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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기의 공연산책 215] 무대의상 대가 최보경 선생을 추모하며
  • 박정기 자문위원
  • 등록 2022-10-09 20:46:00
  • 수정 2023-02-15 08:3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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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무대의상 45년, 칠순의 디자이너 최보경

의상디자이너 최보경씨는 경력 50여년간 무대의상을 제작한 대가다. 1966년 실험의 '화니'에서 시작된 그의 무대의상 작업은 이제 오페라, 무용, 뮤지컬 등 공연 예술 전반에 미치고 있으며 작품과 어울리면서 개성을 잃지 않는 독특한 색감으로 인정을 받고 있다. 50여년간 3백여 편의 각종 무대를 거치면서 2010년에는 새로 개관관한 명동예술극장에서 최보경 무대의상 45년 전을 개최했다..


최보경 선생은 숙명여고와 홍익대 미대 조각과를 다녔다. 그러다가 도중에 그만두고 옷에 관한 일을 하게 됐다. 1984년 뉴욕 FIT에서, 1985년에는 이태리 뻬르지아대학에서 무대의상에 관한 연수를 받았다.


옷에 관한 일은 처음에는 을지로 4가에서 나중에는 명륜동에서 살롱 식으로 일을 시작했다. 나는 대학시절부터 연극구경 다니기를 좋아했고 좋은 희곡을 많이 읽었다. 이런 관심이 연극 일을 제안 받았을 때 조금씩 나서게 만든 것 같다. 내가 처음 무대의상을 하게 된 것은 이대 불문과 정병희 교수님이 연출하신 '도적들의 무도회'였다. 학생 극이고 아니까 무대의상에 경험이 없이 한번 해본 것이다. 그때 그 무대에는 유계선의 딸 전향이가 출연하고 있었다. 이 인연으로 1963년인가 4년인가 영화 '징기스칸'의 의상을 하게 됐다. 전향이가 어머니에게 내 말을 해서 하게 된 것이다.


연극을 좋아해서 많이 보러 다닌 것은 1957년이나 8년쯤부터였다. 그러다가 필란델로의 '작가를 찾는 여섯 사람의 등장인물'이나 '순교자'같은 무대를 보면서 저런 작품의 의상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내가 처음으로 한 작품은 1966년 극단 실험극장의 '화니'였다. 당시 실험은 김의경씨가 대표로 있었고 쟁쟁한 스타들이 모여 있을 때였다. 실험의 무대에는 항상 관객이 있다는 말이 생기고 있을 때였다.


그 다음 작품이 '동키호테'였다. 이 작품은 세르반테스의 「동키호테」를 데일 워셔만이 뮤지컬로 만든 '라만챠이 사나이'라는 작품을 다시 원제를 붙여 만든 것이었다. 이 작품은 실험에서도 그후 여러 번 재공연을 했고 대학극 일반무대에서 많이 공연된 좋은 작품이다. 


거리의 여자 알돈자가 둘시니아 공주가 되어 가는 과정, 인간 부활의 메시지도 좋았고 이룰 수 없는 꿈 등의 노래도 좋고 여러 가지가 모두 나무랄 데가 없는 좋은 작품이었다. 나는 이런 작품들에 반했고 무대에 의욕을 느꼈다. 당시 나는 뭐가 뭔지 모르고 그저 어렵기만 했었다. 의상을 통해 각 인물들을 강하게 부각 시켜야겠다는 의욕이 충만했고 또 그러려고 무진 노력을 했다. 당시의 어려움은 잘 몰라서 겪어야 했던 어려움이 많았다. 그러나 지금은 조금 알아서 더 어렵다는 생각이 든다.



# 최보경 의상 45년 전시회


"나의 무대의상은 극단 실험극장에서 시작되었고 그래서 실험무대를 제일 많이 한 셈이다. 그리고 이제는 연극만이 아니라 무용, 오페라 등 내가 가장 나중에 만난 그러나 지금 가장 관심 가는 장르다.


