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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전통사찰 49] 호남권을 대표하는 사찰 '백양사(2)'
  • 박광준 기자
  • 등록 2022-10-30 16:57:51
  • 수정 2024-04-02 03:4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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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호에 이어


[박광준 기자] # 장성 백양사 백학봉


명승 제378호 장성 백양사 백학봉은 백암산 아래에 자리한 백양사와 백학봉 일대의 암벽과 식생 경관이 아름다워 2008년에 명승 제38호로 지정됐고, 예로부터 대한 8경의 하나로, 꼽혀왔을 만큼 이름난 곳이다. 전라남도와 전라북도의 경계를 이루고 있는 백암산은 내장산국립공원에 포함된 산으로서, 이 산에서 뻗은 능선이 백학봉까지 이어진다. 


백양사는 대한불교조계종의 제18교구 본사로 원오국사(圓悟國師, 1215∼1286)와 각진국사(覺眞國師, 1270∼1355) 등 고승들이 머물렀던 유래가 깊은 사찰이다. 백암산은 내장산과 함께 단풍으로 특히 유명하다. 



장성 백양사 비자나무 숲(천연기념물 제 153호)을 비롯해 장성 백양사 고불매(천연기념물 제486호)와 함께 1,500여 종의 온갖 동식물이 서식하고 있다. 백학봉의 아름다운 자태는 백양사 쌍계루와 대웅전에서 볼 수 있다.


장성군 백암산에 위치한 백양사와 백학봉 일대는 백양사의 대웅전과 쌍계루에서 바라보는 백학봉 암벽과 숲 경관이 매우 아름다워 예로부터 ‘대한 8경’으로 손꼽혀왔다. 백암산은 내장산과 함께 단풍이 특히 유명하고, 천연기념물 ‘장성 백양사 비자나무 숲’을 비롯해 1,500여종의 다양하고 풍요로운 동식물이 서식하고 있다. 


백양사의 창건유래가 담긴 정도전의 ‘정토사교루기’와, 이색, 정몽주, 김인후, 박순, 송순 등 유명인들이 탐방하고 백학봉과 쌍계루의 풍광을 읊은 시와 기문를 볼 때 이 곳은 예로부터 자연경관으로 유명한 명승이다. 특히, 지금도 백양사 대웅전 기와지붕과 어우러지는 백학봉, 연못에 비치는 쌍계루와 백학봉의 자태는 탄성이 절로 나올 정도이고 많은 사진작가들이 찾고 있다.


# 백양사 대웅전



백양사 대웅전은 1917년 만암 대종사가 백양사를 5중창할 당시 건립됐다.


이 건물은 역사가 오래되지는 않았으나 전통 건축 형태를 잘 간직하고 있다. 건물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대형 법당이고, 겹처마에 단층 팔작지붕을 얹은 다포집이다. 기단은 장대석을 2단으로 쌓아 조성했고, 초석은 자연석이다. 기둥은 민흘림이고, 공포는 내 3출목, 외 2출목으로 구성됐다. 건물 내부에는 우물마루와 우물천장을 설치했고, 퇴칸에는 용 모양의 퇴량을 걸쳤다. 지붕 네 모서리에는 활주가 설치됐다. 



한편 창호는 전면에 4분합 빗살문을 달았고, 측면과 후면 어칸에는 2분합 띠살문을 달았다. 건물 내에는 석가모니와 문수.보현 삼존이 봉안돼 있다. 이 건물은 일제강점기 초기에 건립돼, 조선후기 다포 양식이 퇴화되는 모습을 엿볼 수 있다.


특히 첨차살미의 최상단은 예리한 삼각형 모양에서 익공계로 변화했고, 쇠서도 매우 섬약해지고 있다. 이러한 특징은 조선후기 사찰 건물들에서 나타나는 공통된 경향으로서, 전면 기둥 간격이 모두 같은 것은 이 건물의 특징이라 할 수 있다.


