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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특한 구조.수법과 전통양식 보존된 '고성이씨 탑동파 종택'
  • 박광준 기자
  • 등록 2022-11-01 12:07:30
  • 수정 2023-12-21 14:5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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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광준 기자] 고성이씨 탑동파 종택은 이황을 시조로 하고 이증을 입향조로 하는 경상북도 안동시 세거 성씨이다. 


안동에 살고 있는 고성이씨(固城李氏)는 입향조 이증을 파조로 하는 참판공파(參判公派)의 일부로 안동시 정상동과 법흥동 일원에 세거하면서 많은 인물을 배출한 안동의 대표적 명문 사족중 하나이다.


중국 한나라 무제 때 군사를 이끌고 우리나라에 왔다가 눌러 살게 된 이반(李槃)의 24세손 이황(李璜)이 고려 덕종 초에 문과에 급제해 밀직부사를 거쳐 1033년 거란이 침입했을 때 세운 공으로 이부상서에 올라 철령군(鐵嶺君: 철령은 철성(鐵城), 곧 현 고성의 별호)에 봉해졌기 때문에 후손들이 이황을 시조로 하고 본관을 고성(또는 철성)으로 쓴다.



고성이씨가 안동에 정착하게 된 것은 1453년 진사시에 합격해 영산현감을 지내고 이조참판에 증직된 이증(李增)이 벼슬을 그만둔 후 안동 산수의 아름다움에 반해 안동부 부성 남문밖에 우거하면서부터였다고 한다.


세종 때 좌의정을 지낸 이원(李原, 1368~1429)의 여섯째 아들인 이증은 아들 6형제를 뒀다. 둘째 이굉(李浤, 1441~1516)이 문과에 급제한 것을 비롯해 6형제 모두 생원진사시에 합격했다. 평택현감을 지낸 장자 이평(李泙)의 아들 5형제는 맏아들 이윤(李胤), 둘째 이주(李冑), 다섯째 이려(李膂)가 문과에 급제했고 셋째 이전은 진사시에 합격해 출사하고 넷째 이육도 안기도찰방에 나가는 등 크게 영달했다.


그러나 무오사화에 이윤이 화를 입고 갑자사화 때 이주가 사사되니 남은 자손과 형제들이 영천, 군위, 청도, 합천 등지로 이거하고 현재 안동에 거주하는 고성이씨는 이증의 아들 중 개성유수를 지내고 고향에 돌아와 귀래정(歸來亭)을 지은 이굉(李浤)과 형조정랑을 지내고 임청각(臨淸閣)을 지은 이명(李洺) 형제 후손들의 일부이다.



이들도 인조반정 후 이괄(李适)의 난에 일족으로 연좌돼 오랫동안 출사의 길이 막혔다가 이명의 8세손 이후영(李後榮)이 숙종 때인 1684년 문과에 급제하여 고성군수를 지낸 것을 시작으로 9세손 이시항(李時沆), 12세손 이주정(李周楨)이 문과에 급제해 벼슬길에 나가고 생원 진사도 17명을 배출했고 그 밖에 학행으로 유명한 이도 많다.


이후영의 현손 이종학(李宗岳, 1726~1773)은 과거에 나가지 않고 학문과 예술로 인생을 달관한 강호처사였는데 시 180여 편을 포함하여 많은 작품을 남겼다. 유작 중에 특히 1763년에 그린 ‘허주부군산수유첩(虛舟府君山水遺帖)’ 12폭 화첩은 한국회화사의 귀중한 자료일 뿐 아니라 임청각에서 도연에 이르는 반변천(半邊川) 주변의 12경승을 선유하면서 그린 실경 산수화로 지금은 임하댐 물속에 잠긴 반변천 주변의 250여 년 전 풍광을 알 수 있는 역사 자료이기도 하다.


근세 격동기를 거치면서 상해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을 지낸 석주(石洲) 이상룡(李相龍, 1858~1932)과 동구(東邱) 이준형(李濬衡) 부자를 비롯해 10여 명의 독립유공자를 배출했다.



안동시 법흥동 영남산(嶺南山)의 동쪽 기슭에 작은 계류를 끼고 있는 넓은 대지에 위치하고 있다. 뒤꼍의 숲이 우거진 야산과 북정 앞을 흐르는 계류 등의 자연환경을 잘 살려서 주택을 배치했다. 또한, 연못과 화단 등을 곁들여 조화를 도모함으로써 도시에서 멀리 떨어진 한적한 산간저택의 분위기를 보여주고 있다.


