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메일전송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
  • 이승준 기자
  • 등록 2022-11-06 20:48:03
  • 수정 2024-02-12 22:19:54

기사수정
  • 독립기념관 경내 야외전시물 시.어록비(4)

[이승준 기자] 독립기념관 경내에는 야외 전시물인 애국 선열들의 시.어록비가 건립돼 있다. 여기에는 이순신 등 전통시대에 국난을 극복한 인물과 김구 등 일제 침략기에 독립운동을 주도한 애국선열들의 불굴의 민족혼과 자주 독립의지가 담긴 어록이 새겨져 있다. 짧은 글 속에 녹아있는 선열들의 숭고한 희생과 고귀한 나라사랑 정신은 우리들의 가슴에 영원히 되새기게 한다.<편집자 주>/사진-이승준 기자



이승만(李承晩 : 1875 ~ 1965)/호는 우남(雩南)이며, 황해도 평산에서 태어났다. 1895년 배재학당을 졸업할 무렵 개화 사상에 심취해 협성회와 독립협회 등에서 활동했다. 1898년 정부전복획책 혐의로 독립협회 간부들과 함께 투옥돼 종신형을 선고 받고 복역 중 1904년 석방됐다. 이해 겨울 미국으로 건너가 미국 정부에 일본의 한국 침략 저지를 호소했고, 그 뒤 조지 워싱턴대학, 하버드대학 등에서 수학하고 1910년에 프린스턴대학에서 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같은 해 일본이 한국을 병탄하자 귀국해 기독청년회를 중심으로 활동하다 한때 체포되기도 했다. 1913년 다시 하와이로 건너가 한인 교육 사업에 투신했고, 1919년 3.1 운동 후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통령으로 추대됐다. 그 해 8월 미국 워싱턴에 구미위원부를 설치해 다각적인 선전과 외교활동을 전개했다. 이 후 주로 미국에서 외교 노선을 통한 독립 운동을 전개하다 1945년 광복이 되자 귀국했고, 1948년에 수립된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이 됐다. 그뒤 발췌개헌, 사사오입개헌 등으로 3선됐고, 1960년에 4선됐으나 4.19혁명으로 사임하고 하와이로 망명해 1965년에 별세했다.



안창호(安昌浩 : 1878 ~ 1938)/호는 도산(島山)이고, 평안남도 강서에서 태어났다. 1897년 구세학당을 졸업하고 독립협회에 가입했다. 1899년 강서에 점진학교(漸進學校)를 설립하고, 1902년 미국으로 가서 국민학교를 다녔고, 이듬해 재미교포를 위해 공립협회를 설립했다. 1907년 귀국해 신민회를 조직하고, 평양에 대성학교, 정주에 오산학교를 세웠고, 대구에 태극서관, 평양에 도자기 회사를 세웠다. 1912년 미국에서 해외동포를 총망라한 대한인국민회를 조직해 총회장에 선임됐고, 이듬해 로스앤젤레스에서 흥사단을 결성했다. 1919년 임시정부 내무총장 겸 국무총리 대리 등을 역임해 임시정부 강화에 노력했고, 그 후 대독립당을 결성(1923)했고, 독립운동 근거지 이상촌 건설사업을 추진(1923~1931)했다. 독립군 단체 행동 통일을 위한 노력(1926)과 한국독립당 창당(1929)등 독립운동을 위해 힘을 쓰다가 1932년 상해에서 일경에 체포돼 징역 4년을 선고 받았다. 2년 6개월 복역후 가출옥해 휴양 중에 1937년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다시 체포됐다. 이듬해 병보석으로 입원 중 별세했다. 



