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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서원 90] 황희.오상덕.황위 3위를 모신 서원, 남원 '풍계서원'
  • 이승준 기자
  • 등록 2022-09-28 08:27: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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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준 기자] 조선 전기 세종 때의 영의정 황희(黃喜)를 주벽(主壁)으로 삼아 오상덕(吳尙德)과 황위(黃暐) 3현을 배향하고 있다. 황희(黃喜)의 선조는 장수와 남원 등지에서 살았고, 부친 황군서(黃君瑞)는 개성으로 옮겨 살았다. 황희는 1363년(공민왕 12)에 개성 가조리에서 출생했다. 


고려 후기 두문동에 들어간 황희는 72현의 대표로 조선 조정에 들어가 사헌부 감찰을 맡아 일을 시작해 지신사(知申事)가 됐다. 태종이 즉위했을 때 세자 책봉 문제로 태종과 의견이 달라 남원으로 유배됐다. 남원에서 유배 생활을 한 3년 동안 선조 황감평이 지은 일재(逸齋)라는 집의 옛터에 누정을 지어 광통루라 하고 이곳에서 독서에 열중했다.



오상덕(吳尙德)은 호가 두암(杜庵)이다. 고려 후기 이색, 이숭인, 정몽주 등과 교분이 두터웠고며, 황희의 매형이기도 하다. 당시 불교를 금하고 유교를 숭상할 것을 왕에게 여러 차례 상소했다. 그는 고려 후기 소부시소감을 역임했으나 역성 혁명으로 조선이 들어서자 벼슬을 버리고 고려 유신들과 두문동에 들어가 은둔했다.


황위(黃暐)는 임진왜란 때 진주성 싸움에서 순절한 무민공 황진 장군의 후예로 시문이 훌륭해 이름을 떨쳤고, 후학 교육에 여생을 바쳤다.



풍계서원은 1788년(정조 12)에 지었으나, 1868년(고종 5)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폐쇄돼 황희의 영정만을 모셔오다가 1909년 복원했다. 매년 봄 3월 10일에 유림들이 모여 제사를 지내고 있다. 1984년 4월 1일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54호로 지정됐고,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돼 전라북도 문화재자료로 재지정됐다.


현재는 삼문, 강당, 사당이 있다. 전면 3칸의 솟을문이 있고, 각 문마다 태극을 그려놓았다. 강당은 정면 5칸, 측면 2칸으로 지붕은 팔작지붕의 형태이다. 왼쪽 1칸은 앞뒤로 두 개의 방이 있고, 오른쪽 2칸은 각각 뒤쪽에 방이 1칸씩 있어 모두 방이 4칸 있다.




왼쪽의 두 번째와 세 번째 2칸은 대청으로, 앞뒤가 툭 터져 있고 뒤쪽에 큰 방문이 칸칸이 두 개 있다. 중앙 상단에 ‘풍계서원(楓溪書院)’이라는 현액이 걸려 있다. 지붕은 양기와를 입혔다.


사당은 정면 3칸, 측면 칸 반 규모로 맞배지붕의 전후 겹처마 형태이다. 정면 3칸은 두리기둥 사이를 모두 동일한 간격으로 분할하고, 각각 두 짝 열 개의 빗살문을 달았다. 측면 칸 반에서 앞의 반 칸은 네 개의 도리기둥에 회랑처럼 공간이 열려 있다.




공포(栱包)는 이익공(二翼工)에 가까운 형식으로서 외목도리를 받쳤고, 미칸에는 귀면을 그린 네 개의 화반을 하나씩 배치했다. 가구 형식은 매우 간소하고 들보 위에는 원형의 대공을 얹어 총마루를 받치게 했다. 내부는 벽마다 회칠을 해 대나무를 그려넣었다. 서원 주위에는 돌담장이 둘러져 있고, 뜰 안에는 풍계서원의 기적비가 세워져 있다.


청렴하고 학문과 절개가 뛰어난 선현들을 모신 곳으로, 강당과 사당이 주변 자연과 조화롭게 어우러져 있다./사진-윤정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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