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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서원 92] 하서 김인후 선생을 기리는 곡성 '영귀서원'
  • 이승준
  • 등록 2022-09-29 16:27: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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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준 기자] 1694년(숙종 20)에 지방유림의 공의로 김인후(金麟厚)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키 위해 옥과면 죽림리에 창건해 위패를 모셨다. 1729년(영조 5)에 유팽로(柳彭老)와 신이강(辛二剛)을 추가 배향하고, 1797년(정조 21)에 허계(許繼), 1846년(헌종 12)에 허소(許紹)를 추가 배향했다.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해오던 중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8년(고종 5)에 훼철됐다가 1960년전라남도 유림에 의해 현재의 위치에 복원됐다. 1965년에는 위백규(魏伯珪)를 봉안해, 6위를 모시게 됐다.



경내의 건물로는 3칸의 사우(祠宇), 신문(神門), 동서 협문(夾門), 3칸의 강당, 1칸의 전사청(典祀廳), 외삼문(外三門).고사(雇舍) 등이 있다. 사우에는 김인후를 주벽(主壁)으로 해 좌우에 허소.유팽로.위백규.허계.신이강의 위패가 봉안돼 있다.


강당은 중앙의 마루와 양쪽 협실로 돼 있는데 원내의 여러 행사와 유림의 회합 및 학문강론장소로 사용되고 있다. 전사청은 향례 때 제수(祭需)를 마련해 두는 곳이다. 이 서원에서는 매년 3월 18일에 향사를 지내고 있다. 



소장 전적으로는 '필암서원지 筆巖書院誌' 3책을 비롯해 300여 권의 문헌이 있다. 


전라남도 장성 출신으로, 본관은 울산(蔚山). 자는 후지(厚之), 호는 하서(河西).담재(湛齋). 아버지는 참봉 김령(金齡)이고, 어머니는 옥천 조씨(玉川趙氏)이다.


1519년(중종 14) 김안국(金安國)에게서 '소학'을 배웠다. 1531년 사마시에 합격하고 성균관에 입학했다. 이때 이황(李滉)과 교우 관계를 맺고 함께 학문을 닦았다. 1540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권지승문원부정자(權知承文院副正字)에 임용됐고, 이듬 해 호당(湖堂)에 들어가 사가독서(賜暇讀書)하고, 홍문관저작(弘文館著作)이 됐다.



1543년 홍문관박사 겸 세자시강원설서.홍문관부수찬이 돼 세자를 보필하고 가르치는 직임을 맡았다. 또한 기묘사화 때 죽임을 당한 제현(諸賢)의 원한을 개진해 문신으로서 본분을 수행했다. 그 해 부모의 봉양을 위해 옥과현감(玉果縣監)으로 나갔다.


1544년(중종 39) 중종이 죽자 제술관(製述官)으로 서울에 올라왔으나, 1545년(인종 1) 인종이 죽고 곧이어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병을 이유로 고향인 장성에 돌아가 성리학 연구에 전념했다. 그 뒤 1554년까지 성균관전적·공조정랑·홍문관교리·성균관직강 등에 제수되었으나 사직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학문세계와 저서 김인후의 성리학 이론은 유학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김인후는 당시 이항(李恒)과 기대승(奇大升) 사이에 논란이 됐던 태극음양설(太極陰陽說)에 대해, 이기(理氣)는 혼합돼 있으므로 태극이 음양을 떠나서 존재한다고 할 수는 없지만 도(道)와 기(器)의 구분은 분명하므로 태극과 음양은 일물(一物)이라고 할 수는 없다고 주장함으로써, 이항의 태극음양일물설(太極陰陽一物說)을 반대한 기대승에 동조했다. 



또한 인심(人心)과 도심(道心)은 모두 그 동처(動處)를 두고 이른 말임을 주장함으로써, 후일 기대승의 주정설(主情說) 형성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김인후는 수양론에 있어서는 성경(誠敬)을 주된 목표로 삼았다. 노수신(盧守愼)과 함께 숙흥야매잠해(夙興夜寐箴解)를 논한 내용을 보면, 마음이 일신을 주재한다는 노수신의 설을 비판하고, 마음이 일신을 주재하지만 기(氣)가 섞여서 마음을 밖으로 잃게 되면 주재자를 잃게 되므로, 경(敬)으로써 이를 바르게 해야 다시금 마음이 일신을 주재할 수 있게 된다는 주경설(主敬說)을 주장했다.


김인후는 천문.지리.의약.산수.율력(律曆)에도 정통했다. 제자로는 정철(鄭澈).변성온(卞成溫).기효간(奇孝諫).조희문(趙希文).오건(吳健) 등이 있다. 




시문에 능해 10여 권의 시문집을 남겼으나 도학에 관한 저술은 많지 않다. 저서로는 ‘하서집(河西集)’ ‘주역관상편(周易觀象篇)’ ‘서명사천도(西銘事天圖)’ ‘백련초해(百聯抄解)’ 등이 있다.


1796년(정조 20) 문묘에 배향됐고, 장성의 필암서원(筆巖書院)과 옥과의 영귀서원(詠歸書院)에 제향됐고, 대광보국숭록대부 영의정 겸 영경연.홍문관.예문관.춘추관.관상감사에 추증됐다. 시호는 문정(文正)이다./사진-윤정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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