같이 아름드리 기둥을 세워 튼튼하게 고정시켜 본관의 기울음을 바로 잡고 외관으로도 더 화려하게 했다. 이는 우연하게도 누각 건축사상 큰 의의를 가지게 되는데 그것은 우리나라 누각에 월랑을 가설하게 된 시초이며 이전까지는 누상을 오르내리는 사다리만 설치했다.



월랑은 상하 2층으로 돼 있는데 하층은 5단, 상층 5단의 층층계단이 있고 양측 난간에는 칸살을 설치했고 현관 옥상의 자그마한 지붕은 본관의 높고 큰 지붕과 조화를 이루어 누각의 아름다움을 한층 더해준다.


기단은 막돌바른층 쌓기의 낮은 기단위에 막돌초석을 놓고 그 위에 원형의 돌 기둥을 세우고 2층 나루부분에는 나무기둥을 세웠고 2층 누마루 주위에는 계자 난간을 둘렀고 기둥 사이에는 모두 분합문의 들창을 달아 사방이 모두 개방되게 하여 북쪽으로 교룡산, 남쪽으로 금암봉이 멀리는 지리산 노고단과 반야봉이 보인다.


기둥 위에는 주두를 얹고 기둥머리부터 소 혓바닥 모양을 하나 내고 위에 행공첨차를 놓아 외출목을 구성하고 다시 위에 우설을 내어 이익공과 비슷한 주심포건물을 만들었고 창방과 주심도리 사이에는 화반을 끼웠다.



가구는 칠량으로 대들보를 전면의 평주와 내진의 평주위에 걸고 보위에 동자주를 세워 종량을 받치면서 종량위에 조각된 일공을 세워 종도리를 받치고 있다. 천장은 연등천장으로 연목 및 부연이 있는 겹처마이고 건물 네귀의 춘설에는 활주를 받쳤다.


누의 뒤쪽에는 익랑식(翼廊式)으로 월랑(月廊)이라는 누에 오르는 층계를 만들었고 그 구조의 익공식으로 창방위에 코끼리, 자라와 토끼 등 동물모양의 화반을 놓았다. 누의 뒤쪽으로 연달아 낸 익루는 정면 3칸, 측면2칸의 익루(翼樓)로 1795년(정조19, 부사 이만길 중수시)에 마련됐다고 한다. 3면에는 퇴로를 둘러 개방했고 그 안쪽으로 정면 2칸, 측면 1칸의 온돌방용 아궁이와 굴뚝이 사방을 쌓은 고막이 벽체에 나있다. 남원지(1960년) 및 증보 남원지(1972년, 조성교)등에는 1925년 보수공사 때 만들어진 것이라고 기록돼있어 판단하기 어렵다.


광한루가 다른 누각과 비교할 수 없는 점은 조선후기 문예부흥기라 불리 우는 영정조시대에 창작활동이 활발해 판소리계 소설 '춘향전'의 무대이며 국악의 성지로 자리매김하고 있다는 사실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주지의 사실이다.


# 청허부



광한루원의 정문으로 월궁의 출입문을 상징한다. 이문을 들어서면서부터 지상의 인간이 천상의 세계로 발을 딛게 된다는 상징적인 문이다.


청허부는 광한루원의 정문이다. 이 건물은 1971년 최봉채 남원군수가 경역을 확장하면서 신축한 건물로 건평 약 11.83평에 맞배지붕 솟을 삼문형식으로 지어졌는데 광한루원이 천체우주를 지상에 건설한 작은 우주로서 하늘의 옥황상제가 사는 달나라 옥경인 광한 청허부를 상징하므로 옥경을 들어가는 문이라는 의미로 청허부라 했다.


우아한 곡선과 자연스런 풍우판 등을 가진 청허부는 들어오면서부터 우리나라 전통 건축문화와 자연스럽게 접하게 해주는 곳이다. 정면의 중앙에는 일중(一中) 김충현이 쓴 청허부란 현액이 걸려 있는데 ‘청허부’는 하늘나라 옥경의 ‘광한 청허지부’에서 따온 것으로 이 문이 월궁의 출입문임을 상징하고 있다.


# 완월정



완월정 지상의 사람들이 천상의 세계를 꿈꾸며 달나라를 즐기기 위해 지은 것으로, 향해있는 수중누각이다. 춘향제 행사의 주요 무대로 사용되고 있다. 옛날 옥황상제가 계식 옥경에는 광한전이 있고, 그 아래 오작교와 은하수가 굽이치고 아름다운 선녀들이 계관의 절경 속에서 즐겼다는 전설이 있다.