이제 막 끝낸 국립오페라단의 '파우스트'가 내게는 우선 머리에서 떠나지 않고 남아 잇는 작품이다. 이 작품은 1백 명쯤 출연하는데 연출 과정에서 자꾸 겹치기 배역이 늘어났고 그 배역이 내게 얼른얼른 통고되지 않아서 고생을 많이 했다. 연기자 한 사람이 이 장면 저 장면에서 비록 군중 신이라도 등장을 하게 되면 연출상으로는 욕심을 내서 즉석에서 결정을 내리고 실행을 할 수 있지만 의상 쪽에서는 매장면마다 다른 인물 다른 의상이 요구되기 때문에 보통 일이 아니다. 이런 연출상의 변화가 옷 만드는 사람에게 즉각 통보가 되고 의논이 이루어져 실행되어야 마땅하지만 우리 무대에서는 이러 처리가 치밀하지 못한 것이 보통이다.


내가 작업과정이 즐겁고 재미있었다고 생각되는 것들, 보람이 있었다고 생각하는 작품들은 그 작품의 연출이 어떤 사람이냐는 것에 다라 결정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연출의 의상에 대한 안목이나 지적 수준, 감각 등이 의상을 맡은 사람에게 많은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실험의 대표로 실험극장의 많은 무대를 연출한 김동훈씨는 의상에 대해 좀 아는 편이라고 할 수 있다. 실험의 초기 무대 중에서 즐겁게 했던 작품들은 대부분 그의 이해가 많은 도움이 됐다.


'휘가로의 결혼'은 그 중에서 여러 번 공연하면서 계속 보충 향상의 느낌을 가지고 일할 수 있었던 무대다. 절묘한 대사들 그 속에서 살아나는 인물들로 해서 즐겁게 만든 작품이다.


김창화씨가 독일에서 돌아와서 만든 '트로이의 여인들'이나 '법에는 법으로' 등도 재미있게 한 작품이다. 김창화씨는 옷에 대해 무리한 요구가 없다. 의상에 대해 무리하게 요구하지 않고 디자이너의 의견에 충분히 귀를 기울인다는 것은 연출이 그만큼 의상에 대해 알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무대의상이 극을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한다”


1984년 연극제에서 상을 받은 성좌의 '봄날'의 경우는 남이 인정해 준 작품이지만 나 스스로는 그렇게 심혈을 기울인 작품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고 있다. 그때 나는 민예극단과 일본 공연을 가느라고 시간적인 여유가 없어 좀 황급하게 의상을 만들었다. 차근차근 작품을 분석할 여유가 없었고 제작과정에서도 마무리를 후배에게 맡기고 떠날 수밖에 없었다. 상을 받았던 '봄날'보다는 내게 더 애착이 가는 무대는 그 전해 연극제의 민중극단 참가 작이던 '게사니'였다.


또 하나 내게는 좋은 경험이 된 무대는 이탈리아 연출가가 초청되어서 만들었던 「투란 도트」였다. 나는 이 연출가의 작업 태도나 의상에 대한 태도 등에서 많은 것을 배웠다. 이 사람은 매일 오후 4시 반부터 연습이 시작되는데 혼자서 아침 일찍 나와서 손수 공연에 필요한 소품을 만들었다. 모자나 여러 가지 장신구들이나 기타 소품들을 직접 만들었다. 공연 임박해서 서울에 도착해 의상이나 소품을 만들 제작 기간이 모자란 상태에서 그는 일하는 사람의 고충을 충분히 살펴 주었다.


아마 이때의 경험이 내게 오페라에 대한 매력을 가지게 만든 것 같다. 오페라는 대개가 대작이고 실험적인 작품이 거의 없고 오랫동안 인정된 걸작 고전들이다. 의상작업도 모두 규모가 크고 작품에 대한 의구심 없이 접근할 수가 있다. 연극은 처음 보는 작품, 실험적인 것이 많아 그건 그것대로 재미가 있지만 오페라는 작품의 안정성과 큰 규모가 마음에 들고 내게 잘 맞는 것 같다.


우리 연출의 경우 의상제작 기간에 대한 고려가 없다. 디자인 상태에서 혹은 옷이 처음 나온 상태에서 옷에 대한 것을 파악할 줄 모르고 무대에 나가고 난 후에 가서야 조명 속에서 보고 알게 되는 경우가 많다. 그렇게 되면 디자인의 원칙이나 디자인에 대한 확신이 부족하게 되고 그런 상태에서 계속 흔들리게 된다. 그렇게 계속 흔들리며 무리한 요구, 불필요한 수정을 자꾸 하면서 사람들은 쓸데없이 권위를 내세우게 된다.