# 장성 백양사 극락보전



백암사는 백제 무왕 33년(632) 여환이 세웠다고 한다. 시대를 거치면서 여러 차례 고쳐 지었다. 지금의 절은 1917년 송만암이 고쳐 세운 것이다. 극락보전은 조선 선조 7년(1574)에 한응선사가 지었다는 기록이 있으나 확실히 알 수는 없다. 다만 ‘조선사찰사료’를 보면 건물을 지을 때 조선 중종(재위 1506∼1544)의 비인 문정왕후가 참여했음을 알 수 있다.


앞면 3칸.옆면 4칸 규모로, 지붕 옆면이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집이다. 지붕을 받치면서 장식을 겸하는 공포는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양식이다. 건물 내부에는 담담한 기법으로 처리한 단색벽화가 있다. 백양사 극락보전은 경내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로, 맞배지붕을 가진 건물에서 잘 사용하지 않는 다포양식으로 절충해 지은 점이 특이하다.


# 백양사 사천왕문



백암산에 위치한 백양사는 백제 무왕 33년(632) 여환이 처음 지은 절로, 이후 여러 차례 다시 지어지기도 하고 이름이 바뀌기도 하였는데, 지금의 백양사라는 이름은 조선 선조 7년(1574) 환양이 절을 다시 지은 이후부터이다. 


환양이 절에 있으면서 매일 '법화경'을 읽을 때 흰 양이 경 읽는 소리를 듣고 몰려오는 일이 많아지자 절 이름을 백양사로 고쳤다 한다. 백양사의 정문인 사천왕문은 1917년 송만암에 의해 절이 크게 다시 지어질 때 5년에 걸쳐 지어졌다. 


앞면 5칸.옆면 2칸 규모의 건물로, 지붕 옆면이 사람 인(人)자 모양의 맞배지붕집이다. 가운데 칸은 문으로 사용하고, 문의 양 옆칸에는 사천왕상이 모셔져 있다. 사천왕은 불국토의 사방을 보호하면서 국가를 수호하는 신을 말한다. 문의 오른쪽에는 지국천왕과 증장천왕, 왼쪽에는 광목천왕과 다문천왕이 모셔져 있다.


# 쌍계루



쌍계루는 1351년 각진국사가 처음으로 창건했다.


이때 누각 명칭은 '橋樓'라 했으나, 이후 1370년 청수스님이 중창하면서 圃隱 鄭夢周에게 기문을 부탁해 ‘두 계곡이 만나는 곳에 있는 누각’이라는 의미로 '雙溪樓'라 했다. 쌍계루는 조선 전 시기에 걸쳐 백암산 내 명소로 자리매김했고, 유.불교를 막론하고 많은 문인들이 이곳을 찾아 시를 짓거나 글을 남겼다. 


쌍계루 내 현판에 적힌 많은 시문들은 조선시대 이 누각의 명성을 입증하는 것이다. 특히 쌍계루에 관해 포은 정몽주 이외에도 목은 이색, 삼봉 정도전이 기문을 남겼고, 면앙정 송순, 노사 기정진, 최익현, 서옹스님 등이 남긴 시문이 현판으로 전했다.


쌍계루는 여러 차례에 걸친 사찰 중건 시 중수를 거듭했고, 1950년 6.25 전쟁으로 백양사가 피해를 입었을 때 함께 소실됐다. 현재의 쌍계루는 1986년에 건립된 것이다.


# 칠성각 



백양사(白楊寺)의 창건에 대해 명확히 알려진 바는 없으나, 1960년대에 편찬된 '한국사찰전서'에 의하면, 932년 백양(白楊)조사가 창건한 후 임진왜란 때 소실됐고, 1678년 연정(衍淨) 선사가 중창했고, 1753년 설인(雪人)선가가 다시 중창했다고 전한다. 이후 조선후기까지 이어지다가 구한말과 일제강점기에 접어들면서 사세(寺勢)가 약화돼 퇴락했으나, '차사중창주비구니보현대공덕비(此寺重刱主比丘尼普賢大功德碑)'의 기록에 의하면, 1922년 비구니 승려 보현에 의해 백양사가 중건됐고, 1927년에 칠성각이, 1932년에 명부전과 백양선원 등이 건립됐다고 한다.


