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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전통사찰 53] 동리산피의 중심사찰 곡성 '태안사'
  • 박광준 기자
  • 등록 2022-11-04 20:52:36
  • 수정 2024-04-02 03:4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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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광준 기자] 대한불교조계종 제19교구 본사인 화엄사의 말사이며, 대안사(大安寺)라고도 한다. 


742년(경덕왕 1)에 3명의 신승(神僧)이 창건했고, 고려 태조 때 광자대사(廣慈大師) 윤다(允多)가 중창해 선문구산(禪門九山)의 하나인 동리산파(桐裏山派)의 중심사찰로 삼았다. 동리산파의 개산조인 혜철국사(慧徹國師)가 머물렀던 이 절에 윤다가 132칸의 당우를 짓고 대사찰을 이룩했던 것이다. 



고려 초에는 송광사.화엄사 등 전라남도 대부분의 사찰이 이 절의 말사였으나, 고려 중기에 송광사가 수선(修禪)의 본사로 독립됨에 따라 사세가 축소됐다. 조선시대에는 효령대군(孝寧大君)의 원당(願堂)이 돼 조정의 지원을 받았다. 1683년(숙종 9) 정심(定心)이 중창했다. 1737년(영조 13)에 능파각(凌波閣)을 지었는데 능파각은 그 뒤에도 1776년.1809년.1861년.1923년에 각각 중수한 바 있다. 


6.25전쟁 때 대웅전을 비롯한 15채의 건물이 불타버렸고, 근래에 들어와 중창불사가 있었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대웅전을 비롯해 약사전.만세루(萬歲樓).해회당(海會堂).선원(禪院).능파각(凌波閣).일주문 등이 있다. 


이 중 해회당은 네모꼴로 이어진 큰 건물이고, 선원 역시 전국 굴지의 규모이고, 대웅전은 6.25전쟁 때 불탄 것을 곡성군의 보조로 1969년에 재건했다. 또, 능파각과 일주문은 1981년 각각 전라남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됐다.



중요문화재로는 혜철의 부도인 적인선사탑(보물, 1963년 지정), 윤다의 부도인 광자대사탑(보물, 1963년 지정), 광자대사탑비(보물, 1963년 지정), 청동 대바라(보물, 1988년 지정), 동종(보물, 2002년 지정) 등이 있다.


이 중 바라는 승무를 출 때 사용한 것으로, 조선 태종 때 효령대군이 발원해 만들었고, 둘레 3m로서 우리나라 최대의 것이다. 동종은 1465년(세조 11)에서 1475년(성종 6) 사이에 만들어진 것으로 공예수법이 뛰어나다.


이 절은 1925년 최남선(崔南善)이 찾아와 “신라 이래의 이름 있는 절이요, 또 해동에서 선종(禪宗)의 절로 처음 생긴 곳이다. 아마도 고초(古初)의 신역(神域) 같다.”고 극찬한 곳이다.


# 능파각



태안사의 금강문으로 누각을 겸한 일종의 다리건물로, 계곡의 물과 주위 경관이 아름다워, 미인의 가볍고 우아한 걸음걸이를 의미하는 ‘능파(凌波)’라 이름했다. 이 다리를 건너면 세속의 번뇌를 던져버리고 부처님의 세계로 진입함을 상징한다.


통일신라 문성왕 12년(850)에 혜철선사가 처음 지었고, 고려 태조 24년(941) 광자대사가 수리했다고 한다. 그 뒤 파손되었던 것을 조선 영조 43년(1767)에 다시 지었다. 다리를 건너는 쪽에서 보았을 때 앞면 1칸.옆면 3칸의 규모이고, 지붕 옆면이 사람 인(人)자 모양인 간결한 맞배지붕이다. 



계곡의 양쪽에 바위를 이용해 돌축대를 쌓고 그 위에 두 개의 큰 통나무를 받쳐 건물을 세웠다. 지붕을 받치면서 장식을 겸하는 공포가 기둥 위에만 배치하는 주심포 양식이고, 위로 갈수록 좁아지는 민흘림 기둥을 사용했다. 여러 가지 동물상을 조각한 목재를 사용했고, 다리와 문.누각의 역할을 함께 하도록 지은 특이한 건물이다.


동리산파의 개산조인 혜철은 남달리 풍수적 안목을 갖고 있었다고 전해지는데, “수많은 봉우리, 맑은 물줄기가 그윽하고 깊으며 길은 멀리 아득하여 세속의 무리들이 오는 경우가 드물어 승려들이 머물기에 고요하다. 용이 깃들고 독충과 뱀이 없고, 여름에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한(적인선사 부도비의 내용 중에서)” 동리산에 직접 자리잡은 태안사이니 풍수와 주변 경치에 대해서는 더 말할 나위가 없겠다.