방정환(方定煥 : 1899 ~ 1931)/호는 소파(小波)이고, 서울에서 태어나 1918년 보성전문학교에 입학해 '신청년' '신여자' '녹성' 등의 잡지 편집을 맡아았다. 이듬해 3.1 운동 때는 오일철 등과 함께 '독립신문'을 만들어 돌리다 체포됐다. 1921년 일본 동양대학에 재학중에 여름방학을 이용해 귀국하여 어린이에 대한 존대말 쓰기 운동을 벌였다. 1922년 동화집 '사랑의 선물'을 발행하고, 이듬해 잡지 '어린이'를 창간했고, 손진태, 윤극영 등과 색동회를 조직하고 그해 5월 1일을 첫 어린이날로 제정했다. 1924년 전국소년지도자대회를 열어 어린이 단체의 단합을 꾀하고, 잡지 '별건곤' '신여성'을 발간하고 동화 대회를 개최했고, 이듬해에는 소년운동협회를 결성하는 등 어린 이운동에 힘을 다하다가 1931년 32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신규식(申圭植 : 1880 ~ 1922)/호는 예관이고, 충청북도 문의군에서 태어났다. 관립 한어학교(漢語學校)를 거쳐 육군무관학교를 졸업한 후 부위(副尉)까지 진급했다. 1905년 을사5조약에 죽음으로 항거하려고 음독했다가 실패해 오른쪽 눈이 실명됐다. 그 후 대한협회에 가입하고 대종교에 입교해 활동하다가 1911년 봄 중국 상해로 망명해 중국 신해혁명에 참가한 최초의 한국인으로 기록된다. 이듬해 항일 비밀 결사인 동제사를 결성하고 이를 다시 중국 혁명 운동가들과 연결해, 신아동제사를 결성했다. 1915년 박은식과 대동보국단을 조직해 만주와 노령지방의 독립운동가를 연결했고, 1917년 7월 조소앙, 박은식 등과 함께 '대동단결선언'을 발의해 대한민국 정부 수립의 방향을 제시했다.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의정원 부의장, 법무총장을 거쳐 1921년 국무총리대리에 취임한 후 외무총장직도 겸임하게 됐다. 1922년 임시정부에 내분이 생기자 조국의 장래를 근심한 나머지 25일간 단식한 끝에 순국했다



양기탁(梁起鐸 : 1871 ~ 1938)/호는 우강(雩崗) 또는 운강(雲崗)이고, 평안남도 평양에서 태어났다. 1904년 영국인 베델과 국한문 혼용체 일간신문 '대한매일신보'를 발행했고, 이듬해 영자신문 '코리아 데일리 뉴스'를 발간했다. '대한매일신보'의 주필이 돼 언론활동을 통해 계몽운동에 주력했다. 1907년 12월 신민회 조직에 참여했고, 경술국치 후 만주 류하현에 신흥강습소를 설립해 인재 양성에 힘쓰다가 1911년 5월 소위 '105인 사건'으로 4년간 옥고를 치렀다. 그 후 거주 제한 중에 만주로 탈출했다가 체포돼 다시 1년간 유배됐다. 1920년 통천교(統天敎)를 창시해 종교운동을 표방한 독립운동을 전개했고, 같은 해 미국 국회의원단이 내한했을 때 '독립진정서'를 전달하려다 투옥됐다. 그 후 모친상으로 가출옥한 후 만주로 탈출했다. 1922년 대한통의부, 1923년 의성단을 결성했고, 1924년 오동진, 김동삼 등과 정의부를 조직해 독립운동단체 통합과 독립운동에 힘썼다. 1926년 고려혁명당을 결성해 위원장이 됐고, 1934년 대한민국임시정부 주석에 추대됐고, 1935년 여러 정당의 통합체인 민족혁명당 결성에 참여했다. 1938년 중국 강소성에서 별세했다.



박은식(朴殷植 : 1859 ~ 1925)/호는 백암(白巖)이며, 황해도 황주에서 태어났다. 1898년 장지연, 남궁억 등과 '황성신문' 창간에 참여했고, 주필이 됐다. 뒤에 경학원 강사, 관립 한성 사범학교 교사, 서북학회 회장, 황성신문사 사장을 역임했고 이어 '대한매일신보' '서북학회 월보'의 주필이 돼 민족 사상 고취에 공헌했다. 1910년 국권을 잃자 광문회의 위촉으로 저술에 힘쓰다가 1911년 5월 서간도로 망명한 후 고구려의 옛 터를 답사해 고대사와 고구려 위인전의 저술에 힘썼다. 그 후, 상해로 가 신규식과 함께 항일 비밀결사인 동제사와 한중 협력단체인 신아동제사(新亞同濟社)를 조직해 총재에 당선됐다. 3.1 운동이 일어나자 노령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대한인노인동맹단을 결성하고 상해로 건너와 임시정부 조직에 참여했고, '독립신문' '한국회보' '사민보' 등을 발간했다. 1924년 11월 임시정부 국무총리 겸 대통령 대리를 지냈ㅅ고 이듬해 3월 제2대 대통령이 됐다.



