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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서원 93] 무오-갑자사화로 참형당한 넋을 위로키 위한 서원, 화순 '해망서원'
  • 이승준 기자
  • 등록 2022-09-29 16:3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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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준 기자] 1984년 2월 29일 전라남도 문화재자료로 지정됐다. 이 서원은 1508년(중종 3) 돈재 정여해(鄭汝諧:l450~l520)가 그와 스승, 친우관계인 김종직.김굉필.정여창.김일손 등이 무오사화와 갑자사화로 참형당하자 이들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화순 해망산록에 해망단을 만들어 향사한 것이 시초이다.


정여해가 1520년에 죽은 뒤 황폐해지자 1871년(고종 8) 향내 유림들이 그 유풍을 계승하고자 정여해를 합해 5위를 해망단에서 제향했다. 이어 1934년에는 동복 만경대 건물을 매입해 사우(祠宇)를 건립하고 그 이름을 해망사라고 했다. 이것이 현재의 서원건물에 해당한다. 그뒤 1979년 유림과 후손들이 현재의 모습으로 확장해 그 이름을 해망서원이라 했다. 1989년 단청과 강당 및 숭의사의 번와를 했고 1993년, 1996년 서원을 보수했다.



건물의 배치를 보면, 해망서원과 강당이 앞쪽으로 나란히 있고 뒤편으로 이지문을 두고 그 뒤에 숭의사가 있다. 서원건물(구인당)은 정면 4칸, 측면 3칸의 겹처마 팔작지붕이고 우물천장을 했다. 우측으로부터 방, 대청, 2칸 방의 순으로 돼 있다. 강당(열락당)은 정면 4칸, 측면 l칸반의 건물로 홑처마 팔작지붕이고 우측으로부터 방, 대청2칸, 방의 순서로 되어 있다. 숭의사는 정면 3칸, 측면 1칸 건물로 겹처마 맞배지붕이다.


정여해의 본관은 하동(河東). 자는 중화(仲和), 호는 둔재(遯齋). 호참(戶參) 정인귀(鄭仁貴)의 증손으로, 아버지는 정지영(鄭之英)이고, 어머니는 신평인(新平人) 송침(宋鍼)의 딸이고, 부인은 죽산 안씨(竹山安氏) 안경지(安璟之)의 딸이다.



정여해(鄭汝諧)[1450~1530]는 김종직(金宗直)의 문하에서 수학하면서 김굉필(金宏弼).정여창(鄭汝昌) 등과는 학문적으로 교유하면서 격려했다. 1480년에 진사시에 합격햇고, 효렴(孝廉)으로 천거돼 삭주 교수(朔州敎授)를 지냈고, 1487년(성종 18)에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에 제수됐으나 허명(虛名)으로 벼슬할 수 없다 하면서 취임하지 않았다.


1498년에 무오사화(戊午士禍)가 일어날 때 신구소초(伸救疏草)를 지어서 순천의 김굉필(金宏弼) 배소(配所)에 가서 소초(疏草)를 보이니 김굉필이 손잡고 만류하며 소초를 불살랐다. 이때 통곡하고 돌아와 화순의 해망 산중(海望山中)에 정사(精舍)를 짓고 후진을 양성하는 일에 힘썼다.




1508년(중종 3)에는 김종직(金宗直), 김굉필(金宏弼), 정여창(鄭汝昌), 김일손(金馹孫) 등이 무오 사화와 갑자 사화로 인해 참형을 당하게 되자 이들을 기리기 위해 화순 해망 정사 뒤에 해망단(海望壇)을 만들고 향사했다.


문집으로는 '둔재집(遯齋集)'이 있다.


묘는 화순군 도곡면 덕곡리 이곡(耳谷)에 있다.




김종직(1431∼1492)은 조선 초기의 학자로 호는 점필재, 본관은 선산이다. 1459년(세조 5) 식년문과에 급제해 이조참판을 지내고 무오사화 때 참화를 당했다. 김굉필(1454∼1504)의 자는 대유, 호는 한훤당이며, 본관은 서흥이다. 김종직 문인으로 행의(行誼)로 추천되어 형조 좌랑을 지냈고 무오사화와 갑자사화 때 사사됐고 우의정에 추증됐다.


김일손(1464∼1498)의 자는 계운, 호는 탁영, 본관은 김해이다. 1486년 문과에 급제, 이조 정랑을 지냈고 무오사화 때 피화됐다. 정여창(1450∼1504)의 자는 백욱, 호는 일두이고 김종직의 문인이다./사진-윤정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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