# 일주문



태안사 입구에 있는 일주문(속세와 불계의 경계 역할을 하는 의식적인 상징물)으로, 능파각에서 약 200m쯤 지나 높직한 돌계단에 올라서 있다. 조선 숙종 9년(1683) 각현선사가 다시 지은 후, 1917년과 1980년에 보수했다.


태안사 일주문은 위로 갈수록 좁아지는 두 개의 굵은 기둥 위에 앞면 1칸의 규모로 세웠고, 지붕 옆면이 사람 인(人)자 모양인 단순한 맞배지붕이다. 기둥에는 양쪽 모두 앞뒤로 보조기둥을 세웠다. 처마를 받치면서 장식을 겸하는 공포가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 있는 다포식이다. 


앞.뒷면의 기둥 사이에는 3구씩, 옆면에는 1구씩 공포를 배치해 전후좌우가 포로 꽉찬 느낌이 들며, 매우 화려하다. 일주문 내부의 천장 아래에는 용의 머리를 조각해 생동감을 더하고 있다. 앞면에는 ‘동리산태안사 (桐裏山泰安寺)’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 부도발 



능파각에서 약 200m 되는 긴 돌계단으로 이어지는 오솔길을 따라가 화려한 다포집인 일주문을 들어서면 오른쪽으로 부도밭이 보인다. 태안사를 중창해 크게 빛낸 광자대사 윤다의 부도(보물 제274호)와 부도비(보물 제275호)를 비롯해 석종형 부도 3기, 팔각원당형 부도 2기가 서 있다.


# 삼층석탑


태안사 내 연못 중앙에 마련된 작은 터에 자리하고 있는 탑으로, 절 내의 광자대사 부도 앞에 있던 것을 이곳으로 옮겨 놓았다. 원래는 기단(基壇)의 한쪽 면과 탑신(塔身)의 1층 지붕돌, 2.3층 몸돌이 없어진 상태였다. 



이곳으로 옮기면서 새로이 보충해, 2층 기단에 3층의 탑신을 갖추고 있다.기단 아래로는 탑을 옮길 때 마련해 둔 3단의 받침이 놓여 있어 전체적으로 높다란 풍채를 보인다. 기단은 각 층마다 면의 모서리와 가운데에 기둥 모양을 새겨 뒀고, 윗면에 3단의 얕은 층을 내어 윗돌을 괴고 있다. 


탑신의 지붕돌은 밑면에 4단씩의 받침을 뒀고, 처마는 네 귀퉁이에서 살짝 위로 들려 있다. 꼭대기에 놓인 머리장식은 낮은 장식받침을 제외하고는 모두 새로이 만들어 올려놓은 것들이다. 비록 일부가 없어져 훗날 보충해 놓은 것이긴 하나 전체적으로 고른 균형과 안정감이 느껴진다. 기단과 지붕돌의 조각양식으로 보아 고려시대 전기에 세운 것으로 추측된다.



한편, 연못 옆쪽에 한국전쟁 때 희생된 전투경찰의 넋을 기리는 충혼탑이 세워져 있어, 이곳 깊은 산속의 이 절도 전쟁을 피해가지 못했음을 새삼 상기하게 된다.


적인선사 혜철의 부도(보물 제273호)와 부도비는 한국전쟁 뒤 다시 지은 대웅전 건물 뒤쪽의 높은 터에 자리잡고 있다. 그 외에 태안사에 전해지고 있는 유물로는 바라와 동종이 주목할 만하다.


# 태안사 바라


청동 대바라/사진출처-문화재청 태안사에 있는 바라는 솥뚜껑 모양의 타악기로 두 짝으로 돼 있는데, 지름이 92㎝, 둘레가 3m 규모로 국내에서는 가장 크다. 바라는 승가(僧家)에서 종교적으로 사용되거나 무구(舞具)로써 쓰이는 물건으로, 악사가 무자(舞者). 여기(女妓).집박악사(執拍樂師).악공(樂工) 등을 인도할 때도 사용됐다. 특히 절에서 쓰는 것을 ‘동발’이라고 한다. 


이 바라는 너무 커서 한 사람이 두 손으로 들고 치기는 어려운데, 어떤 방식으로 사용됐는지 알려지지 않고 있다. 효령대군이 세종과 왕비, 왕세자 등의 수복(壽福)을 빌려고 제작한 것으로, 보물 제956호로 지정돼 있다. 태안사는 효령대군의 원당 사찰이기도 했다.