이 전설에 따라 광한루는 천상의 광한전을 재현한 것이고, 이 완월정은 지상인이 달나라를 즐기기 위해 전통 조선식 누각을 세워 광한루원의 절경을 한층 돋보이게 하고 있고, 해마다 이 누각 수중무대에서 우리나라 대표적인 민속 축제인 춘향제가 열리고 있다.


완월정은 1971년에 신축된 수중누각으로 1963년 채기묵 남원군수의 재임(1962년 4월 5일~1963년 5월 31일) 당시부터 연차계획을 세워 경내를 확장하고 주변을 정화하는 과정에서 증설된 건물이다. 1969년 기존 호수를 확장해 인공 방장형 호수를 축조한 후 수중누각으로 신축한 것인데 2층 누각이다. 누각의 이름은 옛날 남원성 남문의 문루(門樓)인 완월루(翫月樓)에서 따온 것이다. 


# 방장정



삼신산의 영주(한라산), 봉래(금강산), 방장(지리산) 중방장에 위치하고 있는, 방장정은 건축양식보다는 소박한 멋을 살린 아담한 모습을 하고 있다. 방장은 전라감사 송강 정철이 삼신도를 조성함에 그 근원을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지금의 방장정이 세워진 시기는 1963년부터 시작된 광한루원 확장 정화계획에 따라 당시 남원군수 이화익의 창안으로 도편수 이한봉이 건축했다. 


그 모습을 보면 기단부는 형성되어돼 있지 않고 원형의 가공초석위에 복석형태의 화강석을 얹고 위에 기둥과 귀틀을 세워 장마루를 깔았다. 또한 누난간은 설치돼지 않고 다소 높은 듯한 기둥 위에 계두, 양서, 수서 등을 걸치고 주심도리를 높게 설치했으나 칸사이가 좁은 관계로 화반은 설치 하지 않은 듯하다. 천장은 육각형의 소란대를 걸쳐 우물반자를 설치했고 연목과 부연을 둔 겹처마를 형성하고 있고 단청은 기둥머리부터 금모로 단청을 했다.


# 춘향사당



열녀춘향의 굳은 절개를 영원히 흠모하기 위해서 건립된(1931) 사당으로, 임 향한 일편단심을 줄여 단심문이라 칭한다. 사당의 중앙에는 열녀춘향사라는 현판이 있고 안에는 춘향의 영정이 안치돼 있고, 이 사당에서 축원을 빌면 백년가약이 이뤄진다고 해 참배객이 늘고 있다.


최초 영정은 진주사람 강주수가 그려 기증하고 1939년 가을, 이당 김은호가 그린 영정을 나란히 봉안했으나 6.25중에 훼손돼 1961년 기증받은 이당 김은호 화백이 그린 춘향의 영정이 현재까지 봉안되고 있다.


이러한 춘향사당은 1931년 일제강점기에 남원의 유지들이 주축이 돼 권번의 기생들과 힘을 합해 민족의식 고취와 춘향의 절개를 이어받고자 설립하고 제사를 지내게 됐다.


# 영주각


광한루와 함께 누원내 신성사상 배경의 정원으로 가꾸기 위해 축조된 상징적 누각이다. 


용성지의 누정편에 보면, ‘전라관찰사 정철이 요천에서 끌어온 물이 누앞을 좁다랗게 흐르고 있던 개울을 넓혀서 평호로 하고 은하수를 상징케 했으며 주위를 석축으로 하고 호중에 세 개의 섬을 만들어 하나에는 녹죽을 심고, 하나에는 백일홍을 심었고, 다른 하나에는 연정을 세우고 호중에 여러 종류의 꽃을 가득 심었다'고 돼있다.



이 문헌에 의하면 영주각은 관찰사 정철이 주도한 광한루 확장 공사시 건립된 것으로 보이고 이때는 한주섬(漢州)이라고 불렀던 것 같다. 현재의 영주각은 정조 19년(1795)에 부사 이만길이 재건하고 영주각이란 편액을 손수 써서 걸었다고 ’증보 남원지‘에 기록돼 있다. 그 후 1963년부터 경내가 확장, 정화되면서 1965년에 36회 춘향제를 준비하면서 지금과 같은 단청이 됐다.


