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메일전송
임청각에 서린 민족정기 받으며 석주 이상룡의 시대정신 만나보자
  • 박광준 기자
  • 등록 2022-11-01 22:45:37
  • 수정 2023-12-21 14:58:25

기사수정
  • 보물 제182호 국가보훈처 지정 현충시설 임청각

임청각 전경/자료사진[박광준 기자] ‘동쪽 언덕에 올라 길게 휘파람 불고 맑은 시냇가에서 시를 짓는다’는 도연명의 ‘귀거래사’ 시구를 빌려 그 이름을 지은 임청각은 조선시대 민간 가옥 중 가장 큰 규모의 양반가 주택으로 500년의 역사를 간직한 국가보훈처 지정 현충시설이다. 


임청각은 사당과 별장형 정자인 군자정, 그리고 본채인 안채, 중채, 사랑채, 행랑채가 영산강과 낙동강의 아름다운 자연과 조화롭게 배치돼 있는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주택이다. 


공사중인 임청각 전경일제강점기 중앙선 철도 부설로 99칸 건물 중 부속건물이 철거돼 현재는 60여 칸만 남아있다. 


임청각은 1519년(중종 14)에 낙향한 이명이 지었고, 1767년 봄에 하주 이종익(1726-1773)이 고쳐 지었다. 또한 이 곳은 석주 이상룡 선생을 비롯한 선생의 동생 이상동.이봉희, 아들 이준형, 조카 이형국.이운형.이광민, 손자 이병화, 손부 허은, 당숙 이승화까지 11명의 독립운동가가 건국훈장을 받은 역사의 현장이다. 


# 만주에서 순국한 이상룡

-일제 치하에서 살기를 죽음으로 거부했던 아버지와 아들 



“삭풍은 칼보다 날카로워 나의 살을 에이는데, 살은 꺾이어도 오히려 참을 수 있고 창자는 끊어져도 차라리 슬프지 않다. 그러나 이미 내 저택을 빼앗고 또다시 나의 처자를 해치려 하니 내 머리는 자를 수 있겠지만 무릎 꿇어 종이 되게는 할 수는 없다”면서 만주로 건너가 한인동맹을 이끌어내고 신흘무관학교를 세워 독립투사들을 키우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을 맡아 독립운동의 최전선에서 싸우다 1932년 만주 당에서 순국하면서 그가 남긴 것은 “독립이 되기 전에는 나의 시신을 고국에 가져가지 말라!”는 유언이었다. 


-이상룔 순국 후 귀국한 아들 이준형의 자결


이상룡의 유고를 안고 귀국한 이준형은 십여 년간 일제의 끈질긴 고문.협박과 동시에 변절의 요구를 받자, 1942년 아버지 석주 이상룡의 문집인 ‘석주유고’ 정리를 마치고 “일제 치하에서 하루를 더 산다는 것은 하루의 치욕을 더 보탤 분이다”라는 유서를 아들 병화에게 남기고 자결했다. 



이상룡(李相龍:1858-1932.)은 독립운동가. 본관은 고성(固城). 아버지 승목(承穆)과 어머니 권씨 사이에서 태어난 3남 3녀 중의 맏아들이고, 김흥락(金興洛)의 문인. 초명은 상의(象義), 자는 만초(萬初), 호는 석주(石洲). 1911년 서간도(西間島)로 간 후 계원(啓元)으로, 이어서 상룡(相龍)으로 개명했다.


1896년 박경종(朴慶鍾)과 함께 가야산에 군사진지를 구축하고 의병항전을 시도했고 안동의 의병장인 외삼촌 권세연(權世淵)을 지원하기도 했다. 1907년 유인식(柳寅植).김동삼(金東三) 등과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해 1907년 협동학교(協東學校)를 설립했다. 1911년 2월 서간도 회인현 항도천에 도착, 심택진의 집에서 김대락(金大洛) 등과 약 2개월간 머무르면서 한만관계사를 연구하고 집필했다.



1911년 4월 봉천성 유하현(柳河縣)으로 이동. 항일민족독립운동의 방략과 진로를 천명하고 이를 추진키 위한 경학사(耕學社)설립취지서를 발표하고, 이동녕(李東寧).이시영(李始榮).이회영(李會榮).김대락 등에 의해 경학사장에 추대. 1919년 3.1운동 뒤 한족회를 바탕으로 군정부가 조직되자 총재로 추대됐고, 5월에는 신흥강습소(新興講習所)를 신흥무관학교로 개칭해 독립운동 간부를 양성. 상해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자 11월 군정부를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로 개칭했다. 