# 태안사 동종



신라에서 고려시대로 이어지는 한국종의 독창적인 조형양식을 계승하고 있는 이 동종은 조선 전기 동종양식의 과도기적 상황 속에서, 전통양식의 계승과 새로운 양식의 접목을 보여준다. 태안사 대웅전 안에 놓인 이 동종은 지금도 맑은 소리를 울리면서 조석예불을 알리고 있으며 조선 전기 억불정책으로 불교가 많은 탄압을 받던 시기에 왕실의 도움 없이 사찰 불사의 일환으로 조성된 범종이다. 재질은 청동이다.


천판에는 음통과 한 마리 용을 새긴 용뉴가 있고 입상대를 갖춘 고려 후기 종 형식에 조선 종 특유의 문양들로 표면을 장식했다. Ω모양으로 구부러진 용은 사실적이면서 활기찬 모습이며 두발에 서린 염익(焰翼)은 보상화무늬로 꾸며진 음통을 감싸고 있다. 연꽃잎무늬로 감싼 상대 아래에는 새로이 옴 자로 된 원형범자가 덧붙여 있고, 연곽은 상대에서 떨어져 종복 위에 자리하고 있다. 


태안사 동종/사진출처-문화재청 연곽은 당초무늬로 장식하고 안에는 연꽃받침에 연꽃봉오리가 맺혀 볼록하게 솟아 있다. 보살상이 없고 대신 하단에 4좌의 작은 당좌가 있다. 저부조의 당좌는 가운데에 8엽의 연꽃무늬를 살짝 도드라지게 하고, 주변에 파도무늬를 바람개비처럼 돌아가게 처리한 다음 구슬무늬로 테두리를 마무리했다. 하대는 종구에서 13㎝정도 올라온 부분에 돌출한 횡대를 두고 그 사이로 꽃잎에 살짝 빗금을 친 보상화당초무늬로 장식했다.


종 몸체 3곳에 새겨진 명문에 의하면, 조선 세조 3년(天順元年, 1457)에 이 종을 처음 주조했으나 파손돼 선조 14년(萬曆9年, 1581)에 다시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다.


# 광자대사 부도


광잗개사 부도/사진출처-문화재청 광자대사 윤다는 8세에 집을 떠나 이곳저곳 헤매다가 15세에 태안사에서 선을 수행하고, 한동안 태안사를 떠났다가 다시 되돌아와서 33세에 주지를 맡아 뛰어난 법력을 보여 많은 선승을 이끌었다. 


후삼국이 다투던 당시 윤다는 효공왕으로부터 기울어가는 신라를 보우해줄 것을 부탁받았으나, 효공왕이 아닌 왕건의 요청을 받아들여, 이후 고려왕조의 지원하에 절을 크게 일으켰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기단부 하대석 상·하단의 복련문과 운룡문/사진출처-문화재청 부도는 고려 혜종 2년(945) 82세의 나이로 윤다가 입적한 뒤 고려 광종 원년(950)에 세워졌고, 2.8m 높이의 팔각원당형이다. 팔각의 지대석 위에 여러 층단의 하대석이 어슷하게 놓여 있고, 그 위의 복련으로 된 갑석 위에 얕고 잘록한 중대석이 얹혀 있는데 각 면에는 안상이 하나씩 조각돼 있다. 상대석은 꽃잎 안에 다시 꽃무늬가 있는 앙련이고, 그 위에 한 면에 한 쌍씩의 안상이 있는 난간형의 몸돌받침이 있다.


상륜부에 노반.앙화.복발.보륜.보개.보주가 차례대로 온전히 남아 있는 고려 초의 부도이다. 팔각의 몸돌 각 면은 네모난 둘레를 마련하고 그 안에 각종 조각을 장식했는데, 앞뒷면에 문비형, 그 좌우에 사천왕상, 나머지 남은 두 면에 가마를 조각했다.


곡성 태안사 광자대사탑비/사진출처-문화재청지붕돌은 목조건물의 지붕양식을 쏙 빼닮았다. 서까래와 부연, 기와까지 세밀하게 조각돼 있다. 상륜부에는 노반.앙화.복발.보륜.보개.보주가 차례대로 온전히 남아 있다.


전체적으로 하대석이 넓어 안정감이 있고, 지붕돌의 처마끝이 짧고 경쾌하게 반전돼 있다. 조각은 대체적으로 평면적이나 장식화돼 있다.


# 부도비 이수에 새겨진 가릉빈가


통통하게 살찐 새가 날개를 활짝 펴 힘차게 날아 오르려는 모습을 돋을새김으로 조각했다. 그런데 누가 그랬는지 새의 머리가 떨어져 나가 없어졌다. 그런데 이 이수는 혜철의 부도비의 이수와 뒤바뀐 상태이다. 왜 뒤바뀌었는지 연유는 알 수 없다. 


부도비 이수에 새겨진 가릉빈가/사진출처-문화재청 광자대사 부도와 부도비가 본래 있었던 자리는 경내 왼편 끝에 있는 화장실 뒤쪽 산속이다. 부도밭에 있는 다른 부도들의 주인은 알 수 없지만, 각기 제 멋을 자랑하면서 서 있다.