나는 개막 3일 전 의상 20벌을 새로 만들어 달라는 요구를 받고 당황한 적도 있다. 무대현장에서 함께 일하면서 이런 식의 무리한 요구가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 그래도 된다고 생각한다는 것은 문제가 있다.


좋은 작품에서 좋은 의상도 나오고 의상하는 재미도 나온다. '겨울 사자들' '유리동물원'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같은 작품은 내가 대사 하나하나에서부터 작품 내용 모두에 반했던 작품들이다. '겨울 사자들'은 사랑의 부재로 서로 상해 가는 인간을 훌륭하게 그린 작품으로 깊이가 있었고 '유리동물원'은 대사 속에 나오는 은신짝 같은 달에게 행복을 빌어 보자는 아만다의 말이 감명 깊었다. 금요일이라서 고기 대신 연어를 대접하고 요금을 못내 끊긴 전기 대신 촛불을 켜는 식의 대비, 방문객 짐이 모세가 되어 주기를 바라는 마음 등 섬세한 대비에서 작품의 크기와 깊이를 느꼈다. 나는 우선 이러한 작품의 향기를 내 것으로 하는 즐거움을 갖고자 한다.


제작 여건이 영세하고 좋지 않은 것은 어디나 같다. 연극은 연극대로 무용이나 오페라는 또 그것대로 비슷한 여건이다. 오페라는 규모가 좀 클 뿐 어려운 사정은 마찬가지다. 준비기간과 제작시간이 많지 않고 제작비도 한정되어 있고 그 때문에 항상 모자라는 속에서 일해야 한다. 만들어 놓은 의상의 관리나 공연 도중의 의상관리는 억망인 상태다. 


예를 들면 국립극장이나 세종문화회관 같은 자체 공연단체를 가지고 있는 큰 극장에도 드라이 클리닝 시설이 없다. 애써 만든 옷이 외부에서 해오는 드라이클리닝에서 빠져 줄어들거나 탈색되어 다시는 못 쓰게 된 경우도 있다. 이런 기본적인 관리시설이라도 갖춰졌으면 좋겠다.


나의 옷에 대한 감각은 시간이 갈수록 자꾸 로맨틱해지려는 경향이 있다. 점점 더 클래식하고 로맨틱한 경향으로 흐른다. 나는 미니스커트를 한번도 입어보지 않았다. 아무리 짧아도 무릎 아래 5센티미터 샤넬라인의 길이였다. 무대에서의 의상은 어디까지나 작품에 맞게라는 절대조건이 요구된다. 나는 극중인물에게 미니스커트를 입히는 것을 피하지는 않지만 이런 옷에 대한 나의 개인적인 취향 때문에 자꾸 오페라를 좋아하게 되는 것 같다.


나는 연극 '트로이의 여인'들에서 헬렌에게는 쉬폰의 미니스커트를 코러스에게는 울의 미니스커트를 입혔다. 그리스시대 고전의상에서도 미니스커트가 있었고 그 편이 연출 톤에 맞는다고 생각해서였다.


나는 보통때 일주일에 두 번쯤 옷감시장을 돈다. 그러다가 작품을 시작하면 일주일에 적어도 닷새는 시장을 한바퀴 돈다. 무대와 맞는 옷감, 작품에 맞는 옷감을 내가 놓치고 있지는 않은가 하는 생각, 시장에 무슨 옷감이 나왔나 궁금해져서다. 그리고는 구체적인 대상작품이 없을 때라도 미리 필요할 것 같은 옷감을 사다가 쌓아 놓는 버릇이 있다. 그 때문에 집과 작업실 주변은 항상 정리하기 어려운 옷감 짐이 쌓여 있다.


무대의상은 기술만 가지고 잘 되는 것은 아니다. 기술로는 옷은 만들 수 있지만 무대의상은 단순히 옷을 만드는 일만은 아니다. 옷으로 그 인물의 영혼을 표현해야 한다.