잡석으로 축대를 높이 쌓은 위에 지어진 안채의 중문간을 들어서면 방형의 안마당에 이르게 되고, 안채 정면에는 마당 쪽을 향해 4칸 대청이 자리 잡고 있다. 대청의 오른쪽에는 골방과 안방이 모두 4칸 길이로 마당 쪽으로 길게 내밀었고, 그 앞에 부엌 2칸을 더 달아내어 앞채에 관입(貫入)됐다.


부엌의 끝칸 오른쪽으로 앞채를 2칸 연장해 돌출시켜 봉당과 부엌방을 설치했다. 이것과 대칭으로 안방 윗머리의 골방 오른쪽에 마루방(현재는 부엌으로 개조해 사용함)과 동녘방을 돌출시켰다. 이 양끝을 토담으로 연결하고 사주문(四柱門)을 세워서 뒤꼍 마당과 구분해 장방형의 내밀(內密)한 마당을 만들고 한 구석에 장독대를 설치했다.



대청의 왼쪽에는 2칸통(間通)으로 방을 배치하고 그 앞에 마당 쪽으로 3칸을 누(樓)집으로 뻗어내어서 누하는 통내간(通來間)과 헛간 2칸을 뒀고, 누상에는 긴 마루방을 꾸며 고방(庫房)으로 사용케 했다. 중문간의 왼쪽에는 방과 부엌 1칸씩과 고방 2칸이 배치돼 있다. 지금은 저장고로 쓰이고 있다.


사랑채는 2칸 크기의 마루방과 온돌방 2칸이 마주 합한 4칸 집으로, 마루방을 중심으로 3면에 동마루를 돌리고 계자각(鷄子脚: 풀무늬를 새긴 가는 기둥)을 설치했다. 마루방에는 ‘정우재(淨友齋)’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대청은 앞에 방형의 넓은 연못이 있는 별당 건물이다. 그 왼쪽에는 정면.측면 각 2칸의 큰 마루방이 꾸며져 있고, 오른쪽에는 정면 1칸에 칸반 길이의 온돌방과 그 뒤쪽에 반칸 골방으로 구성돼 있다. 우물마루를 깐 마루방에 ‘영모당(永慕堂)’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고, 전면.측면과 뒷면에는 동마루를 놓아서 내.외부 공간을 자연스럽게 연결했다.




북정은 서쪽에 흐르는 계류를 향해 서향으로 배치했다. 그 평면구성은 온돌방 2칸과 마루방 1칸이 一자로 배열됐고 중앙에서 계류 쪽으로 누마루 1칸을 돌출시켰다. 누마루의 삼면에는 헌함(軒檻: 좁은 마루)을 돌렸는데 양측칸 앞의 쪽마루에까지 난간이 이어졌다.


집의 구조를 살펴보면, 안채 대청은 자연석 초석 위에 네모진 기둥을 세우고 우물마루를 깔았고 상부 가구는 5량가(五樑架)로 동자주(童子柱)와 대공(臺工)을 세웠다. 대청 뒷벽의 각 칸에는 중앙에 두 짝 열개널문을 냈고, 문틀의 중앙에 중간설주가 각각 서 있다.


사랑채 마루방의 상부 가구는 5량가인데, 충여 위에 첨차(檐遮)와 초각(草刻)된 대공을 놓아 외기(外機)를 올려놓았고 중도리 높이에서 우물반자로 처리했다. 정면의 마루방과 온돌방의 살문에 중간설주가 서 있다.



대청의 상부 가구는 5량가로 종보 위에는 사다리꼴 판대공(板臺工)을 세워놓았다. 방과 마루방에는 문턱이 높은 두 짝 열개문을 설치하고 중간설주를 세웠다. 특히 마루방에는 큰 범살문을 달아 절간문처럼 외부로 들면서 열 수 있도록 설치했다. 


이 집은 조선 중기의 주택으로 주변의 자연환경과 건물을 교묘하게 조화시키면서 사대부저택의 요소를 고루 갖추고 있을 뿐만 아니라, 독특한 구조 및 수법과 전통양식이 보존돼 있는 유구로 전통주택연구의 중요한 자료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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