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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서원 83] 백사 이항복을 모신 사당 장성 '가산서원'
  • 이승준 기자
  • 등록 2022-09-23 06:5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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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준 기자] 고려 후기 문신 익재(益齋) 이제현( 1287∼1367)과 이제현의 8대손인 조선 중기 문신이자 학자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 1556~1618) 등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1498년(연산군 4) 이제현의 5대손인 장수현감 이재인(李在仁 1415~?)이 현 전라남도 장성군 삼계면 주산리 백산촌에 집을 짓고 은거하면서 익재의 영정을 모셨고, 1559년 후손 이대정(李大貞)이 사우(祠宇) 백산사(白山祠)를 지어 익재의 제사를 모셨다. 


세월이 흘러 사우가 퇴락하자 1766년(영조 42) 후손 이언경(李彦慶)이 낭월산 남쪽 기슭의 현 위치(장성군 삼서면 홍정리 가산마을)로 사당을 옮겨 가산서원(佳山書院)이라 하고 이항복을 추배했다. 




1868년(고종 5) 훼철돼 영정만 모시는 영당(影堂)으로 남았다가 1960년 중건했다. 1998년 장성향교의 발의로 이재인을 추배하고, 해마다 음력 8월 10일 향사를 올린다. ‘익재영정(가산사 소장 익재영정, 전라남도문화재자료)’이 보관돼 있다.


오성대감으로 더 널리 알려진 백사 이항복은 고려의 대학자 익재 이제현(李齊賢)의 후손이며 참찬(參贊) 몽량(夢亮)의 아들이다. 호는 백사(白沙)와 필운(弼雲).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어머니 슬하에서 자란 이항복은 어려서부터 의기롭고 호방한 기질을 드러낸다. 한때 한량패의 우두머리였으나 어머니의 교훈에 마음을 가다듬고 학업에 열중해 모범소년이 될 만큼 결심도 굳세었다. 항복의 그릇을 알아차린 어머니의 따스한 배려가 지극했으나, 나이 열다섯에 어머니마저 여의고 혼자가 된다.





이항복은 어머니의 3년상을 모시고는 곧장 성균관에 들어가 학문에 힘써 명성을 떨치게 된다. 도원수 권율(權慄)의 사위가 되고, 곧 진사초시에 합격했으며, 1580년 알성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벼슬길에 들어서고, 이듬해는 예문관검열(藝文館檢閱)이 된다. 


관직에 들어와서도 서로 의사가 존중되고 뜻이 잘맞았던 한음 이덕형과는 어렸을 때부터 죽마고우. 번뜩이는 지기에 호방한 장난꾸러기 이항복과 점잖은 이덕형 사이에 얽힌 일화는 허다하게 많다. 특히 어린이들이 담력을 키우는 데 그들 일화는 빠짐없이 등장하곤 한다.


선조의 ‘강목’(綱目) 강연(講筵)이 있을 때 대제학 이율곡에게 한림(翰林)감을 천거하라는 왕명이 내려 이덕형과 함께 다섯 명이 천거되매 내장고(內藏庫)의 강목을 하사받고 문한(文翰)을 다루는 옥당(홍문관)에 들어간다. 



이어 옥당의 정자.성균관의 전적과 사간원의 정언 겸 지제고.수찬.이조좌랑 등을 역임하고, 이조참판.형조판서.대사헌 겸 홍문관제학.영의정.좌의정 등 거의 모든 요직을 거치면서 안으로는 국사에 힘쓰고, 밖으로는 명나라 사절 접대를 전담하는 등 뛰어난 외교관이 된다. 임진왜란 때는 이덕형과 함께 명나라에 구원병 요청을 성사시켰다. 이항복을 ‘동방의 인물’로 존경한 명나라 사신은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찾았다고 한다.


원만한 인품으로 덕을 베풀 줄 알았던 그는 파당을 싫어하고 경계하는 데선 강직했다. 그의 관료생활은 특히 어려운 사건이 있을 때마다 뛰어난 중재자로 나서 시비를 공정히 가리고 소신을 굽히지 않은 점이 눈에 띈다. 대사간 이발(李潑)이 파당을 만들려 할 때 공박하다 비난을 받고, 그 문제로 세 차례나 사직을 하려다 선조가 허락하지 않아 특명으로 옥당에 머물기도 했으며, 정여립의 모반사건을 처리한 공로로 평난공신 3등에 녹훈된다. ‘오성대감’으로 불리게 된 것은 임진왜란이 일어나 선조가 의주로 피란할 때 끝까지 왕을 모시고 국사를 도운 공로로 이조참판 오성군에 봉해지면서였다.



송강 정철(鄭澈)의 사화가 일어나 죄를 논하자 다른 신하들은 물론이고 친구들마저 자신에게 화가 미칠까 두려워 아무도 접근하지 않았다. 이항복은 좌승지의 신분으로 날마다 정철을 찾아가 정담을 나누면서 위로했고, 결국 정철사건을 태만히 했다는 공격을 받아 파직되기도 한다. 그는 자신의 직책과 보신에 두려움 없이 강직하고 소신이 뚜렷해 시비를 정대히 가리고 의를 존중하면서 인물을 아낄 줄 알았다.


조선 중기 한문사대가의 한사람인 이정구(李廷龜, 1564~1635)는 이항복의 인품에 대해 “그가 관직에 있기 40년, 누구 한 사람 당색에 물들지 않은 이 없었으나, 오직 그만이 초연히 중립을 지켜 공평히 처세하였다. 때문에 아무도 그에게서 당색을 찾아볼 수 없었고, 그 문장은 또한 그러한 기품에서 이루어졌으니 뛰어날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그러나 백사 이항복은 결국 당쟁의 와중에서 소신껏 저항하다가 유배길에 오르고 그곳에서 위리안치(圍籬安置)돼 생을 마친다. 1608년 선조가 죽고 광해군이 즉위하자 북인이 정권을 잡게 되고, 광해군의 친형 임해군의 살해음모를 반대하다 공격을 받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어 선조의 장인 김제남의 가문을 파멸하고 영창대군을 살해하는 등 다툼이 계속되는 와중에서 이항복은 광해군에게 인재를 잘못 천거했다는 구실로 공격을 받아 좌의정에서 중추부사로 내려앉게 된다. 이어 1617년 인목대비 김씨가 서궁에 유폐되고, 다시 왕비에서 평민으로 폐위하자는 주장에 맞서 싸우다가 이듬해인 1618년 관직을 삭탈당하고 함경도 북청으로 유배되어 그해 세상을 떠난다. 그의 나이 62세였다.


이항복이 유배를 떠나매 많은 이들이 시를 읊어 애달픔을 표했다. 이항복은 마지막을 예견한 유배길에서도 자신의 고독한 심정과 충정을 다한 애틋한 노래를 남겨 오늘날까지 회자된다.


철령 높은 재에 자고 가는 저 구름아

고신원루(孤臣寃淚)를 비삼아 띄워다가

임 계신 구중궁궐에 뿌려본들 어떠하리


이항복의 학문 세계의 결정체인 저서로는 '사례훈몽'(四禮訓蒙) 1권, '주소계의'(奏疏啓議) 각 2권, '노사영언'(魯史零言) 등이 있다./사진-윤정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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