디자이너는 감각, 색감, 형태, 질감을 가지고 조화, 균형, 통일성을 이뤄낼 수 있다면 성공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그게 그렇게 쉽지가 않다. 내가 제일 중요하게 다루는 것은 그 중에서 색감이다. 색감은 감정이기 때문이다. 형태나 질감은 신분이나 연령을 나타낸다.


적당한 색감을 얻기가 가장 어렵다. 어떤 때는 내가 원하는 색감을 얻기 위해 염색을 하기도 하지만 대기는 시간에 쫓기게 되므로 그런 까다로움을 부릴 여유가 없다. 그래서 스프레이로 물감을 뿌리거나 탈색을 하는 정도로 타협을 할 때가 많다.


나는 대작의 경우 적어도 3개월의 제작 기간이 허용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런데 우리는 1년이 필요한 일을 한 달 안에 해내야 하는 형편이다. 너무 급해서 어쩔 수 없이 하청을 줘야 할 때 그 불안함은 이루 말할 수 없다. 나는 단추 하나라도 서툰 사람이 달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무대의상은 대개 한 번 입고 버리는 옷, 조명 속에서 멀리 보는 옷이니까 바느질은 대강 해도 되는 줄 아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무대의상에서 바느질의 품위와 직결된다. 바느질에 따라 무게가 달라진다.


오페라의 경우 주인공들을 제외한 코러스의 의상은 바쁘고 돈도 없으니 적당히 하자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코러스의 의상을 적당히 해버리면 무대에 안정성이 없다. 코러스의 의상을 완벽하게 하고 그 다음에 메인 캐스트로 가야 한다.


그래서 나는 바느질에 상당히 까다롭다. 바느질이 거칠면 무대의 격이 떨어진다.


우리 옷에 대해서는 공부도 하고 직접 만들어도 보고 여러 가지로 들여다보았는데 무척 힘들다는 생각을 했다. 단국대 석주선 의상 박물관에서 주최하는 행사에도 참여를 하고 무대에서 우리 옷을 활용한 작품도 해봤다. 내 결론은 무척 어렵고 힘들다는 것이다. 우리 옷은 어떤 종류의 옷이건 그것 자체로 너무나 완벽하다. 균형이 잡힌 철학을 가진 사람들이 만든 옷이다. 우리는 상당히 균형이 잡힌 철학을 지닌 조상을 가진 것이다. 옷 하나하나가 어디를 어떻게 고쳐볼 수가 없는 것들이다. 변형이 어렵다. 그렇다고 그대로 만들어보기도 쉽지가 않다. 


출토 유물로 남아 있는 옛 옷, 옛 바느질을 보면 그 자체가 완성된 예술품이다. 요즈음의 시장에 나오는 우리 옷감을 보면 색감이 그런 전래된 색감을 따르지 못한다. 시장에는 온갖 옷감이 쏟아져 나오는데 그런 옛날 옷감에 비하면 마구 만들어낸 플라스틱 제품 천지다. 우리의 옛 색감은 아주 독특하다. 노란색 같지 않은 그러면서도 정말 노란색, 빨간색 같지 않은 빨간색, 푸른색 같지 않은 푸른색이다. 요즈음의 옷감에는 그런 절도 있는 색이 없다. 옷감 찾아내기도 참 힘들다. 외국에는 무대의상 전용 옷감가게도 있어서 편리할 때가 있다.


우리는 원하는 질감과 색감의 옷감을 찾기 위해 옷감시장을 헤매고 다녀야 한다.


나는 서해안 배연신굿의 인간 문화재인 무당 김금화씨의 무복을 보면서 저런 옷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도 했다


그러나 80대에 들어서자 몸이 마음대로 움직여 지지를 않아 병원에도 다녔지만 고칠 수가 없었다. 내가 다니던 재림 교회에서 기도도 했다. 그러다가 요양원에 입원을 했고 치료를 받았으나 어느새..."


최보경 선생께서 돌아가셔서 슬프고 안타깝지만 하늘나라에서 좋아하시던 무대의상을 제작하시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 주요경력


황해도 금천생, 서울고 서울대미대, 서울대학교 총동문회 이사, 극작가/연출가/평론가, 한국희곡뮤지컬창작워크숍 대표, 한국문인협회 희곡분과 위원, 전 서초연극협회 회장, 본지 자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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