이 외의 기록으로 울산 최초 읍지(邑誌)인 '학성지(鶴城誌, 1749)'와 1600년대 초기 울산 출신 문인들의 문집에 백양사가 언급돼 있는 것으로 볼 때, 17세기 이전부터 유지되고 있던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한편, 1933년 신문의 기록에서 보현이 당시 약 9개 동(棟)의 건물을 중건했다는 내용과 1930년대 초에 촬영된 사진에서도 대웅전과 칠성각의 건물이 나란히 위치한 것을 찾아 볼 수 있다. 그리고 칠성각 내부에 편액돼 있는 '백양사선원칠성계안서(白楊寺禪院七星契案序)'의 내용 중 칠성각 건립 시 시주한 사람들의 명단과 함께 그 작성시기가 1930년임을 볼 때, 칠성각은 1930년 전에 조성됐던 것을 알 수 있다.



칠성각은 정면 3칸․측면 1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3량 가구로 구성돼 있다. 대공은 특별한 초각이 없는 네모대공인데, 판자형식으로 얇게 만든 것이 특징적이고, 보와 서까래 등은 심하게 휘어진 부재를 특별한 가공 없이 피죽만 벗겨 사용했기 때문에 자연미가 풍부하다. 공포는 이익공으로 초공과 이익공 모두 앙서이고 연화(蓮花)를 초각했다.


내부 단청의 경우 근대안료를 사용했으나, 조선후기 단청의 계보를 잇고 있는 것으로 확인된다. 백양사 칠성각은 비록 1920년대에 건립돼 근.현대기를 거치면서 기단과 주초, 마루 등에서 일부 변형이 있었지만, 초창기 기능이 그대로 유지되고 있고 조선후기 한국전통건축의 양식을 근대기에 잇고자 하는 등 과도기적 양상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라는 점에서 학술적 가치가 높다고 할 수 있다.


# 장성 백양사 비자나무 숲 (長城 白羊寺 비자나무 숲)



비자나무는 우리나라의 내장산 이남과 일본 등에서 자란다. 나무의 모양이 아름다워 관상용으로 많이 이용되고, 열매는 구충제 및 변비 치료제나 기름을 짜는데 쓰인다. 백양사 비자나무 분포 북한지대는 전라남도 장성의 백양사(白羊寺)주변에 8∼10m에 달하는 비자나무 5,000여 그루가 숲을 이루고 있는 곳이다. 


이 숲이 천연기념물로 지정될 당시에는 비자나무가 자라는 가장 북쪽에 있는 숲이라고 해서 그 가치를 인정받았으나, 현재는 이 지역보다 더 북쪽에 있는 내장산에서도 비자나무 숲이 발견됐다. 이 숲이 형성된 유래는 고려 고종(재위 1213∼1259) 때 각진국사(覺眞國師)가 당시 유일한 구충제였던 비자나무 열매로 가까운 마을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절 주변에 심었다고 한다. 실제로 1970년대까지도 스님들은 열매를 거둬 사람들에게 나눠 주었다고 한다.


백양사 비자나무 분포 북한지대는 우리 선조들이 비자나무 열매를 의약재료로 사용한 생활문화의 일면을 엿볼 수 있는 자료로서의 가치가 매우 크다. 또한 비자나무가 자랄 수 있는 북쪽 한계지역에 있는 대표적인 숲이므로 식물분포학적 가치가 인정돼 천연기념물로 지정.보호하고 있다.


# 팔층석탑(불사리탑)



이 탑은 대웅전 뒤뜰에 있고, 1924년에 건립됐다.


이 탑은 八正道를 상징키 위해 8층으로 조성했고, 탑 내에는 근대 불교계 지도자이자 민족대표 33인 중 한명이었던 龍城스님이 간직하고 있던 부처님의 진신사리가 봉안돼 있다. 기단부는 3중이고, 최상층 기단은 원기둥 4개를 세워 탑신부를 받치도록 했다. 탑신석에는 우주를 비롯한 별도의 조각이 없고, 옥개석은 옥개받침이 얕고 전체적으로 납작한 형태이다. 


상륜부는 보주형이다. 이 탑의 뒤편에는 만암스님이 비문을 쓴 사리탑비가 건립돼 있고, 탑 정면에는 팔정도의 각 단어가 새겨진 석주가 4주씩 나란히 세워져 있다.<끝>/사진-윤정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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