영주각은 단층 누각 형태로 기단부는 화강석 장대석을 정밀 가공하지 않고 설치했으나 부분적으로 자연미도 보인다. 1층 하부의 석주는 화강석으로 일정하지 않은 방형으로 가공해서 초석받침위에 세웠고 초석위로 장귀틀과 동귀틀을 끼워 우물마루를 설치했고 초석 위에 흠을 파서 귀틀장선을 끼웠다.


상층 우물마루에는 누간을 두지 않고 기둥에 흠을 파서 여모중방을 끼우고 머름을 낮게 설치했고 후면에 목조계단 5단을 설치했다. 기둥 위에는 주두를 얹고 기둥머리부터 양서를 하나 내고 위에 쇠서를 구성해 이익공의 형태를 만들었고 창방과 주심도리 사이에는 화반을 끼웠고 주심도리와 주두에는 첨자를 끼웠다. 


가구는 5량으로 대들보를 외진 기둥 주두위에 얹고 보위에 동자주를 세워 종량을 받치면서 종량위에는 판대공을 세워 종도리를 받치고 있다. 천정은 연등천정으로 연목과 부연이 있는 겹처마이고 건물 네 귀의 추녀에는 활주를 받쳤고 기둥머리 이하에는 석간주 가칠했고 상부는 모로 단청으로 마감됐다.


# 오작교


하늘에 사는 옥황상제의 딸 베짜는 직녀와 미천한 소몰이 견우가 신분을 초월한 사랑을 해 결혼을 하게 됐는데 이들의 게이름으로 옥황상제의 노여움을 사 견우와 직녀는 은하수 동쪽과 서쪽으로 격리돼 1년에 한번 칠월칠석날 다리도 없는 은하수에서 만나도록 했다.



둘의 만남이 너무 애닳아 이날에는 지상의 까치와 까마귀가 모두 은하수로 올라가 다리를 만들어 둘을 만나게 했는데 까마귀와 까치가 만든 다리를 밟고 만나는 견우와 직녀의 눈물이 비를 만들었다. 칠월칠석날이 되면 비가 오고 까마귀와 까치를 볼 수 없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고 까치의 머리가 흰 것은 오작교가 된 까치의 머리를 견우와 직녀가 밟아 벗겨졌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같은 하늘나라 견우과 직녀의 사랑은 신분의 벽을 뛰어 넘은 이도령, 성춘향의 사랑과 흡사하다. 이러한 전설을 지상에 펼쳐놓은 것이 광한루원의 호수와 오작교다. 그래서 오작교는 까마귀 오(烏), 까치(鵲), 다리(橋)자를 쓴다.


선조15년(1582)에 남원부사 장의국은 광한루를 수리하면서 다리를 새로놓고 오작교라 부르게 됐다. 그 이후 광한루는 정유재란때 불타 1626년 복원됐지만 오작교는 처음모습 그대로 남아 있다. 오작교는 길이 57m, 폭 2.4m, 4개의 홍예경간으로 이뤄져 있고 현존하는 연지교 중 국내에서는 규모가 가장 크다.


또한, 오작교를 밟으면 부부 금실이 좋아진다는 전설이 있고 춘향과 이도령의 사랑이 어린곳이기에 많은 사람들이 찾는 곳이다. 처녀가아닌 사람이 다리를 건너면 다리가 무너진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이처럼 광한루와 오작교는 전설과 사랑이 어우러져 있어, 춘향이가 단오날 그네를 뛰는 것을 광한루에 올라앉아 이도령이 보고 첫눈에 반해 사랑이 싹트기 시작한 것처럼 사랑하는 연인들의 다리로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 월매집



춘향과 이몽룡이 백년가약을 맺은 부용당과 행랑채를 재현해 놓았다.


당시 생활상을 알 수 있게 밀랍인형과 생활 도구들을 전시해 놓았다. 사랑의 맹세판과 장원급제 기원단이 있고 춘향캐릭터 상품도 판매한다. 조선시대 우리나라 고전 '춘향전'의 무대가 된 집이다. 남원부사의 아들 이몽룡이 광한루 구경길에 올랐을 때 그네를 뛰고 있던 성춘향에게 반해, 춘향이 살고 있는 월매집 부용당에서 백년가약을 맺은 집으로 춘향 어머니의 이름을 따서 '월매집'이라고 했다./사진-윤정숙 기자

0
  • 목록 바로가기
  • 인쇄


 박정기의 공연산책더보기
 조선왕릉 이어보기더보기
 한국의 서원더보기
 전시더보기
 역사의 숨결더보기
 테마가 있는 여행더보기
 폰으로 만난 문화 & 역사더보기
리스트페이지_004
모바일 버전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