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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서원 97] 최산두-임억령-정구-안방준 배향한 '도원서원'
  • 이승준 기자
  • 등록 2022-10-02 09:06:24
  • 수정 2022-10-02 09:0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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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준 기자] 도원 서원은 동복 고을과 연고를 맺고 유학 진흥에 크게 기여했던 최산두, 임억령, 정구, 안방준 등 네 분을 모신 조선 후기의 서원이다.


도원 서원은 화순군 동복면 연곡길 137에 위치하고 있다. 동복면 월송 마을 가운데를 지나 뒤편 길을 따라 가면 서원이 있다.


도원 서원은 동복 고을과 관련을 맺고 있는 네 분을 모시는 서원으로 건립 연대는 1670년(현종 11)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다른 기록에는 1610년(광해군 2)이라고도 하고, 후대에 만들어진 상량문에 의하면 1668년이라고 하여 정확한 창건 연대를 확정짓기는 어렵다. 다만 1668년에 서원 건립을 시작해 1670년에 완성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처음에는 기묘사화에 관련돼 동복으로 유배를 와서 많은 후학들을 길러낸 최산두[1483~1535]와, 동복 현감을 역임하고 유학 진흥에 공이 큰 정구[1543~1620], 그리고 말년에 화순에 정사(精舍)를 짓고 성리학 연구와 후학 교육에 공이 큰 안방준[1573~1654] 등 세 분을 모신 서원이었다. 


그 뒤 1679년(숙종 5)에 동복 현감을 지내면서 학행의 모범을 보인 임억령[1496~1568]을 추배해 네 분을 모시게 됐다. 제향 인물의 위차(位次)는 '열읍원우사적(列邑院宇事蹟)'에는 최산두를 주향으로 하고 나머지를 배향으로 했다고 밝히고 있다.




도원 서원은 1871년(고종 8) 대원군의 사액 서원 철폐 명령으로 훼철됐으나 최산두의 후손을 중심으로 1975년에 유허비를 건립했고 1977년에 사우를 복설했고, 1978년에 동재와 서재를 건립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화순군 동복면 연월리 연곡 마을 뒤편 산골짜기에 위치한 서원의 외삼문은 ‘건공문(虔恭門)’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는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 솟을삼문이다. 건물 배치는 크게 강학 공간인 동재(東齋)와 서재(西齋), 제향 공간인 사우로 구분돼 있다. 외삼문을 들어서면 좌우로 동재와 서재가 있다. 모두 같은 양식으로 정면 5칸, 측면 3칸의 팔작집이다. 앞의 1칸은 툇마루이며 안쪽은 모두 온돌방이다. 동재에는 ‘숭의재(崇義齋)’ 현판이, 서재에는 ‘집성재(集誠齋)’ 현판이 걸려 있다. 



사우는 강학 공간보다 1단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고, 앞에는 도원 서원 묘정비와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내삼문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 솟을대문으로 중앙에 ‘발일문(撥一門)’이란 현판이 걸려 있다. 내삼문으로 구획된 담장 안에 정면 3칸, 측면 1칸 반의 팔작집인 사우는 ‘도원사(道源祠)’라는 현판이 걸려 있고, 사우 내부에는 제향 인물 4인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다.



초계 최씨 문중에서 관리하고 있고, 2001년 화순군 향토 문화유산 제4호로 지정됐다. 서원과 직접 관련된 유적과 유물은 전해지지 않지만 최산두와 관련된 유물로는 중종 임금이 하사한 옥대[후손 소장]가 전라남도 지방 유형 문화재 제40호[1974년 9월 24일 지정]로 지정돼 있다.


도원 서원은 동복 지역에서 최초로 사액을 받은 서원으로 조선 후기 서원이 남설되던 때에 지역 연고와 관련지어 건립한 하나의 사례로 볼 수 있다. 서원에 모신 인물들과 관련해 보면 서인계 서원으로서의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사진-윤정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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