1922년 8월 환인현 마권자에서 남만한족통일회를 개최해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를 수립하고, 그 산하에 의용군을 조직. 1924년 10월 정의부가 발족되자 독판(督辦)에 선출됐고, 1925년 9월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령(國務領)에 취임. 1932년 5월 병으로 길림성 서란(舒蘭) 소성자(小城子)에서 사망. 1962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됐다. 


# 조상의 위패가 없는 사당



이상룡이 독립운동을 위해 떠나면서 “나라를 되찾지 못하면 가문도 의미가 없다.”고 조상의 신주를 땅에 파묻어 현재 사당에는 봉인된 신위가 없다. 임청각처럼 유서깊은 종가의 종손으로서 상상할 수 없는 결단이었다. 


# 정승이 태어난다는 우물방


천지의 기운이 모인다는 우물방에는 여러 명의 정승이 난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루물방은 진응수가 나는 용천이 바로 땅 밑에서 솟는다고 하여 불리는 이름이다. 살제로 석주 이상룡을 비롯한 많은 독립운동가가 이 방에서 출생했다. 



또 임청각의 평면도를 동쪽으로 보면 用자형으로 이뤄졌다. 이는 일(日)자와 월(月)자를 하나로 합한 것으로 하늘의 해와 달을 지상에서 불러 천지의 화합된 정기를 받고자 하는 기원이 담겨 있다. 집의 좋은 기운이 이들의 출생과도 무관치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 수많은 독립열사들이 묵은 군자정


군자정(君子亭)은 임청각의 사랑채로서 별당형식의 정자 건물로, 평면이 丁자를 옆으로 누인 형태이다. 동쪽으로 정방형 4칸 누마루가 있고, 서쪽으로는 정면 1칸짜리 방 네 개가 남북으로 길게 이어졌다. 앞쪽으로 연이은 두 개의 방 뒤에는 마루 1칸을, 다시 뒤에 방 1칸을 들였다. 방과 대청 주위에는 툇마루를 놓고 계자난간을 둘렀다. 정자 동쪽에 네모난 작은 연못이 있다.







수많은 독립열사들과 시인 묵객들이 묵어간 군자정은, 조선중기인 1519년에 형조좌랑 이명이 건립한 양반주택의 별당형 정자로, 건물의 둘레에 쪽마루를 들러서 난간을 세웠다. 동쪽으로 정방형 4칸 누마루가 있고, 서쪽으로는 정면 1칸짜리 방 네 개가 남북으로 길게 이어졌다. 앞쪽으로 연이은 두 개의 방 뒤에는 마루 1칸을, 다시 뒤에 방 1칸을 들였다. 방과 대청 주위에는 툇마루를 놓고 계자난간을 둘렀다. 출입구는 서쪽에 내당으로 통하는 주인이 주로 이용하는 돌층계와, 남쪽에 반객들이 드나드는 돌층계를 별도로 구분해 만들었다. 정자 동쪽에 네모난 작은 연못이 있다. 




이 군자정에서 호연지기를 키우면서 성장한 석주 이상룡은 나라를 구하겠다는 큰 뜻을 품고 모든 재산을 팔아 일가를 이끌고 만주로 망명한 후 독립운동에 전 생애를 바쳤다.. 


임청각의 바로 옆인 칠층전탑 뒤에도 기와집이 있다. 17세기 후반에 지은 고성 이씨 소종가이다. 중요민속자료로 지정된 이 집은 영남산 동쪽 기슭의 좁은 계류를 이용해 넓은 대지에 안채와 사랑채, 별당채 등을 독립적으로 둔 저택이다. 현재 임청각은 공사 중으로, 2025년에 완공할 예정이다./사진-박광준 기자

0
  • 목록 바로가기
  • 인쇄


 한국의 전통사찰더보기
 박정기의 공연산책더보기
 조선왕릉 이어보기더보기
 한국의 서원더보기
 전시더보기
 한국의 향교더보기
 문화재단소식더보기
리스트페이지_004
모바일 버전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