이상재(李商在 : 1850 ~ 1927)/호는 월남(月南)이고, 충청남도 한산에서 태어났다. 1867년에 상경해 박정양의 문객으로 있으면서 세계 정세에 눈을 떴고, 그의 1881년 일본시찰과 1887년 미국 공사 부임에 동행했다. 그 후 학부참서관 등 정부 고위직을 역임했고, 1896년 서재필 등과 독립협회를 조직했고, 만민공동회를 개최했다. 1898년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가 강제로 해산당하면서 검거됐다가 풀려났다. 1902년 개혁단 사건으로 다시 구금됐다가 1904년에 출옥했다. 1908년 황성 기독 청년회(Y.M.C.A) 종교부 총무 및 교육부장을 겸임하면서 종교운동과 청년운동에 심혈을 기울였다. 3.1 운동 때에는 막후에서 기독교와 천도교가 합작하는 데 큰 역할을 해 한 때 구금됐다. 1921년 조선 교육협회 회장으로 북경에서 열린 만국기독교청년 연합 대회에 대표로 참석했다. 1923년 조직된 소년연합척후대 초대 총재가 됐고, 이듬해 조선일보사 사장, 1927년 신간회 초대 회장이 되는 등 민족 지도자로서 명망이 높았다. 1927년 3월 77세를 일기로 일생을 마쳤다.



조명하(趙明河 : 1905 ~ 1928)/황해도 송화에서 태어났다. 집안이 가난해 보통 학교를 중퇴하고 군청 고원(顧員)으로 있으면서 강의록으로 독학했다. 1926년 일본에 건너가 대판전기회사 직공이 되고, 안달(安達)메리야스 공장에서 일하면서 야간학교를 다닌 후, 1927년 대만으로 건너가 부귀원 상점에 차 농장의 기사로 고용됐었다. 1928년 5월 14일 일본 황족이며 당시 육군대장인 구이궁방언(久邇宮邦彦)이 육군 특명검열사로 대만에 오자 대중(臺中)시 역전에서 그가 탄 무개(無蓋) 승용차에 뛰어올라 극약을 바른 독검으로 찔러 중상을 입힘으로써 6개월 뒤에 사망케 해 일제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이 의거로 비공개 법정에서 사형을 선고 받고, 1928년 10월 10일 23세의 나이로 순국했다.



차리석 (車利錫 : 1881 ~ 1945)/호는 동암(東岩)이고, 평안북도 선천에서 태어났다. 일찍이 신민회에 가입해 독립운동에 참여하는 한편, 대성학교 교사로 활동했다. 1911년 '105인사건'으로 투옥돼 3년간 복역했고 3.1운동 뒤 상해로 망명해, '독립신문' 기자와 편집국장 등을 역임하고, 대한민국임시정부 조직에도 참가했다. 1922년 임시정부 의정원 의원에 당선됐고, 1930년 임시정부 국무위원, 1932년 임시정부 의정원 부의장에 선출됐다. 935년 이후 임시정부 국무위원 겸 비서장으로 재임했다. 1945년 해방을 맞아 임시정부 환국을 준비하던 중 중국에서 순국했다.