태안사에서 가장 주목받고 있는 적인선사 혜철의 지위를 말해주듯 혜철의 부도와 부도비는 절의 가장 높은 터에 자리잡고 있다. 이 유물들은 굽은 통나무를 아치형으로 배치한 꽤 운치 있는 배알문으로 들어서게 돼 있는데, 유물을 향해 자연스레 머리를 조아리고 들어오도록 낮게 만들어졌다.


# 배알문


굽은 통나무를 아치형으로 배치한 운치있는 작은 문으로, 혜철스님의 부도로 들어설 때 머리를 숙이고 들어가도록 낮게 만들었다. 혜철은 15세 때 출가하여 영주 부석사에서 화엄경을 공부하고 30세에 당나라로 가서 남종선 계통의 지장선사에게서 공부했다. 



지장선사의 법통을 전수받은 제자는 모두 넷인데, 그 가운데 셋이 신라인으로 도의와 실상산문의 개창자 홍척 그리고 혜철이다. 혜철은 55세에 귀국해 쌍봉사에서 9년간 물렀는데, 63세에 동리산문을 열고 선풍을 펴다가 나이 77세인 경문왕 1년(861) 입적했다. 풍수도참설로 유명한 도선도 그의 수많은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이다.


부도는 전체 높이가 3.1m에 달하는 팔각원당형으로, 적인선사조륜청정탑(寂忍禪師照輪淸淨塔)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다. 꽤 어려운 이름인 듯 보이지만, 간단히 풀어내면 혜철의 시호가 적인선사, 부도가 세워질 때 하사받은 이름은 조륜청정이다. 다만 세워진 연대는 불명확하여 혜철이 입적한 해인 861년 또는 혜철의 부도비가 건립된 해인 872년으로 추정하고 있다.


# 곡성 태안사 적인선사탑



이 탑은 승려 적인선사 혜철의 탑으로, 혜철 스님의 사리를 모시고 있다. 대안사는 신라시대 선(禪)을 가르치는 유명한 종파인 구산선문 가운데 하나로 이름이 높으며, 적인선사 혜철(惠哲)은 대안사가 속한 동이산파를 연 스님이다.이 탑은 전체적인 형태가 모두 8각형으로 이루어져 통일신라시대 탑의 전형적인 모습을 하고 있으며, 3단의 기단(基壇)위로 탑신(塔身)과 머리장식을 올리고 있다. 


기단은 아래.가운데.윗받침돌로 나눠진다. 아래받침돌은 위가 좁고 아래가 넓은 사다리꼴 모양을 하고 있으며 면마다 사자상을 조각해 놓았다. 가운데받침돌은 그 높이가 매우 낮고, 면마다 가늘고 길게 안상(眼象)을 조각했다. 윗받침돌은 옆면에 솟은 연꽃무늬를 새겼다. 탑몸돌은 낮은 편이지만 온화한 기품을 지니고 있으며, 앞.뒷면에 문짝 모양을 새겼다. 그 옆면에 다시 불법을 지키는 수호신인 사천왕상(四天王像)을 조각했다.


곡성 태안사 적인선사탑-옥개석/사진출처-문화재청 지붕돌은 넓은 편으로 밑면에는 서까래를, 윗면에는 기왓골과 막새기와까지 표현해 목조건축의 지붕양식을 사실적으로 나타냈다. 추녀의 곡선은 완만하고, 각 귀퉁이는 급하게 치켜올려진 상태이다.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으로 앙화(仰花:솟은 연꽃모양의 장식), 복발(覆鉢:엎어놓은 그릇모양의 장식), 보륜(寶輪:바퀴모양의 장식), 보주(寶珠:연꽃봉오리모양의 장식) 등이 차례로 잘 남아있다. 


이러한 머리장식들은 기단과 탑신의 화려한 조각들과 어울려 탑을 전체적으로 장엄하게 보이도록 한다. 탑의 전체적인 형태는 무겁지만 너그러운 품위를 지녔고, 각 부분의 조각은 매우 자세하게 새겨져있어 사실적인 아름다움을 보이고 있다. 


통일신라 후기에 이르러 양식상 석탑을 비롯해 돌로 만든 조형물들이 조형적인 아름다움을 잃어가는 것이 하나의 경향인데, 이 탑은 매우 뛰어난 조형성을 갖추고 있다. 탑 옆의 비문을 보면, 적인선사는 신라 원성왕 1년(785)에 태어나 경문왕 1년(861)에 입적했다. 따라서, 이 탑도 적인선사가 돌아가신 861년에 만들어진 것으로 짐작된다./사진-윤정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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