윤봉길(尹奉吉 : 1908 ~ 1932)/아호는 매헌(梅軒)이고, 충청남도 예산에서 태어났다. 3.1운동이 일어나자 다니던 보통학교를 자퇴하고 한학을 배우면서 뜻을 세웠다. 1926년 농촌 계몽 운동에 뛰어들 것을 결심하고 사랑채에 야학당을 차리고, 문맹타파를 통한 농촌계몽운동을 시작했고, 이듬해 마을 야학 교재로 '농민독본'을 저술했다. 1928년 농촌 부흥 운동의 본산격인 부흥원 건물을 세웠고, 이듬해 지방 농민을 모아 월진회를 조직했고, 체력연마를 위해 수암체육회를 만들어 운동을 장려했다. 광주학생운동에 자극을 받고 직접 혁명 투쟁으로 방향을 전환해 1930년 3월 집을 떠나 만주를 거쳐 이듬해 상해에 도착했다. 낮에는 공원으로 일하고 밤에는 어학 수업을 하는 생활을 하던 중 김구를 만나 한인애국단에 입단하고, 1932년 4월 29일 상해 홍구공원에서 열린 천장절 및 상해사변 전승 기념식장에 폭탄을 던져 일본의 상해 파견군 사령관 백천의측(白川義則) 대장과 일본 거류민 단장 하단정차(河端貞次) 등을 폭살하고, 제3함대 사령관 야촌길삼랑(野村吉三郞)과 제9사단장 식전겸길(植田謙吉) 등에게 중상을 입혀 민족의 자주 독립 정신을 세계에 떨쳤다. 그는 거사 직후 현장에서 붙잡혀 사형을 선고 받고 24세를 일기로 순국했다.



박찬익(朴贊翊 : 1884 ~ 1949)/호는 남파(南坡)이고, 경기도 파주에서 태어났다. 항일 학생 운동을 하다 관립상공학교에서 퇴학당하고, 1906년 신민회에 가입해 활동했다. 1910년 관립공업전습소를 졸업하고, 경술국치 이후 동지들과 국권 회복 투쟁을 벌이다 일경의 탄압이 심해지자 만주로 망명해 화룡현 삼도구에 한인 학교를 세우고, 서로군정서의 요직을 거쳐 상해로 가서 신규식과 동제사를 조직했다. 1920년 임시정부 의정원 의원이 되고, 이듬해 임시정부 대표로서 신규식과 함께 손문을 방문해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처음으로 정식으로 승인케 했다. 그 후 윤봉길 의사의 홍구공원 의거 후부터 해방까지 임시정부의 중국에 대한 외교 책임을 전담했다. 1940년 임시정부 법무부장이 되고, 광복 후 임시정부 주화(駐華) 대표단장으로 계속 현지에 머무르면서 동포들의 생명.재산 보호와 생업 안정 및 안전 귀국을 위해 일했다. 1948년 조국에 돌아와 이듬해 생애를 마쳤다.



이봉창(李奉昌 : 1900 ~ 1932)/일제에게 농토를 빼앗기고 서울에 올라온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용산 문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인 과자점 점원으로 들어갔다. 그 후 19세 때 용산 만철(滿鐵) 견습소 고용원이 됐다. 1923년 형 범태와 함께 일본으로 가서 대판철공소 직공으로 일했다. 1931년 중국 상해로 건너가 김구와 접촉했고, 일본 천황 응징을 자원해 인쇄소 직공과 악기점 점원 등으로 지내면서 기회를 기다렸다. 이 해 겨울에 준비가 완료되자 한인애국단에 가입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1932년 1월 8일 일황 유인(裕仁)과 청나라 황제 부의(簿儀)가 대대목(代代木) 연병장에 관병식을 하러 갈 때 앵전문(櫻田門)에서 수류탄을 던졌으나 빗나가 실패했다. 그러나 이 의거는 일본 조야에 큰 충격을 줬고, 이봉창은 아우성치는 일본인 군중 속에서 태극기를 들고 만세를 부른 뒤 붙잡혀 사형을 선고 받고 32세의 나이로 순국했다./다음호에 계속(사진-이승준 기자)

0
  • 목록 바로가기
  • 인쇄


 한국의 전통사찰더보기
 박정기의 공연산책더보기
 조선왕릉 이어보기더보기
 한국의 서원더보기
 전시더보기
 한국의 향교더보기
 궁궐이야기더보기
 문화재단소식더보기
리스트페이지_004
모바일 버전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